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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戰士) 남재준

화이트보스 2013. 11. 6. 10:25

전사(戰士) 남재준

  • [저널로그] ‘태풍의 눈’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연구
  • [저널로그] 남재준 국정원장의 별명 '국정사 주지스님'?
  • 정용관 정치부 차장
    김대중 정부 시절 어느 날, 박지원은 군의 최고 수장 A 씨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A 씨가 “군에 보기 드문 ‘진짜 군인’이 하나 있다”는 얘기를 하자 그는 “누구인지 보고 싶으니 부르자”고 했다. 호출을 받은 그 군인은 몇 차례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거절하다 상관의 계속되는 요구에 결국 응한다.

    얼마 뒤 술집에 들어선 이 군인. 자신의 상관에게 큰 소리로 경례를 붙이고는 자리에 앉아 입을 다문다. 박지원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박지원이 누구인가. 당시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세 중 한 명이었다. 나중엔 ‘소통령’이란 말도 들었다. 그런 박지원 앞에서 별 셋의 이 군인은 조금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상관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불려온 것뿐’이라는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군인 시절의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에 관한 이런 일화는 한둘이 아니다.

    그는 강단 있는 군인이었다. ‘정치군인’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자타가 인정하는 ‘원칙적 보수주의자’로 박근혜 대통령과도 코드가 완벽하게 일치한다. ‘깐깐하다’는 점만 빼놓고는 박 대통령의 머릿속에 진작부터 국정원장 0순위로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올 3월 국정원장 내정 발표 일주일 전, 몇몇 새누리당 고위 관계자가 사석에서 “설마 국정원장에 군인을 시키겠어?”라고 말한 건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얘기였다.

    취임식 때 “나는 전사(戰士)가 될 각오가 돼 있다. 여러분도 전사가 될 각오를 다져 달라”는 짧은 당부를 남긴 남 원장은 이후 6개월여 동안 국정원뿐만 아니라 여권 내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어 왔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 공개 등과 같은 민감한 이슈의 최종 결정권은 그의 몫이었다. 권력 코어그룹 내에서의 목소리도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는 전언이다. 청와대에서 열리는 외교안보장관회의에서 남 원장이 국정원의 정보를 바탕으로 강한 톤으로 말을 꺼내면 다른 참석자들은 이견을 내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는 타고난 군인이다. 전쟁의 관점, 아군과 적군의 시각에서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 국가관, 안보관이 투철하다는 얘기다. 국정원 내부 행사 도중 간부들이 애국가를 우물우물 부르자 마이크를 잡고 “애국가부터 크게 부르라”고 질책한 적도 있다고 한다. 국정원의 기강을 바로잡고 혼(魂)을 불어넣는 데 적임자일 수도 있지만 최종 평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MB의 심복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려 4년 동안 정보기관 수장을 지낸 뒤 요즘 ‘동네북’ 신세가 된 원세훈 전 원장도 재임 중 인사권 독점을 통해 조직을 확실히 장악하긴 했다. 대체 무엇을 위한 장악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남 원장이 전임 원장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국정원은 뭐 하는 곳이다”라는 정체성 확립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그 점에서 국정원 일부 직원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남 원장의 태도는 의아했다. 혹시 대북 심리전과 대선 개입의 모호한 경계선에 있는 이번 사건을 ‘이적행위’라는 잣대로만 바라봤던 것은 아닐까. 좀 더 선제적으로 철저한 진상 규명 의지를 밝혔어야 했다.

    한 가지 더.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를 내세웠지만 창조와 창의가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구현돼야 할 곳이 바로 정부 공식 라인 뒤에서 움직이는 국정원일 수 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성공시키려면 사고의 경직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석기 사건에서 보듯 종북세력 척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그것만이 국정원 업무의 전부는 아니다.

    정용관 정치부 차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