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전 총리·본사 고문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인 강대국 밀실협상의 결과로 타율적 국토분단을 강요당하고 동서냉전이란 세계적 이념 갈등의 와중에서 두 개의 국가체제를 수립한 데 이어 한국전쟁이란 사상 최대의 민족적 시련을 겪었던 우리에게 냉전의 종식, 88 서울올림픽, 독일 통일로 상징되는 역사적 전환기는 평화통일로 향한 전략적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1989년 가을 민주화의 열기와 흥분 속에서 광범위한 국민여론이 결집되어 국회에서 여야4당 합의로 채택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바로 단일민족 국가의 전통과 통합을 새로이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의 민족공동체란 우산 밑에 두 개의 국가체제가 공존협력하면서 평화통일로 향해 전진하자는 이 방안은 남북 간의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 및 유엔 동시가입으로 이어지면서 한때 실현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북한은 개방 시대가 열려가는 세계사의 흐름, 특히 시장경제의 확산에 동승하려는 러시아·중국·베트남 등 공산 국가들의 적응 노력을 외면하고 극단적 고립에 묶여 예외국가의 신세를 자초함으로써 남북이 함께 이뤄야 할 한민족공동체의 발전 가능성을 무산시켜버렸다. 더욱이 고립무원의 진지(陣地) 체제를 수호하는 수단으로 핵무기 개발을 택함으로써 국제사회는 물론 당장 우리 민족의 안전을 위협하는 비상 사태를 야기하고 있다.
지난 25년은 지구촌의 세계화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었던 시기였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하고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한국은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차원에서 세계화 행진의 앞줄에 서는 국가로 부상했다. 그와는 정반대로 북한은 극단적 고립과 요새화 정책으로 세계화 대열에서 뒤떨어지다 못해 열외로 제쳐 버려진 양태가 되어가고 있다. 그 결과로 남북 간은 물론 북한과 국제사회의 사회문화적 간극은 위험 수위를 넘게 되었고 통일로 향한 통합의 가능성도 소산되면서 한반도는 지구촌의 위험지대가 되어버렸다. 민족공동체 통일전략의 근본적 보완을 늦출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우리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혈통주의에 입각한 단일민족의 순수성은 다문화사회를 긍정적으로 수용한 오늘의 대한민국이나 내일의 민족공동체에선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 개방사회와 민주국가,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지구촌 만들기에 앞장서는 민족공동체와 통일국가를 지향해 이미 우리는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제정25주년을 맞는 새해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공동체 정신을 가다듬는 계기로 다가오길 바란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