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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공동체 어디로 가고 있나

화이트보스 2013. 12. 30. 18:53

한민족공동체 어디로 가고 있나[중앙일보] 입력 2013.12.30 00:19 / 수정 2013.12.30 00:36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또 한 해를 보내는 금년 세모는 유난히 무겁고 어수선하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장성택 처형은 안보위기를 넘어 민족공동체 통일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는 우울한 사건이었다. 21세기까지 살아남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가 앞으로 어찌될지는 차치하고 종국에는 한민족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북한 사회의 심각한 병리현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걱정은 한층 깊어질 수밖에 없다. 통일국가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통합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라는 울타리 안에서 수천 년을 함께 살아온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담보해온 것이 하나의 사회, 하나의 문화, 하나의 언어, 더 나아가 하나의 혈연으로 얽힌 공동체 의식이었기에 국토 통일에 버금가게 새삼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족과 국가를 분명하게 구분 짓기보다는 오히려 일치시켜 왔던 것이 우리 정치문화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인 강대국 밀실협상의 결과로 타율적 국토분단을 강요당하고 동서냉전이란 세계적 이념 갈등의 와중에서 두 개의 국가체제를 수립한 데 이어 한국전쟁이란 사상 최대의 민족적 시련을 겪었던 우리에게 냉전의 종식, 88 서울올림픽, 독일 통일로 상징되는 역사적 전환기는 평화통일로 향한 전략적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1989년 가을 민주화의 열기와 흥분 속에서 광범위한 국민여론이 결집되어 국회에서 여야4당 합의로 채택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바로 단일민족 국가의 전통과 통합을 새로이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의 민족공동체란 우산 밑에 두 개의 국가체제가 공존협력하면서 평화통일로 향해 전진하자는 이 방안은 남북 간의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 및 유엔 동시가입으로 이어지면서 한때 실현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북한은 개방 시대가 열려가는 세계사의 흐름, 특히 시장경제의 확산에 동승하려는 러시아·중국·베트남 등 공산 국가들의 적응 노력을 외면하고 극단적 고립에 묶여 예외국가의 신세를 자초함으로써 남북이 함께 이뤄야 할 한민족공동체의 발전 가능성을 무산시켜버렸다. 더욱이 고립무원의 진지(陣地) 체제를 수호하는 수단으로 핵무기 개발을 택함으로써 국제사회는 물론 당장 우리 민족의 안전을 위협하는 비상 사태를 야기하고 있다.

 지난 25년은 지구촌의 세계화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었던 시기였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하고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한국은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차원에서 세계화 행진의 앞줄에 서는 국가로 부상했다. 그와는 정반대로 북한은 극단적 고립과 요새화 정책으로 세계화 대열에서 뒤떨어지다 못해 열외로 제쳐 버려진 양태가 되어가고 있다. 그 결과로 남북 간은 물론 북한과 국제사회의 사회문화적 간극은 위험 수위를 넘게 되었고 통일로 향한 통합의 가능성도 소산되면서 한반도는 지구촌의 위험지대가 되어버렸다. 민족공동체 통일전략의 근본적 보완을 늦출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무엇보다도 하나의 지구촌 시대에 걸맞은 ‘우리 국민’과 한민족공동체 ‘구성원’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민주국가인 대한민국과 혈연에 초점을 맞춘 종족(種族)적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한민족공동체와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하자는 것이다. 이제는 한민족의 일원(一員)은 자동적으로 통일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새롭게 다듬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세계 175개국에 살고 있는 한민족 디아스포라, 즉 해외로 이주해 살고 있는 한인들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는 예상 외의 복잡한 문제가 될 것이다. 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만들 때만 해도 단일민족인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국민정서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살고 있는 수백만의 ‘해외동포’ ‘재외교포’ ‘외국국적동포’들이 한민족공동체에서 차지하는 정치적·법적 위치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통일이 수반하는 사회통합의 법률적인 절차를 준비하는 것이 결코 간단한 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혈통주의에 입각한 단일민족의 순수성은 다문화사회를 긍정적으로 수용한 오늘의 대한민국이나 내일의 민족공동체에선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 개방사회와 민주국가,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지구촌 만들기에 앞장서는 민족공동체와 통일국가를 지향해 이미 우리는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제정25주년을 맞는 새해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공동체 정신을 가다듬는 계기로 다가오길 바란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