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열 경제부 차장
대학을 다니다 이민 가서 '월가 한국인 1세대'로 활약하던 존 리는 "내 본업은 돈이 일하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작년 말 서울로 돌아와 메리츠자산운용의 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최근 기자와 만나 "한국에 와서 가장 놀란 것 중 하나는 기업들은 천문학적인 유보금을 쌓아놓고만 있고, 금융사에 다니는 직원들조차 주식 투자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돈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 아니라 돈이 제대로 일하게 하면 나라도, 기업도, 개인도 잘살게 된다는 걸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일본이 왜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했나요. 개인과 기업들이 돈을 굴리지 않았기 때문 아닌가요. 개인이든 기업이든 돈을 투자할 곳이 없다면서 은행에 넣어두거나 부동산이나 건물을 사서 임대료나 기대하고 살다가 개인도 나라도 쪼그라들지 않았나요. 돈은 많지만 돈이 일하지 않아 장기 불황에 빠져든 것이죠. 미국에 중산층이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돈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기업은 투자를 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배당이라도 합니다. 개인도 벤처부터 각종 주식 투자를 합니다."
요즘처럼 불안한 시절에는 누구든 돈을 굴리는 것이 불안할 수 있다. 동시에 이럴 때일수록 '돈이 더 일하게 하자'는 고민은 진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실 경제가 좋아지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람들이 더 많이 일하게 하고, 돈들이 더 잘 굴러다니게 하면 된다. 어려운 말로 노동과 자본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인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둘 다 제대로 안 된다.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난 3월 기준 전체 인구의 3.9%, 102만명이란 게 정부 공식 통계치다. 실제로는 더 많다고 해도 실업률은 10%를 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실업률만큼 심각한 것은 일하지 않는 돈, 즉 자본의 실업률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갈 곳을 찾지 못한 돈 700조원 이상이 단기 부동 자금이란 이름으로 시중에서 놀고 있다. 총통화에서 단기 부동 자금을 단순히 나누면 21%가 제대로 일 안 하는 돈인 셈이다. 180조원이 넘는 1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이나 총 80조원이 넘지만 그중 90% 이상이 예·적금에 잠겨 있는 퇴직연금 등을 따지면 그 비율은 더 높다. 기업이나 개인의 돈이 더 많이 일하게 하는 것이 규제 개혁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