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한국만 천주교가 성장하는 이유는?

화이트보스 2014. 8. 1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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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만 천주교가 성장하는 이유는?

  • 김한수 블로그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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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8.14 16:20 | 수정 : 2014.08.1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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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독교는 지금 두 가지 걱정이 있다. 하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녀간 다음 개신교인들이 천주교로 옮겨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혹시나 교황 행사 중에 개신교인을 자처하는 사람이 돌발행동을 벌일까 하는 것이다. 사실은 두 번째가 더 두렵다. 이런 일이 터지면 개신교는 망한다.”

최근 한국 개신교 목회자들을 만나면 자주 듣는 이야기다. 한국 개신교는 대개 1000만 신자를 말한다. 반면 천주교는 2013년 통계로 540만 교인이다. 수치상으로는 절반 정도인 천주교에 대해 두 배 이상의 ‘거인’인 개신교가 ‘공포감’(?)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한국 천주교는 전 세계적인 관심거리다. 천주교의 본고장인 유럽에서는 성당이 나이트클럽으로 매각되는 실정이다. 신자 수는 날로 줄고 성당은 비어간다. 교황청이 있는 로마에서조차 흑인 신부들이 넘쳐난다. ‘아프리카 없인 가톨릭이 버티기 힘든다’는 말까지 나올 지경이다. 한국은 예외다. 2013년 현재 한국 천주교 신자는 544만2996명. 총인구의 10.4%이며 2012년보다 8만명이 늘었다. 사제 수도 꾸준한 증가세로 2013년 현재 3995명으로 전년보다 2%포인트 늘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성장세다. 왜 그럴까?
한국의 천주교 신자는 544만명으로 2012년보다 8만명이 늘었다. 사진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보는 신도들. /허영한 기자
한국의 천주교 신자는 544만명으로 2012년보다 8만명이 늘었다. 사진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보는 신도들. /허영한 기자
한국 천주교는 알려진 대로 초창기에 조선의 지식인들이 독학(獨學)으로 먼저 교리를 공부하고 외국인 신부를 초빙해 왔다. 초기 조선의 천주교는 1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제사(祭祀) 문제 때문이었다. 오는 8월 16일 시복식(諡福式)에서 복자(福者)가 되는 대상자의 대표자 격인 윤지충 바오로가 대표적이다.

전라도 진산(현재의 충남 금산·논산)의 양반가 출신인 윤지충 바오로는 고종사촌 정약용 형제를 통해 처음 신앙을 접했다. 그는 요즘 말로 하면 지독한 ‘원리주의자’였다. 제사 문제는 초기 천주교인들에게 풀기 힘든 문제였다. 그래서 ‘높은 분’께 문의했다. 1790년 베이징에 있던 프랑스 출신 구베아 주교에게 물어본 결과 “제사는 안 된다”는 답변이 왔다. 그러자 윤지충은 이종사촌인 권상연과 함께 집안에 있던 신주들을 불살라 버렸다. 또 이듬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스캔들’이었고 이내 체포된 윤지충은 전주감영으로 이송돼 처형됐다. 윤지충을 시작으로 1만명(2만명 이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상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제사 문제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구베아 주교가 제사를 금지한 데 대해서는 ‘오해’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조상의 신주를 하느님 이외의 신(神)으로 이해한 당시 천주교 지도층이 금지했다는 것이다. 초기 천주교인들은 신앙을 꿋꿋이 지키며 심지어 참수되는 순간에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숨져 갔다. 조선의 반상(班常)의 질서도 허물었다. 흔들리던 늙은 왕국 조선은 용납할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로 다스렸으나, 서구의 신앙 앞에 무기력했다.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서구 열강의 조선 침략을 요청했던 ‘황사영 백서(帛書) 사건’(1801). 이후로도 천주교인들 사이에는 교황청 혹은 서구 열강이 천주교를 박해하는 조선 왕조를 혼내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허락된 것은 제국주의의 침략 이후. 병인양요 이후인 1886년 조선은 조불조약과 교민조약(敎民條約·1899)을 계기로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그렇지만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 천주교는 일제에 강력히 저항하지 않았다. 1909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토마스 의사(義士)를 천주교회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 분위기를 보여준다. 1945년 광복 후 사정이 조금씩 달라진다. 노기남 대주교를 비롯해 김수환 추기경, 정진석 추기경이 잇따라 안중근 의사의 명예회복과 복권(復權)을 도모하고 ‘귀감(龜鑑)’이 되는 인물로 추앙했다. 또 광복 이전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외국인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던 전국 각 교구가 차츰 한국인 사제들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에 앞선 1939년 교황청은 제사를 허용했다. 조상을 섬기는 것이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한국 천주교의 폭발적 성장에 관한 해석에서 ‘김수환 효과’는 빠지지 않는다. 1969년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된 김수환은 추기경 혹은 천주교에 대해 잘 모르던 한국 국민에게 천주교와 추기경의 위치와 역할이 뭔지를 각인시켰다. 김수환 추기경이 취임하던 당시 100만명 수준이던 한국 천주교는 그가 선종(善終)한 2009년엔 500만명을 훌쩍 넘어 있었다. 불과 40년 만에 5배 이상 신자가 늘어났다.

천주교 오경환 신부(가톨릭대 명예교수)가 1990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천주교는 1960년대 이후 △복음화 △토착화 △참여와 나눔 △종교적 투신 등 4가지 분야에서 타종교와 차별화됐다. 조선 500년 동안 억압받았던 불교가 생활문화로 남고, 개신교가 반공 이데올로기에 앞장서는 동안 천주교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 등에서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1980년대 명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성소(聖所)가 됐고, 김 추기경은 그 중심 인물이었다. 박정희 유신정권하에선 특히 현실정치에 좌절한 지식인들이 김수환 추기경의 발언을 듣고 천주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줄임말 ‘동아투위’) 출신의 한 인사는 “당시엔 김 추기경이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등불 같았고, 그래서 지식인 사이에 천주교 입교(入敎) 붐이 일었다”고 말했다. 1983년 171만명 수준이던 천주교 신자는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1992년에 300만, 2000년에 400만, 2008년에 500만을 넘어섰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로마 교황으로는 처음 한국을 두 차례 찾았지만 통계 수치만으로 봤을 땐 ‘요한 바오로 2세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중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개신교 신자 중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개신교는 시끄럽고, 천주교는 엄숙하다”고 대답한 경우가 대다수를 차지한 적도 있다.

지금 종교계의 관심은 과연 ‘프란치스코 효과’가 어느 정도일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요한 23세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침체기’에 빠졌던 세계 가톨릭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한 교황으로 평가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 재정을 개혁하고 마피아를 파문(破門)하는 한편, 사회주의 몰락 이후 견제세력 없이 질주하던 신자유주의의 무자비함과 비도덕성을 질타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의 벗’이란 별칭처럼 권위주의를 깨면서 소탈하고 파격적인 언행으로 ‘월드스타’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사그라들던 유럽 가톨릭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국내에서도 교황 관련 책이 최근에만 30여종이 쏟아져나올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천주교계는 내심 ‘프란치스코 효과’를 기대하고 있겠지만 공식적으로는 ‘표정 관리’ 중이다. 교황 방한준비위원회 홍보분과 허영엽 신부는 지난 8월 5일 주례 브리핑에서 프란치스코 효과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교황님은 ‘개종(改宗)을 강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며 “신자로서 세상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이 필요하지 외적으로 신자 수를 늘리려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