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최혁 주필의 숨겨진 역사 찾기

화이트보스 2014. 9. 15. 16:19

남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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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특집
<최혁 주필의 숨겨진 역사 찾기>7. 박희병 선생과 덴버의 한인들
덴버, 한인노동자들의 애국·애족·외교 중심지
최혁  |  hchoi@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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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9.14  15:4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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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애국동지대표회 열린 곳…일본야욕 폭로
박희병 선생 여관 열고 300여명 한인 정착 도와
박용만 선생 찾아 유학생 대거 몰려와 文武단련



   
▲ Daily Rocky  Mountain News  1908. 7.13일자 7면에 실린 애국동지대표회의 개최 기사. 일본의 지배를 막기 위해 한인애국자들이 덴버에 모였다(Korean Patriots gather  here to free nation from JAP rule)고 보도했다. /덴버 퍼블릭 도서관 제공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콜로라도 주의 덴버(Denver)시는 한인초기이민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소다. 하와이에서 건너온 1천500여명의 한인노동자들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와 L.A 일대에 정착하거나 이곳을 경유해 네바다나 유타, 와이오밍 주 등 미 서부 탄광이나 철도 공사장으로 옮겨갔다.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한인들은 운 좋게도 오렌지 농장에서 일자리를 구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서부 산간지방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덴버지역 한인들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유학생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어린 유학생들은 신학문을 배워 청운의 뜻을 펼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대부분 관리나 부유층 자녀들이었다. 그 중심에는 박희병(朴羲秉)과 박용만(朴容萬) 선생이 자리하고 있다. 박희병과 박용만 선생은 숙부와 조카 사이다. 박희병은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1895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했다. 1896년 미국 버지니아주 로아노크 대학에서 2년 동안 수학했다.

   
▲ 박희병 선생이 운영했던 여관은 현재 Smart office furniture(사무실가구공장)으로 변해있다. 독립기념관 자료 등 기존자료들은 10여 년 전, 다른 가게가 있던 사진을 쓰고 있어서 현재의 모습과는 다르다.
박희병의 형 박선병(朴善秉)은 아들 용만을 동생 희병에게 보냈다. 용만에게 근대식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용만은 열 살 터울인 숙부 박희병의 슬하에서 13살 때부터 생활했다. 일본에서도 같이 지냈다. 박용만은 숙부 희병의 개화사상과 문명 개화론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를 닮고자 노력했다. 박용만이 호를 우성(又醒)으로 한 것은 숙부의 호 성촌(醒村)을 본뜬 것이다. 자신 또한 숙부인, 성촌처럼 되고 싶다는 열망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 덴버시 외곽에 있는 Riverside cemetery의 박희병 선생 묘소. 지난 2007년 덴버한인회에서 묘비를 다시 세웠다.
박희병은 미국 유학시절 조선정부의 소환으로 외부(지금의 외교통상부)에서 일하다가 1900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후에 평안남도 순천에 소재한 은산금광에서 통역과 대외업무를 담당했다. 상동청년회에서 설립한 ‘사립시무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개화운동과 배일사상 고취에 앞장섰다. 1905년 조선인 1천여 명이 멕시코 농장에 노예로 팔린 사건이 발생하는데, 상동청년회는 그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미국유학 경험이 있는 박희병을 멕시코로 파견했다.

박희병은 멕시코를 방문하기 위해 일단 샌프란시스코로 들어왔다. 이때 의형제 이승만의 뒤를 따라 미국에 입국해 공부할 방법을 찾고 있던 조카 박용만을 만나 네브라스카 주로 옮겨갔다. 이들이 네브라스카주로 향했던 것은 박희병이 조선에서 일할 당시 네브라스카주 출신 선교사들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박희병에게 네브라스카주 오마하 소재 유니온 퍼시픽 철도회사에 건네줄 소개장을 써주었다.

박희병과 박용만은 커니(Kearney)시에 정착해 철도회사와 교섭, 한인들의 일자리를 얻어냈다. 이들과 함께 커니시로 간 아이들은 박희병의 제자였던 10대 소년 이종희와 유일한, 8살인 이관수 등이었다. 이들이 네브라스카로 향한 이유 중의 하나는 동양인도 차별하지 않고 대학교육을 자유롭게 받게 했던 네브라스카 주의 우호적인 분위기다. 감리교세가 컸던 네브라스카 주는 선교를 위해 외국인들을 포용하고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멕시코를 방문하고 돌아온 박희병은 1906년 2월 콜로라도 주 덴버시로 생활근거지를 옮겼다. 당시 덴버는 탄광과 철도회사에서 일자리가 많았다. 사탕무농장도 일꾼들을 필요로 했다. 교육을 받기에도 좋았다. 중고등학교 등록금은 무료였고 대학 등록금도 매우 적었다. 박희병은 덴버 역 앞에 일자리 소개소와 여관(典府旅館)을 차려놓고 300여명의 한인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줬다. 또 유학생회를 조직해 한인청년들을 규합했다.

박용만과 교분이 있는 캘리포니아의 문양목 선생 등은 조선에서 유학생들이 오면 박용만 선생을 찾아 덴버로 갈 것을 권유했다. 이에 따라 1913년 미국에는 130여명의 한인유학생이 있었는데 이중 60여명이 네브라스카와 박용만 선생 곁에 머물고 있었다. 1907년 숙부 박희병이 위암으로 사망했다. 박용만 선생은 여관을 홀로 운영하면서 한인들의 힘을 모으는데 열중했다.

   
▲ Denver Times는 1908. 7. 9일자 14면에 ‘Korean Patriots gather in Denver to Prepare for War’라는 제목을 달고 한인들의 애국동지대표회 모임을 크게 실었다. 이 신문은 이승만씨 사진이라며 박용만 선생의 사진을 잘못 사용했다.
1908년 7월 11일 박용만 선생은 덴버에서 개최되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대회에 맞춰 북미지역 각 한인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애국동지대표회를 갖기로 했다. 비교적 반일 인사들이 많은 민주당 인사들에게 일본의 조선침략 야욕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덴버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회는 4일 동안 열렸다. 애국동지대표회는 한인들의 첫 국제적 회의였다. 이 회의에 대해 당시 현지 신문들은 ‘한인애국자들이 덴버에 모여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한다’며 한인들의 배일움직임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 덴버 퍼블릭 도서관 특별자료 전문사서인 제임스씨가 1900년대 초에 보도된 한인관련 기사와 자료에 대해 최혁 주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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