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과정을 다룬 KBS '대왕의 꿈' 중 백촌강 전투 부분. |
단 한 번의 결전으로 왜병 3만을 상실한 왜국(倭國)의 충격
백촌강(白村江) 전투에 대한 기록은 「三國史記(삼국사기)」·「舊唐書(구당서)」보다 「日本書紀(일본서기)」의 천지(天智) 2년(663) 條의 관련 기사가 가장 리얼하다. 그럴만도 하다. 전쟁을 밥 먹듯이 해 온 한반도나 중국대륙과 달리 일본열도에선 그런 대규모의 해전, 그것도 국제전으로 치러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그런 참패를 경험한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국(倭國)에게 유사(有史) 이래 최악의 충격이며 비극이었다. 왜국은 백제(百濟)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후 두 차례에 걸쳐 3만2000명 이상의 대군을 한반도에 밀어넣지만,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왜병 중에는 포로로 唐(당)에 끌려가 노예로 전락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왜국의 인구가 500만 명이라고 추산했을 때 3만 명의 원정군이란 숫자는 참으로 傾國之兵(경국지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무리한 대비일는지 모르지만, 인구 1억3000명에 이른 오늘의 일본에 그것을 대입시킨다면 해외파견군 80여만 명을 단 한 번의 결전으로 상실한 셈이 된다.
다음은 「日本書紀」 天智 2년(663) 條에 기록된 「白村江의 전투」 상보이다.
< 秋 8월13일, 신라는 백제왕이 자기의 良將(양장: 福信)을 목 베어 죽인 것을 듣고 곧바로 백제로 공격해 들어가 먼저 州柔(주유: 周留城)를 빼앗으려고 모의하였다. 이에 백제왕이 신라의 침공계획을 알고서 여러 장수들에게 『지금 들은 바에 의하면 대일본국의 구원군의 장군 廬原君臣(여원군신: 이오하라노 키미오미)이 용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오고 있다고 한다. 여러 장군들은 신라군의 공격에 대비하기를 바란다. 나는 스스로 白村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본의 장군들을 접대하리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백제왕」은 義慈王(의자왕)의 아들로서 660년 백제의 패망 당시 왜국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백제부흥군의 군사지도자 복신(福信)의 요청에 의해 662년 5월 왜군 5000명의 호위를 받으며 옛 백제땅으로 돌아와 王으로 옹립된 부여풍(扶餘豊)이다. 日本書紀엔 그의 이름이 「부여풍장(扶餘豊璋)」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위의 인용문 중 「大日本」 또는 「日本」은 「倭國(왜국)」으로 표기되어야 정확하다. 왜냐하면 「日本」 이란 국호는 그로부터 7년 후인 670년부터 제정·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천황(天皇)」이란 칭호도 670년 이후에 사용된 日本 임금의 칭호이다. 다만 이 글에선 혼란을 피하기 위해 통례(通例)에 따라 670년 이전의 日本 임금에 대해서도 천황호(天皇號)를 사용하기로 한다.
그것은 왜국(倭國)에게 유사(有史) 이래 최악의 충격이며 비극이었다. 왜국은 백제(百濟)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후 두 차례에 걸쳐 3만2000명 이상의 대군을 한반도에 밀어넣지만,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왜병 중에는 포로로 唐(당)에 끌려가 노예로 전락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왜국의 인구가 500만 명이라고 추산했을 때 3만 명의 원정군이란 숫자는 참으로 傾國之兵(경국지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무리한 대비일는지 모르지만, 인구 1억3000명에 이른 오늘의 일본에 그것을 대입시킨다면 해외파견군 80여만 명을 단 한 번의 결전으로 상실한 셈이 된다.
다음은 「日本書紀」 天智 2년(663) 條에 기록된 「白村江의 전투」 상보이다.
< 秋 8월13일, 신라는 백제왕이 자기의 良將(양장: 福信)을 목 베어 죽인 것을 듣고 곧바로 백제로 공격해 들어가 먼저 州柔(주유: 周留城)를 빼앗으려고 모의하였다. 이에 백제왕이 신라의 침공계획을 알고서 여러 장수들에게 『지금 들은 바에 의하면 대일본국의 구원군의 장군 廬原君臣(여원군신: 이오하라노 키미오미)이 용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오고 있다고 한다. 여러 장군들은 신라군의 공격에 대비하기를 바란다. 나는 스스로 白村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본의 장군들을 접대하리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백제왕」은 義慈王(의자왕)의 아들로서 660년 백제의 패망 당시 왜국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백제부흥군의 군사지도자 복신(福信)의 요청에 의해 662년 5월 왜군 5000명의 호위를 받으며 옛 백제땅으로 돌아와 王으로 옹립된 부여풍(扶餘豊)이다. 日本書紀엔 그의 이름이 「부여풍장(扶餘豊璋)」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위의 인용문 중 「大日本」 또는 「日本」은 「倭國(왜국)」으로 표기되어야 정확하다. 왜냐하면 「日本」 이란 국호는 그로부터 7년 후인 670년부터 제정·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천황(天皇)」이란 칭호도 670년 이후에 사용된 日本 임금의 칭호이다. 다만 이 글에선 혼란을 피하기 위해 통례(通例)에 따라 670년 이전의 日本 임금에 대해서도 천황호(天皇號)를 사용하기로 한다.
빅뉴스―복신(福信)의 주살(誅殺)
북신이 부여풍에게 참살당했다―이건 빅 뉴스였다. 부여풍이 백제부흥군의 정신적 지주였다면 복신은 최고의 군사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적국 지도부의 자기분열과 유혈숙청,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바보는 없다. 나당(羅唐) 양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백제부흥군의 사령탑인 주류성(周留城)이었다. 주류성만 떨어지면 백제의 옛땅 곳곳에서 봉기하여 여러 성에 할거하고 있던 부흥군들이 제풀에 꺾일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친히 김유신(金庾信)을 비롯한 28將과 대군을 이끌고 주류성으로 향발했다. 당고종(唐高宗)도 좌위장군 손인사(孫仁師)에게 대병(大兵)을 주어 옛 백제땅으로 급파했다. 손인사의 부대는 웅진성에 주둔 중이던 유인원(劉仁願)의 부대와 합류했다.
그렇다면 부여풍은 왜 이런 결정적 시기에 약간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주류성을 빠져 나온 것일까?
『왜국의 장군들을 마중하여, 향응을 베풀겠다』는 그의 말은 출성(出城)의 정당한 이유가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가 나가면 주류성에 농성 중인 부흥군의 장수 및 병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또한 구원에 나선 왜군으로서도 부여풍이 없는 주류성의 전략적 가치는 낮아지게 마련이었다.
이때 부여풍의 심경이 어떠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그의 沒(몰)전략적 행보가 백촌강 전투의 승패를 가름한 분기점이 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다음은 이어지는 「日本書紀」의 기록이다.
< 8월17일, 신라군이 이르러 주유성을 에워쌌다. 한편 당군의 여러 장수는 병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에 진을 쳤다>
주류성과 백촌강이 어디인지에 관해서는 설들이 분분하다. 충남의 홍성 說, 연기 說, 그리고 전북 부안 說 등이 제기되어 확정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일단 학계의 다수설에 따라 주류성을 충남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성으로 比定(비정)한다. 주류성을 지금의 건지산성이라고 한다면 관련 사서들의 지형 묘사로 보아 백촌강(중국 측 기록에선 白江)은 지금의 금강하구일 수밖에 없다.
금강하구. 이곳이 663년 羅唐연합군과 백제 부흥군·왜국 원정군 연합이 白村江 전투를 벌였던 현장이다. 현재, 왼쪽이 전북 군산이고 오른쪽이 충남 장항. |
적 깔보고 전공(戰功) 서둘러
나당연합군의 작전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신라 문무왕과 唐將 손인사·유인원은 나당 육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포위했다. 유인궤·杜爽(두상)이 이끄는 당의 수군은 금강 하구에 포진했다. 수군의 임무는 주류성을 구원하러 오는 왜국 수군의 금강 진입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당의 수군을 육상으로부터 원호하기 위해 신라의 기병부대가 금강하구 방면으로 달려갔다.
< 8월27일, 일본의 水軍 중 처음에 온 부대가 大唐의 水軍과 대전하였다. 일본이 이롭지 못해 물러났다. 당 수군은 견고하게 陣形(진형)을 갖추었다>
금강하구에 먼저 진출한 왜군의 병선이 후속군의 도착도 기다리지도 않고 唐의 수군을 먼저 공격했다는 것은 상대의 전력을 깔보았고 그런 안일한 판단하에 전공을 서둘렀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왜국 수군의 통제가 느슨했음을 엿보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탐색전으로 일본 수군이 받은 데미지는 별로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첫날의 서전에서 패배한 일본 수군은 후속부대가 금강하구에 도착하여 전력을 증강시키자 다시 적을 얕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양국 수군의 전력은 어떠했을까.
「日本書紀」는 당 수군의 전함수를 170척이라고 명기한 반면 왜군 함대의 규모는 생략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기록상의 실수일 수도 있겠지만, 왜군이 당군보다 더 많은 병선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참패했던 만큼 고의적 누락일 수도 있다.
「三國史記」 新羅本紀(신라본기)엔 『왜국 수군 병선의 척수가 1000척에 이르러 白沙에 정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측 기록인 「舊唐書」 유인궤 傳(전)에는 『왜국 수군의 함대 규모가 「400척」으로 되어 있다. 어느 기록이 정확한지는 속단할 수 없다. 삼국사기는 백제부흥군을 지원했던 왜국 수군의 全함대, 舊唐書는 백촌강 전투에 참여한 왜국 수군 함대의 규모만 한정하여 기록한 것인지도 모른다.
8월28일, 드디어 이틀째 전투가 개시되었다. 唐 함대 170척 대 왜국 함대 400척의 결전이었다. 병선의 수에서 보면 당시의 슈퍼파워인 唐 수군의 규모가 오히려 열세였다. 唐의 전선(戰船)이 큰 데 비해 왜국의 전선은 작았는지는 모른다. 당시, 왜국의 조선 기술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바닷물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日本書紀」는 이날의 전투경과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8월28일, 일본의 여러 장군과 百濟의 王이 氣象(기상)을 보지 않고, 『우리가 선수(先手)를 쳐서 싸우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다시 일본은, 대오가 난잡한 中軍의 병졸을 이끌고, 陣을 굳건히 한 大唐의 군사를 나아가 쳤다. 大唐은 좌우에서 수군을 내어 협격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官軍(관군:왜군)이 패전했다. 水中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이물(뱃머리)과 고물(船尾)을 돌릴 수 없었다. 朴市田來津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이를 갈면서 수십 인을 죽인 다음 마침내 전사했다. 이때 백제왕 豊璋(풍장: 부여풍)은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갔다>
그렇다면 중국 측 기록은 어떤가. 다음은 「舊唐書」 유인궤 傳에 묘사된 白江(白村江)에서의 전투장면이다.
< 유인궤는 왜국 수군과 백강의 하구에서 조우했다. 4번 싸워 4번 모두 이겼다. 왜국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웠다. 그 연기는 하늘을 덮고 바닷물은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왜국 수군은 궤멸하고 부여풍은 몸을 빼어 도주했다. 당·신라 연합군은 豊이 소지하던 보검을 손에 넣었다. 가짜 왕자 扶餘忠勝과 忠志 등은 士女 및 왜국군 병사, 耽羅國(탐라국: 지금의 제주도)의 使者를 이끌고 일제히 투항했다>
전투 결과는 위의 인용문와 같이 왜국 수군의 참패였다. 왜군의 패인은 「氣象(기상)」을 무시한 선제공격으로 지목되었다.
그렇다면 기상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기상이라고 하면 潮流(조류)·海流(해류) 등을 포함한 天候(천후), 즉 하늘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諸(제)현상을 지칭한다. 날씨는 현대의 걸프전쟁에서도 실증되었듯이 승패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날씨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 역사의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특히 범선시대의 해전에서 기상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로마제국의 지중해 지배권을 확립시킨 악티움 해전은 북동풍이 승패를 갈랐고, 고려와 몽골 연합군의 제1·2차 일본 침공은 태풍으로 실패했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도 바람과 해류를 이용한 영국 함대에게 궤멸당했다. 임진왜란 때 元均(원균)은 기상을 무시하고 부산포로 진격하다 풍랑 때문에 실패한 다음 회군 중 칠천량에서 궤멸당했고, 李舜臣(이순신)은 명량해전 때 함선수 13척 대 300척의 절대열세에서도 조류를 이용하여 왜군에 승리했다.
최근, 일본의 학계 일부에서는 왜군의 패전 이유로 기록된 「기상」은 단지 天候(천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만 단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 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기상의 의미를 해독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 군이 선공하면 적군은 물러난다」라고 하는, 보기에 따라서는 무모한 각개 돌격작전을 채택 또는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명확히 해야 「기상」의 정확한 의미를 해독할 수 있다. 개별적 돌파를 감행하더라도 적의 전군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예단은 전날 전투 때처럼 왜국 수군의 지휘계통이 통합되어 있지 않았음을 엿보게 한다.
백촌강 전투 당시, 왜국 수군은 여러 연안·도서 지방 호족들의 병선들을 끌어모은 연합함대였다. 당연히 전투의지가 넘치는 지휘관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지휘관도 있었을 터이다. 지휘계통이 확립되지 않았던 만큼 전투의 의지의 분열은 불가피한 결과인지 모른다.
따라서 「기상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수군지휘관들의 분열된 견해를 사전에 전혀 조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원래 「기상」이라는 말에는 인간의 심리 및 감정, 즉 기질· 기성(氣性)·심기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왜국은 해군·조선 부문의 3류국이었다. 해전의 경험이라고는 소규모 함대를 동원하여 동북지방의 「에조」라는 미개민족을 정벌했던 정도였다.
더구나 한반도 서해안에의 원정은 애당초 무리였다. 서해안의 밀물과 썰물은 12시간 주기(하루 두 번 높고 두 번 낮은)를 보이는 착잡한 해역이다. 간만의 차가 커서 어정거리다가는 배 밑바닥이 갯벌 위로 올라가 버린다. 이런 조건에서 왜국 수군은 전술적으로 통합적인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국 수군의 분열은 언제, 무엇을 계기로 생긴 것일까. 백촌강 전투 전후에서 그 해답을 구하려 한다면 백제부흥군의 왕 부여풍이 주류성을 빠져나온 사실이 주목된다.
왜국 수군은 금강 하류 연안에 위치한 주류성을 구원하기 위해 금강하구에 집결했다.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시라도 바삐 주류성을 구원해야 했다. 그 이유는 주류성이 부흥군의 핵심적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무모한 敵中 돌격을 감행했던 까닭
그러나 부여풍은 오랜 농성생활에 권태를 느꼈을까, 아무튼 주류성을 이탈해 있었다. 부여풍이 없는 주류성에서 농성 중인 병사둘의 전투의지는 감퇴될 수밖에 없다.
왜국 수군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그들에게 부여풍이 없는 주류성은 전략적 가치가 반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왜국 수군은 당의 수군에 의해 진로인 금강하구를 차단당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왜국 수군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것이다. 그것은 唐 수군에 총공격을 걸어 그 일각을 돌파하여 주류성을 구원할 것인가, 아니면 唐 수군과의 결전을 회피하고 일시철퇴할 것인가, 두 가지 방안 중 하나를 채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통합 지휘체계가 미비했던 데다 적을 앞두고 있었던 만큼 충분한 토론이나 정밀한 작전 수립은 어려웠을 터이다. 그렇다면 지휘관들의 의견은 통일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돌격론이 채용되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2일째 전투 직전, 후속부대가 도착함으로써 왜국 쪽이 함대의 수에서 당군보다 우세하다는 왜장들의 교만 때문이 아니었을까. 주류성이 포위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풍왕(豊王)과 왜장들은 조급했을 것이다. 주류성이 함락되기 전에 승부를 결정지어야 한다고 판단했을 터이다.
왜국 수군은 戰船(전선) 400여 척에 병력 2만7000명의 규모였다. 백촌강 언덕 위에는 백제부흥군의 기병이 진을 쳤다. 水戰(수전)보다 육상전투가 먼저 전개되었다. 왜국 수군을 원호하던 백제부흥군의 기병부대와 신라의 기병부대가 격돌했다.
양군의 정예를 투입한 기병전에서 신라군이 이겼다. 문무왕의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에는 『백제부흥군의 기병이 강가에서 왜선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신라의 정예 기병부대가 선봉이 되어 강가의 적 진지를 격파하니, 주류성이 힘을 잃고 마침내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장들은 함대를 당의 함대로 돌진시켰다. 당 수군의 陣形(진형)은 전날의 전투 후 더욱 강화되어 있었다. 당 수군은 돌격해 오는 왜선을 좌우로부터 협격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당 수군은 왜선에 불화살을 날렸다. 왜병들은 전투보다 진화작업에 매달렸지만, 맞바람을 맞은 倭船(왜선)들은 곧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것은 唐의 수군이 바람을 등지고 왜군에게 화공을 벌였다는 뜻이다.
왜국 수군으로서는 주류성으로 가려면 좁은 포인트인 금강하구를 불리한 풍향 속에서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패전의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 같다. 兵船에 붙이 붙자 왜병들은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당나라 병사들이 쏜 화살의 좋은 표적이 되든가, 익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백촌강 하구에서 네 나라의 육·해군이 뒤엉킨 국제전은 나당 연합군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 9월24일, 일본의 수군 및 좌평 余自信, 달솔 木素貴子, 谷那晉首, 憶禮福留, 아울러 國民들이 테레城에 이르렀다. 이튿날(25일), 배가 일본을 향해 출항했다>
일본인 학자 요다(依田豊)씨는 『백제 멸망 후 그 유민이 와서 일본의 文運(문운)에 기여, 일대 새 모습을 나타냈음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테레城에서 일본으로 출항한 인원은 잘 모르지만, 전후 합하여 전체 망명자 수는 5500명이 되며, 역사에서 누락된 사람들을 가산한다면 더 많았던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日本 역사지리 16권 6호).
『조상님들의 묘소를 어이 또다시 와 볼 수 있겠느냐』
왜국이 3년의 세월 동안 국력을 기울여 준비한 원정군은 백촌강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백촌강 전투의 패배는 사실상 백제부흥군의 종말을 의미했다. 고구려로 달아난 부여풍의 그후 행적은 역사의 기록에서 누락되었다.
비록 주류성이 나당 연합군과 맞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 9월7일, 백제의 주류성이 마침내 당에 항복하였다. 이때에 나라사람(國人)이 서로 『州柔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도다.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끝났구나. 조상님의 묘소를 어이 또다시 와 볼 수 있겠는가. 오직 테레城에 가서 일본의 장군들을 만나, 중요한 일들을 상의하여 볼 수 있을 뿐이로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전부터 枕服岐城(침복기성)에 있는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날 것임을 알렸다. 11일, 무테로 떠났다. 13일 테레에 도착했다 >
주류성 함락 후의 결말에 대해 이와나미 출판 「일본고전문학대계의 日本書紀의 註解(주해)」는 침복기城, 테레城, 무테에 관하여 모두 『자세히 모르겠다』고 했다. 주류성의 위치가 뚜렷하지 못한 사정인 만큼 그곳들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다만 「무테의 테레城」까지 가면 일본 장군과 軍船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했던 만큼 이곳은 일본 구원군의 안전한 중간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부흥전쟁의 사령탑 주류성이 함락되었지만 아직도 任存城(임존성)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왜국의 구원군까지 참패한 상황에서 백제의 부활은 불가능했다.
잔존 백제부흥군 지도자들도 이런 절망적 상황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沙相如(사타상여)와 함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저항하던 黑齒常之(흑치상지)도 이미 복신이 주살당하고 백제-왜국 연합군마저 참패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이런 흑치상지에게 당 고종이 직접 사신을 보내 회유했다. 대세를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흑치상지는 유인궤에게 나아가 항복했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흑치상지를 앞세워 遲受信(지수신)이 버티는 任存城(충남 예산군 大興面 봉수산)을 함락시켰다. 지수신 또한 고구려로 망명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