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만년 여당에 가깝다. 1955년 결성 이래 정권을 잃은 적이 두 번밖에 없다. 한 번은 93~94년 8개 정파에 의한 비(非)자민 연립정권이다. 다른 한 번은 2009~2012년 민주당 정권이다. 두 번의 비자민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72) 생활당 대표다.
아아러니컬하게도 그는 자민당의 최대 적자(嫡子)였다. 90년대 초 자민당 간사장과 당내 최대 파벌 다케시타(竹下)파의 2인자였다. 다케시타파는 우노(宇野)·가이후(海部)·미야자와(宮澤) 총리를 결정했을 정도였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93년 오자와는 자민당을 탈당했다. 미야자와 내각이 선거구제 개편을 비롯한 정치개혁 법안 처리를 미루면서다. 새로 만든 신생당 대표를 맡은 그는 비자민 연립의 호소카와(細川) 내각 탄생의 견인차이자 막후 실력자였다. 한 선거구에서 3~5명의 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를 한 명만 선출하는 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제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중선거구제는 사람과 돈을 거머쥔 거대 자민당을 영구 여당으로 만드는 장치였다.
2009년 민주당 집권은 소선구거제를 빼놓고 얘기하기 어렵다. 당시 민주당의 중의원 선거 압승을 진두지휘한 이도 오자와 대표대행이다. 이후 민주당 간사장으로 다시 내각과 당의 이중(二重) 권력 시대를 열었다가 2012년 탈당해 생활당을 창당했다. 생활당은 존재감이 미약한 군소정당이다. 여야를 오가며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늘 반기를 들어온 오자와는 일본 정계의 이단아요, 풍운아다. 정치 개혁, 유엔 틀 안에서 적극적 국제공헌을 강조하는 보통국가론, 관료 주도 정치 타파는 늘 오자와의 화두였다. 그가 지난 4일 국민대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일 우호협력 관계 발전을 위해 힘써온 점이 평가를 받았다. 오자와 대표는 “결의를 새롭게 해서 한·일 양 국민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학위 수여식 후 1시간여 동안 국민대 캠퍼스에서 그를 만났다.
-아베 신조 총리가 9월 3일 단행한 개각에 관한 평가부터 듣고 싶다. 아베 총리는 ‘실행·실현 내각’이라고 강조했지만 한국에선 일본 최대 보수결사체 일본회의와 관계가 깊은 극우 내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내각 개조를 했다고 해서 아무런 변화, 영향도 없다. 일본에서는 아베 1차 내각을 ‘친구 내각’이라고들 하는데 (아베 총리와) 친하고, 경향이 같은 사람이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아베씨가 마찬가지인 이상, 지금까지의 정치 자세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정말 우리로서는 걱정이다.”
-아베 내각의 적극적 평화주의, 역사 수정주의 움직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아베씨는 이론적인 우익, 우파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전(戰前) 회귀형의 사고방식, 대국주의적 일본(관)을 띠고 있다고 한다. 그런 그의 감각이 지금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도 그렇고, 집단적 자위권 문제도 그렇다. 그런 의식 속에서는 과거 역사 인식이 조금 다르다. 그는 과거 대일본제국 무렵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와 생각을 갖고 있다. 위안부 문제나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 대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하지 않고 있다.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말을 얼버무리고 있다. 과거의 일본 역사에 대해, 또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으니 중국과도, 한국과도 잘되지 않고 있다. 그런 것은 지금의 한·일 양국에 상당히 비극적인 것인 동시에 일본의 장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다. 아베씨는 처음에는 헌법 개정을 얘기했다. 그런데 국민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 한 발 물러나서 해석으로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각의 결정을 했다. 이것은 명백히 일본 헌법 위반이다. 정부, 행정이 점점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만큼 어떻게 해서라도 가까운 시일 내에 정권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보통국가라고 말했을 당시 일본은 경제는 컸지만 자립하지 않았다. 미국의 비호 아래 온실 속에서 자란 아이처럼, 몸체만 큰….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일본이 비호를 받던 시대는 끝났다. 그래서 일본이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로 얘기를 한 것이다. 그것이 이상하게 해외까지 전달됐다. 일본은 국제사회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공헌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유엔을 통한 평화활동에 일본이 참가하는 것이다. 일본 멋대로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헌법이 허용하지 않는다. 아베씨의 독선적·대국주의적인 전전 회귀적 발상은 한국과 중국에도 폐를 끼치는 것이지만 일본에도 가장 위험한 정치노선이다.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생활당 입장은.
“우리는 야당 가운데 가장 확실하게 아베씨의 사고방식, 자세에 대립하는 생각과 주장을 하고 있다. 역사적인 사실은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과거의 전쟁에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한반도·중국 대륙·동남아에 일본이 군을 파견해 전쟁을 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에 의해 다른 나라 분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것은 사실인 만큼 솔직히 사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에서 이웃나라와 우호 협력 관계를 쌓아가는 것이 일본 정치에 요구되고 있다.”
-아베 내각 지지율은 50% 전후다. 반면 일본의 야당은 지리멸렬하다.
“아베 총리의 지지가 일본 미디어에서 높은 것처럼 나와 있는데 민주당 정권의 실패가 크다. 우리한테도 책임이 있다. 야당이 분산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자민당 압승 이후론 연립여당인) 자민당·공명당과 야당이 각각 하나의 후보를 내서 1대1로 하면 야당 쪽이 거의 이기고 있다. 아베씨의 오른쪽으로 기운 정치 방법에 대해 국민은 결코 찬성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언제 야당이 다시 집권할 수 있겠나.
“내년에 중의원 총선거가 일단 예상된다. 2년 후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2016년까지) 중의원 임기를 채우고 선거를 하면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가 된다. 공명당은 이에 반대다. 나는 아베 내각이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의 경기도 좋지 않다. 국제정세는 유럽도 좋지 않고, 중국 (경제)도 이상하다. 지금의 야당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여야) 1대1이라면 야당이 이기고 있다. 야당이 후보자를 한 명으로 압축해 협력하면 절대로 이긴다.”
-93년의 비자민 연립정권과 같은 것이 다시 한 번 가능하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그리고 (민주당이 압승해 정권을 잡은) 2009년처럼도 가능하다. 자민당도 2009년 300여 석이 있었는데 120석이 됐다. 지금의 상태는 거꾸로 자민당이 300석을 넘고 야당은 100여 석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사회당·공산당은 별도지만 그 밖의 정당이 후보자를 한 명으로 하면 꼭 이긴다. 이것이 소선거구제다. 내년에 한 번 더 정권을 바꿔 두 개 내지 세 개의 그룹이 서로 정권을 운영할 수 있는 틀을 만들고 싶은 것이 정치가로서의 꿈이다. 한 번 더 정권교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민당 시절 총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지.
“자민당에 남아 있었다면 가장 편했을 것이다. 정치가로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면 무엇을 위해 정치가가 됐는지 몰랐을 것이다. 자민당 시대부터 선거제도 개혁론자였다. 어쩔 수 없이 당을 떠났지만 그 이후론 정말로 고생의 연속이다(웃음).”
-일본의 경제 회복 전망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아베노믹스는 성공하고 있는가.
“지금 일본의 비정규직 고용이 40%다. 전체적인 국내총생산(GDP)은 고이즈미씨 이래 일시적으로 늘었지만 국민소득은 10% 이상 내려갔다. 일반의 개인소비가 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기 회복을 위해서는 개인소비를 늘려야 하지만 수입이 적어졌으니 늘지 않는다. 가을에는 소비세 인상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경기 회복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대 문제는 중국이다. 부동산 버블이 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되면 경제는 낙관할 수 없다.”
-한·일 양국은 내년에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지만 양국 정상이 집권 2년이 되도록 회담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의 양국 관계는 물론 상당히 좋지 않은, 이상한 상태다. 그러나 아베씨는 자신의 사고 방식, 행동을 고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겸허하게 그리고 성의를 갖고 역사문제든 무엇이든 대화를 한다고 하는 태도로 나오지 않으면 정상화가 어렵다. 아베씨가 바꾸지 않는 이상, 아베씨를 바꾸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것이 나의 정치적 결론이다. 양국은 정말로 길고 깊은 유대 관계다. 예전에 국민대에서 강연했을 때 일본과 한국이 협력해 중국의 민주화, 소프트랜딩을 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가지 상징적인 예로서 살아 있을 때 도쿄~서울, 가능하면 평양~선양~베이징을 고속철도로 연결해보고 싶다. 꿈같은 얘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나 싸웠던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버해협이 해저터널로 연결돼 유로스타가 달리고 있다. 왜 일·한이 못하겠는가. 서로 겸허하고 솔직하게 얘기를 나누면 장애를 넘을 수 있고, 정말로 가깝고도 밀접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국가개조론이 나오고 있다. 93년 『일본개조계획』을 출간한 바 있는데.
“그 근본이 되는 국민이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자립과 공생을 이념으로 내세웠다. 일본인의 자립이 전제조건이 돼서 정치적 틀로는 의회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행정·정부 틀로는 관료 지배의 중앙집권제를 그만두고 지방분권으로 하는 것이다. 중앙은 국가 차원의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 지방 일은 지방에 맡기고 돈도 권한도 모두 주고 해서…. 이런 통치 기구, 국가 개조를 정책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가장 친한 한국 정치인은.
“젊었을 때 정계에 나와 일본에서도 계속 어울렸던 사람들이 거의 은퇴했다. 한국에서도 그렇다. 3일 오래된 한국 정치인 친구 중 한 명인 김종필씨와 만났다. 아흔 살인데 손과 발이 조금 부자유스러웠을 뿐 건강했다.”
-두 분이 수담(手談)을 자주 나눴다고 하던데.
“꽤 자주 바둑을 두었다. 만날 때마다…. 김종필씨 집에서도 바둑을 몇 번이고 두었다. 그쪽이 더 강하다. 거기다가 엄청 빨리 둔다. (개인적으로) 조훈현 사범과 바둑을 둔 적이 있고, 한국기원에서 아마 6단을 받았다.”
글=오영환 논설위원
사진=최승식 기자
오자와 이치로는 … 1942년 도쿄생. 69년 아버지 지역구인 이와테현에서 중의원 의원 첫 당선 이래 15선. 정계 현역 가운데 최다선 의원. 정치 스승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85년 내각 자치상 겸 국가공안위원장을 거쳐 89년 최연소(47세) 자민당 간사장 취임. 93년 정치개혁 내걸고 자민당을 탈당해 신생당 대표로 호소카와 비자민 연립정권 탄생 주도. 신진당·자유당 대표 거쳐 민주당에 합류 후 대표와 간사장 역임. 현재는 생활당 대표. 주요 저서는 『일본개조계획』과 『오자와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