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숨겨진 역사찾기>엄격한 기율아래 공부와 군사훈련 병행했다
11. 네브라스카 커니시의 한인소년병학교(中)
미국인 가정에서 스쿨보이로 있으며 숙식해결 방학에는 새벽부터 밤까지 조련 받으며 농장일 박용만 선생, 링컨 시에 한인기숙사 운영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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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만 선생과 링컨시의 한인유학생들1910년 링컨시의 한인유학생들 오른쪽이 박용만 선생. 뒷줄 우측 3번째가 방사겸, 4번째가 박처후, 5번째가 김현구씨이다. | 1909년 6월 커니시(당시 Buffalo county)에 시작된 소년병학교 학생들의 군사훈련에 대해 박용만 선생이 직접 남긴 글은 없다. 그러나 다음 해 헤이스팅스 대학 구내로 옮긴 소년병학교 학생들의 생활상에 대한 글이 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커니시 소년병학교 학생들의 생활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다음은 신한민보(新韓民報: The New Korea) 1911년 5월 10일자(제 230호) 3면에 실려 있는 박용만 선생의 ‘소년병 학교 학생의 생활’이라는 기사이다.
“소년병 학교 학생은 고학(苦學)하며 공부하는 학생이라. 일찍이 모아둔 돈도 없고 남의 도움 없이 자기들이 삼년간 벌어먹고, 자기들이 공부하는 학생이니 대개 그 형편을 말하자면 아침 6시 기상 나팔 불면 일제히 일어나 5분후에 점검, 또 連하여 세수하고 아침 먹은 후, 각각 시간 일을 나가 일하되, 만일 시간제 일이 학생의 수대로 다 되지 못하면 그 남은 학생들은 학교농장에 들어가 일을 하여 누구든지 12시까지 일하고, 열두시 5분에 회식나팔을 불면 일제히 모여 대형을 지어가지고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으며, 점심 후 한 시간은 운동을 하거나 장난을 치거나 자기 마음대로 하고, 그 후에는 공부를 시작하여 두 시간을 허비하고 또 그 후에는 취군 나팔에 응하여 군복을 차리고 군기를 가지고 조련장에 들어가 각양 조련을 연습하며 6시에 다시 식당에 들어가며 그 후엔 공치기와 달음질하기와 씨름하기와 총기와 풍류치기와 나팔 불기와 여러 가지로 각각 소창하고 밤에 또 공부시키는 과정이 있어 각각 명한 시간대로 교과 실에 들어오며 만일 자기공부시간이 아니면 방에 앉아 공과를 복습하다가 저녁검사를 치루고 소등나팔불면 취침하더라…”
위에 적혀있는 소년병학교 학생들의 생활상은 헤이스팅스에서 운영되던 소년병학교 모습이다. 그러나 커니시에서 운영되던 소년병학교 학생들의 훈련과 생활상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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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니시 밀가루 공장사진:당시 버팔로(Buffalo county)의 밀가루제분공장(Flour Mills). Frank H. Roby가 매입해 1898년부터 운영해왔다. 소년병학교 학생들은 이 제분공장사장집 등에 스쿨보이로 들어가 집안 허드렛일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 커니시 농장에 소년병학교 부지를 마련했으나 문제는 학생들의 먹고 자는 문제였다. 그 때문에 박용만 선생은 커니시 유지들을 찾아가 한인학생들을 스쿨보이(school boy)로 데리고 있을 것을 부탁했다. 정한경과 정양필, 유일한, 이관수 등이 커니시 유지들의 집에 들어가 집안일이나 허드렛일을 하면서 숙식을 해결했다.
이때 한인학생들을 데리고 있던 커니시 유지 중 한 사람이 커니 밀가루 제분공장(Kearney Flour Mills) 사장인 로비(F. F. Roby)였다. 당시 한인학생들이 다녔던 커니군사학교(The Kearny Military Academy)학생 중의 한명은 나중에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기도 했다. 1945년 미군 한국군정책임자였던 어처 레크(Arthur Lerch)는 정한경과 고교(The Kearny Military Academy)동창이었다.
미국인 집에서 잡일을 하며 오전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커니시 농장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소년병학교 학생들은 버팔로 군이 개최한 연극에 참여, 극동 4개국 군대중의 하나로 출연하기도 했다. 당시 커니시 주민들은 소년병학교의 학생들과 군사훈련에 대해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다.
한편, 박용만 선생은 커니시에 머물면서 한편으로는 링컨시에 있는 네브라스카 주립대 인근에 2층 주택을 임대해 한인학생기숙사로 사용했다. 이곳에서 머물며 링컨에 있는 학생들은 공부를 했다. 선생은 조선에서 어린 학생들이 오면 커니시에서 링컨시로 나와 이곳에 잠시 머물던 한인학생들을 커니시로 데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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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학생기숙사가 있던 자리네브라스카주립 대학 근처에 있는 한인학생기숙사 옛 자리. 박용만 선생이 주택을 임대해 한인학생 기숙사를 운영했다. 학생들은 이곳에 머물면서 링컨시에 있는 학교를 다니든지, 아니면 선생을 따라 커니시의 소년병학교로 옮겨갔다. | 기자는 당시 한인학생기숙사가 있었던 P street 1721번지를 찾아 나섰다. 현재 이곳은 주택은 온 데 간 데 없고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선인들의 자취를 느낄수 있는 아무런 흔적이 없어 조금은 허망하다. 그러나 분명히 박용만 선생과 독립지사들의 숨결과 발자취가 가득한 곳이다. 한참 동안 그곳을 맴돌면서 선인들의 넋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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