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숨겨진 역사 찾기>12. 네브라스카 커니시의 한인소년병 학교(下)
조국의 등불이 된 소년병학교 1회 졸업생들
미국박사 2호 정한경,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등 구한말 군인출신과 군사고교 재학 한인, 교관 맡아 군사훈련 받으며 육상과 미식축구 등으로 체력단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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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한인소년병학교의 교관들 왼쪽부터 김려식, 이종희, 이종철, 박용만, 구연성 선생이다. 아쉽게도 1909년 커니시 소년병 학교의 교관들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김려식과 구연성은 당시 군사고등학교에서 입은 군복차림이나 박용만 선생 등은 개조한 군복을 입고 있어 눈길을 끈다. | 한인소년병학교는 1908년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회의 결정에 따라 설립된 해외최초의 무관양성학교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1908년 5월에 박용만 선생은 커니시에 머물면서 한인노동자들에게 철도공사장 일자리를 주선해주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커니시 인근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던 임동식을 만나 박처후, 정한경 등과 함께 군사학교를 운영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박용만 선생의 둔전병(屯田兵)제에 입각한 군사학교 설립안을 애국동지대표회의에서 정식안건으로 제출했다. 박처후는 네브라스카 커니시 대표로, 이종철은 링컨시 대표로, 김사형은 오마하 대표로 애국동지대표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소년병학교 설립을 놓고 의견이 갈렸지만 이들 셋의 강력한 주장과 박용만, 김장호의 끈질긴 설득으로 마침내 군사학교설립 안이 통과된다. 설립 안에는 ‘매년 방학에 커니시로 모여 운동체조 조련을 연습한다’로 표현돼 있지만 실제로는 군사훈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학생은 모두 13명이었다. 구한말 군인 출신인 김장호와 이종철이 교관을 맡았다. 김장호는 커니군사학교를 거쳐 블리스군사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었으며 이종철은 커니군사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1909년 문을 연 소년병학교의 첫 입학생 13명은 이 두 교관으로부터 사격과 각개전투 등 미국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정한경=1905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의 나이 15세 때였다. 그는 박용만 선생의 숙부 박희병의 제자였다. 박희병은 로스엔젤리스에서 잠시 머물고 있던 정한경에게 기차표를 보내 커니시로 오도록 했다. 1906년 4월 박용만 선생은 정한경을 커니시 유지 집에 스쿨보이로 들여보냈다. 정한경은 그해 6월 커니시 농장의 소년병학교에 입학했다. 정한경은 이후 세 번의 여름학기동안 소년병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1911년 졸업했다. 정한경은 9년 동안이나 스쿨보이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헨리정으로 불렸던 정한경은 커니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학생신문 편집위원이었으며 토론반원이기도 했다. 정한경은 1910년 버펄로 군의 학생웅변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기도 했다. 그는 네브라스카대학에서 정치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따고 1921년 아메리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에 이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두 번째 한인이다. 1919년 워싱턴에 상해임시정부의 외교임무를 맡은 구미위원회가 설치되자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4년 동안 봉사했다. 1944년 10월 상해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외무위원 겸 비서주임에 선임돼 외교업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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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 학교 육상부원들 소년병학교 한인학생들은 군사훈련 외에도 육상과 미식축구 등을 하면서 체력을 단련했다 | ◇유일한=10살 때 박희병의 손을 잡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박용만 선생과 함께 네브라스카 커니시와 덴버에서 함께 살았다. 선생이 덴버로 옮겨와 직업소개소를 운영할 때도 같이 있었다. 그러다가 13살 때 커니시로 다시 돌아와 소년병학교에 입학했다. 유일한 역시 스쿨보이 생활을 하면서 소년병학교를 다녔다. 커니공립학교에 다녔던 그는 만능 운동선수였고 공부도 잘했다. 1911년 그는 소년병학교 첫 졸업생이 됐다. 16살 최연소 졸업생이었다. 그는 1914년 헤이스팅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뒤 미시건 주립대학에 진학했다. 주립대학을 다니면서 유일한은 미국친구 윌리스미스와 함께 숙주나물을 유리병에 키워 건강식품으로 판매했다. 대학졸업 후 숙주나물을 통조림에 넣어 판매하는 라초이(La Choy)회사를 세우고 4년만에 50만달러의 매상을 올렸다. 그뒤 라초이를 그만두고 무역회사를 세운 뒤 서재필을 사장으로, 정한경을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1926년 유일한은 귀국해 서울 YMCA안에 미국식 약방을 차렸다. 3년후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을 설립했으나 일제의 견제가 심해지자 1938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1953년 다시 한국에 돌아온 그는 투명한 기업운영을 통해 유한양행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웠다. 그는 기업의 이윤을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유한실업학교, 유한공업학교, 유한전문대학을 설립해 인재를 키웠다. 죽기 전에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장학재단과 YMCA에 기증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끝까지 헌신했던 그의 삶은 박용만 선생의 가르침과 소년병학교에서 키웠던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진찬=1904년 40세의 나이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을 왔다. 아들 조오홍은 당시 7살이었다. 1906년 조진찬은 네브라스카 커니시로 와서 농장을 임대해 농사를 짓고 있었다. 1906년 커니시에 온 박용만 선생으로부터 소년병학교 설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두말없이 농장을 훈련장으로 내놓았다. 조진찬은 농사를 지으면서 오후에는 소년병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아들 조홍을 소년병학교에 입학시키고 같이 훈련했다. 당시 조진찬은 42세로 최고령학생이었다. 아들 조오홍은 9세로 최연소 학생이었다. 조진찬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을 받았다. 그는 훈련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 비록 나이가 많으나 왜놈을 향해 총을 쏘기는 늙은이의 총알도 젊은이의 총알만큼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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