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우선 그 동음이의어의 작명부터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중경제론은 한국의 특수한 현실에서 그 족적을 뚜렷이 남긴, 그리고 나름의 일관된 체계를 갖춘 아주 특이한 이론과 정책이었다...(중략) 그런데 이 대중경제론이 실제로는 故박현채 선생(1934~95)이 주도해서 만든 작품이었다. 그의 민족경제론의 정치적 버전이 바로 대중경제론이었던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중경제론은 박현채의 기획이었으며, 박현채를 중심으로 당시의 수많은 진보학자들이 참여해서 창안한, 현실성 있는 대안경제 이론이었다.”
(출처: , 박승옥 前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프레시안>, 2005년 7월12일자 보도)
'위대한 戰士(전사)' 조원제의 정체
박현채(朴玄埰, 1934~1995)는 전남 화순군 출생으로 광주 수창국민학교 재학 때부터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뒤, 독서회 활동과 동맹휴학 주도로 두각을 나타났던 인물이다.
광주서중학교 재학 때 남로당의 비밀외곽조직인 민애청(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의 세포 조직으로 활동했다. 6.25동란 기간 북한군이 패퇴한 1950년 10월 16세의 나이로 입산, 1952년 8월까지 약 2년간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처음에는 전남 무등산과 백아산에서 연락병 노릇을 하다가 20세 미만의 소년들로 편성된 소년돌격부대의 문화부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훗날 그는 조정래의 장편소설《태백산맥》 제9권 첫 머리에 나오는 ‘위대한 전사 조원제’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빨치산 활동 중 복부관통상을 입은 박현채는 하산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다음 풀려나 전주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 졸업 후 195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1961년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 한국농업문제연구회 간사 일을 보면서 자본주의와 세계경제, 한국경제 연구에 몰두했다. 1963년에는 모교 강사가 됐으나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그만두게 된다. 1971년《김대중씨의 대중경제론 100문 100답》을 집필했으며, 1978년에는 박정희 정부의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을 비판한《민족경제론》을 출간했다. 1979년에는 ‘임동규간첩사건’(통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구속됐다.
이후 박현채는 1980년 민주화를 주장하는 ‘13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하고 1989년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가 되어《민족경제론의 기초이론》을 출간해 명성을 날렸다. 1950년대 말부터 박현채와 인연을 맺은 김낙중(간첩사건 연루자, 前민중당 공동대표)은 자신이 1961년 10월 군에 입대하게 되자 박현채를 포함한 동지 6-7명이 그를 환송한다는 구실로 자신의 은신처에 모였다.
이들은 여기서 비밀조직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김낙중에 따르면 越南(월남)전쟁이 한창일 때 박현채는 (북한군이) 전선을 밀고 내려오는 정규전 방식에 의한 해방투쟁이 미국의 간섭으로 한계에 부닥친 상황에서는 越南에서와 같은 유격투쟁에 의한 통일투쟁이 불가피하므로 미국을 상대로 하는 민족해방투쟁의 제2전선을 한반도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8년 김신조 등 북한 무장공작원들의 1.21청와대습격미수사건이 발생하고, 울진, 삼척 등지에도 무장공작원들이 나타나자 이에 고무된 박현채는 1969년 분명히 통일을 위한 북한의 새로운 전략이 나타날 것이라고 보았다.
같은 해 여름 김낙중과 박현채는 둘이서 술 한 잔씩을 하면서 내기를 걸었다고 한다. 그 해 안에 북한 공작원의 유격투쟁이 확대되면 김낙중이 술을 사고, 유격투쟁이 확대되지 않으면 박현채가 술을 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격투쟁은 ‘확대’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박현채는 1970년과 1971년 까지도 유격전 확대에 대한 기대를 포기 하지 않고,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인 박중기(당시 한국여론조사 취재부장, 現4.9평화통일재단 이사)의 증언에 따르면 박현채는 유신 이후에는 해방투쟁에 대해 신중론을 폈다.
2차 인혁당사건으로 사형당한 8인 중 하나인 이수병은 조직을 갖추어 당장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박현채의 경우 객관적 조건과 변혁 주체의 능력을 냉철하게 평가하지 않고 조직부터 만드는 것은 오히려 큰 화를 몰고 올 수 있다고 반대했다고 한다.
박현채는 자신의 민족경제이론과 더불어 국내 좌파세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2006년에는 모두 7권에 달하는《박현재 전집》이 출간되고, 2007년 9월에는 좌파경제학자들이 그를 기리는 학술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 박현채와 함께 지하 운동을 벌인 임동규(남민전 사건 연루자)는 박현채가 당시 학생, 노동, 농민, 여성 등 각 분야의 운동책임자들에게 투쟁방향을 지도함으로써 남한 변혁운동의 보이지 않는 사령탑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참고로 좌파성향 저술가인 김기선은 박현채가 생전에 “기회가 닿는 대로 도예종, 최백근, 우동업(우홍선)등 당대의 변혁운동가들을 만나 운동의 전망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고 했다.
이들 가운데 도예종의 경우 1948년 남로당에서 활동하다 1960년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경북 간사장을 지냈으며, 1964년 7월 북한간첩 김배영, 김규칠 등과 함께 인민혁명당을 조직, 지하활동을 하다가 被檢(피검) 腹刑(복형)한 인물이다.
도예종은 인혁당 사건 이후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다시금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됐다. 도예종은 인혁당 재건위 이외에도 서도원, 하재완 등과 함께 민청학련 사건에도 관여했었다.
도예종이란 이름은 박정희 대통령 집권 말기에 발생한 최대 공안 사건인 남민전 사건에도 등장한다. 남민전 사건 연루자들은 남한에서 공산혁명이 이뤄지면 북한군에 지원 요청을 모의했다. 이들은 혁명이 성공하면 중앙청에 게양할 붉은 별이 그려진 대형 전선기(戰線旗)를 준비했다.
전선기의 상부는 적색(赤色)으로 해방된 지역인 북한을, 하부는 청색으로 未(미)해방지역인 남한을 상징하며, 중앙의 붉은 별은 사회주의 혁명의 희망을 의미했다. 문제의 깃발은 사형당한 도예종 등 소위 ‘8열사’가 입었던 내의를 염색한 천으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