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서울대 교수·사회학
민족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발명되었다. 제국의 틈에서 국가존립이 위태로웠을 때 지식인들은 역사적, 문화적 혈연공동체로서 민족의 불멸성에 주목했다. 열강의 침략에 대한 조선의 대응이었다. 일본은 일왕을 정점으로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일왕민족주의를 발명했고, 패망 직전의 중국은 중화민족에 처음 눈을 떴다. 신채호 선생이 『동사강목』을 품에 안고 민족의 흔적을 찾아 만주 일대를 헤맸다. 연해주와 요동 지역에 펼쳐진 민족의 숨결은 그를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식민과 패전의 상처를 안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한·중·일 삼국이 귀의할 곳은 역시 민족주의였다. 삼국의 민족주의가 심하게 충돌하지 않은 것은 미국이 주도한 냉전 덕분이었고, 전범국 일본이 숨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냉전 시대가 개막되자 숨은 발톱을 스멀스멀 내밀기 시작했다. 아베 정권의 발언과 행보에는 공격적, 적대적 성향이 가득한 반면 피해국 중국과 한국의 민족주의는 방어적 성향이 짙다. 중국의 대국굴기(大國<5D1B>起)에 일본이 사주경계에 들어갈 만은 하지만, 세계에서 민족 전선에 화염이 이는 가장 위험한 지역이 동북아라는 유별난 우리 현실을 환기하고 싶다. 세계화 시대를 ‘민족주의’로 일관하는 두 강대국 틈에 여전히 낀 채로 우리 역시 ‘민족주의’를 최선의 방어막으로 둘러치고 있는 사실 말이다.
기차가 단둥역에 멈췄다. 더 갈 수는 없었다. 강 건너 저편에 신의주 시가지가 보였다. 흐릿했다. 압록강은 여전히 흘렀다. 작가이자 동물학자인 이미륵이 저 강을 건너 독일 유학길에 오른 뒤 다시 건너지 못한 강물이었다. 그가 죽고 몇 년 뒤에 태어난 필자도 그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아니,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필자는 그 ‘민족주의’의 이름으로는 영원히 강을 건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개의 이질적 민족주의가 팽팽하게 맞서는 한 말이다.
분단 70년, 한국과 북한은 일종의 울트라내셔널리즘 각축전을 벌였다. 전쟁도 불사했으니 그 적대감과 원한의 골은 얼마나 깊어졌는가. 북한은 ‘민족’의 이름으로 남파공작을 했고, 연평도 포격, 미사일 발사, 원폭 실험까지 감행했다. 한국은 ‘민족’의 이름으로 국부와 국력을 일궜다. 70년 동안 ‘민족’의 경험지층은 서로를 적대시하는 유용한 무기로 단단히 굳어졌다. 민족개념을 버리자는 게 아니다. 다만 이질적, 적대적 ‘민족개념’을 포용할 한 차원 높은 인식을 발명해야 통일의 문이 열린다. 120년 전 ‘민족’을 발명했듯 말이다. 그것이 ‘세계시민’이다. ‘민족’시대에서 ‘세계시민’으로 기대지평을 넓혀야 저 강을 건넌다.
그것은 일본과 중국 간 치열한 민족주의 전쟁을 해소할 한국의 역할이기도 하다. 폐쇄적 민족의식에 사로잡힌 일본에 열린 자세를 기대하기 어렵고, 중화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중국 역시 화통한 세계 인식을 갖추려면 시간이 걸린다. 민족주의의 화염이 거세지는 동북아에 평화와 공존을 솔선할 나라는 전쟁과 분단의 극단적 역사를 체화한 한국이라는 깨달음은 결코 부질없는 상념도 독백도 아니다. 광복 70주년, 북한에 대한 한국의 우월성이 세계적으로 입증된 지금 ‘새로운 광복’을 위한 고정관념의 탈각, 그게 필요한 때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