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서 한인자치제 꿈 이루고 군사학교도 설립
18. 박용만 선생과 하와이 대조선 국민군단(上)
주정부에 특별경찰권 요청, 허락받아 자체 치안 실시 국민의무금제 도입 재정확충 뒤 대조선국민군단 세워 한인들에게 조선독립 위한 실천 방안 제시 단결 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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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위의 박용만선생박용만 선생은 1913년 하와이로 건너가 다음해 6월 오아후섬 카훌루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 국민군단사관학교를 창설했다.선생은 둔전병제에 입각해 대조선국민군단을 운용했으며 한인들은 농장일을 하면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애라씨 제공 |
지난 3개월 동안 연재된 ‘한인미국초기이민자들의 항일독립운동과 나라사랑’ 시리즈는 지역順으로 해서 작성됐다. 한인(조선인)들의 하와이 초기이민의 배경과 한인 노동자들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대략적인 삶을 소개한 뒤 기사의 초점을 미국 본토로 건너간 한인들의 삶에 맞췄다. 그래서 지난 17회 분의 기사는 대부분 L.A를 비롯 유타, 와이오밍, 콜로라도, 네브라스카 주 한인노동자들의 삶을 조명하는 내용이었다.
이미 게재된 내용들은 시기적으로는, 한인들의 미국이민이 공식적으로 실시된 1902년 이후부터 1912년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당시 초기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던 이들은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선생 등이다. 기자는 이번 기획취재를 통해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어떻게 나라사랑을 펼쳤는지를 꼼꼼히 챙겨보고 싶었다. 그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이가 그들의 중심이 돼 한인사회를 이끌었는지도 들여다보고 싶었다.
취재를 하는 동안 한인사회를 이끌었던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 박용만 선생이 떠올랐다. 박용만선생의 활동범위는 콜로라도 덴버와 네브라스카, 캘리포니아, 그리고 하와이였다. 미 서부지역을 무대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안창호 선생은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이승만 박사는 워싱턴을 무대로 해 초기 한인사회를 이끌었지만 그 행동반경과 한인들의 결집, 그리고 한인사회에 대한 영향력에 있어서는 박용만 선생에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기자는 박용만 선생을 중심으로 한 초기 한인이민자들의 삶을 정리해 그동안 시리즈로 소개했다. 박용만선생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군사력을 배양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민들이 평소에는 생업(농사일)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나가는 ‘둔전병’(屯田兵)제 신봉자였다. 선생은 네브라스카 커니시와 헤이스팅스, 하와이에 군사학교를 설립해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네브라스카 커니시와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 졸업생들은 한인사회의 지도자가 돼 한인들의 발전과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소년병학교 일부 교관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항일무장투쟁의 기초를 닦았다. 소년병학교는 미 서부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가 됐다. 박용만 선생은 네브라스카 주립대 ROTC 과정을 밟으며 습득한 군사지식을 이용해 한인들을 훈련시켰다.
와이오밍 주 슈피리어 탄광에 일하던 일부 광부들은 한 달 정도 일을 쉰 다음, 커니시나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에 와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런 뒤 자신이 일하던 슈피리어 탄광으로 돌아가 한인광부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네브라스카 소년병 학교 한인들처럼 군복을 입거나 실제 총을 들고서 받는 군사훈련은 아니었다. 비록 목총이지만 한인광부들은 소년병학교 출신 한인의 지도 아래 진지하게 훈련을 받았다.
슈피리어 탄광의 한인광부들의 경우 겨울철이면 영하 20도가 내려가는 추위 속에서도 군사훈련을 받았다. 10시간 넘게 고된 일을 했지만 그들은 일이 끝나면 쉬지 않고 곧바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어떻게든 힘을 길러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각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 땅에 살고 있는 한인광부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 조국독립의 역량으로 키워간 것은 소년병 학교의 교관과 학생이었다. 그 중심에 박용만 선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1912년 12월 하와이에 도착한 박용만 선생은 먼저 하와이 한인사회의 자치제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1913년 1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자치규정을 새롭게 만들고 한인들이 이를 지키도록 했다. 그 다음 하와이 주정부에 하와이 한인지방총회를 자치기관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와이 정부는 특별경찰권까지 허락했다. 경찰권 행사는 한인들에 대한 일제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는 것으로 매우 의미가 컸다.
박용만 선생은 하와이 각 섬에 경찰부장을 두고 한인사회의 치안을 맡도록 했다. 크고 작은 다툼이 생겼을 경우 하와이법정은 국민회의 경찰조사와 초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선생은 또한 국민의무금 제도를 도입, 한인 1인당 연간 5달러의 회비를 내도록 했다. 이 제도로 하와이지방총회의 재정이 넉넉하게 됐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해서 선생은 마침내 1914년 하와이에서 한인농부들을 독립무장투쟁의 용사로 키워낼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게 된다. /kjhyuch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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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조선국민군단원들이 사열식을 갖고 있다.중앙에 대형 태극기가 보인다.사열식에는 하와이 주 정부는 이례적으로 한인들의 군사훈련을 묵인했다. /로스엔젤리스 민병용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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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조선국민군단이 창립기념식에서 군사퍼레이드를 갖고 있다.1915년 촬영한 사진이다.단원들은 군사력을 키워야 조선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애라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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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위의 박용만선생박용만 선생은 1913년 하와이로 건너가 다음해 6월 오아후섬 카훌루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 국민군단사관학교를 창설했다.선생은 둔전병제에 입각해 대조선국민군단을 운용했으며 한인들은 농장일을 하면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애라씨 제공 | <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