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한반도에서 가장 풍요를 누리던 가야 지역

화이트보스 2014. 12. 1. 13:13

한반도에서 가장 풍요를 누리던 가야 지역

'철(鐵)의 나라' 금관가야(金海)(2)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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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기사에서 이어짐)
▣ 東義大 박물관장 林孝澤 교수  
  
 
가야인의 이마는 돌로 눌러 납작했다
 
  필자는 金海 답사 하루 전날인 1월24일 아침 서울을 떠나 부산 伽倻洞(가야동)에 위치한 東義大(동의대) 박물관장실로 직행했다. 여기서 오후 4시부터 3시간30분 동안 김해 良東里 고분군의 발굴(1990~1996년)을 지휘한 박물관장 林孝澤(임효택) 교수를 만나 伽倻 유물 전반에 걸친 강의를 들었다.
 
  林교수는 釜山大 조교 시절인 1976년 김해 大東面 예안리 고분의 발굴조사에 참여한 이래 加耶史(가야사)의 숱한 수수께끼를 하나하나씩 풀어 온 고고학자이다.
 
  『예안리 고분군에서 여러 형태의 무덤 250여 基가 확인되었고, 토기류·철기류·장신구류 등 많은 유물이 나왔습니다. 가장 큰 성과는 100여 구에 달하는 人骨(인골)의 발견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희귀한 사례입니다. 석회질 성분이 계속 공급되는 地質(지질) 속에 묻힌 탓에 썩지 않았던 거예요』
 
  ―발굴된 인골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10여 년간 정리해 현재 부산大 박물관에 보존하고 있습니다. 인골 하나하나를 수거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리더군요. 일본 聖마리안느 醫大의 인골전문가 오카다(小片) 교수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안리에서 발굴된 인골은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당시 사람들의 형질학적 특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三國志」의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것처럼 扁頭(편두)가 뚜렷한 인골 10구도 출토되었어요. 위지 동이전의 정확성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예안리 유적의 인골은 남성의 평균 신장이 164.7cm, 여성이 150.8cm였다. 편두의 인골은 10례(남성 3례, 여성 7례)가 확인되었다. 위지 동이전 弁辰條(변진조)에는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안리 고분 발굴을 통해 확인한 편두의 부위는 앞 이마와 이마의 양 옆 부분이다.
 
  『예안리 유적의 발굴은 가야고분에 대한 학술적 발굴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후 부산의 福泉洞(복천동) 고분군, 합천의 玉田(옥전) 고분군, 고령의 芝山洞(지산동) 고분군 등이 잇달아 발굴조사되었거든요』
 
 
 
 
金官伽倻 초기의 중심은 지금의 酒村面
 
  ―양동리 고분군을 발굴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훼손된 遺構(유구)로 인해 가곡마을 뒷산 일대에 토기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발굴 前에 이미 가야유적지임이 알려져 있었어요. 이 유적지의 서쪽 끝 부분 일부가 당시 김해군에 의해 도정공장 부지로 계획됨에 따라 救濟(구제) 발굴이 불가피했던 겁니다』
 
  계획 당초에는 조사대상 지점이 변두리이고, 또한 비교적 경사가 심한 곳이기 때문에 지하에 유구가 있다고 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엄청나게 많은 유구가 밀집·중복된 상태로 남아 있었고, 개개 유구에서도 중요한 자료들이 속속 출토되었다. 처음 3개월로 계획되었던 발굴기간이 6년간(4차)으로 연장되었다.
 
  『양동리 고분은 전체의 배치상이 마치 가야고분의 전시장을 펼쳐 놓은 듯하며, 시기별 墓制(묘제)와 유물의 변화·발전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유적의 연대는 上限(상한)이 기원전 2세기 말, 下限은 5세기로 추정되며, 특히 BC. 1세기로부터 5세기까지는 공백 없이 지속적으로 조성된 양상을 보이고 있어요. 이는 가락국 초기의 중심지가 봉황동·대성동이 아니라 주촌면 일대였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유물의 질적 수준에서도 적어도 3세기 말까지는 양동리 고분군 쪽이 대성리 고분군 쪽보다 높습니다』
 
  이곳에서는 모두 6종류나 되는 다양한 묘제가 확인되었다. 가야의 묘제는 시기별로 크게 구분해 보면 목관묘(2세기 전반까지)·목곽묘(2세기 후반부터 4세기 후반까지)·석곽묘(4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의 단계로 변화·발전되어 왔다.
 
  ―가야의 출발 시기를 언제로 보십니까.
 
  『목관묘를 통해 살펴보면 早期 가야의 개시시점은 기원전 1세기였습니다. 제55호 목관묘에서는 銅劍(동검)·銅鏡(동경)·曲玉(곡옥) 등 일본 천황가의 3寶(보)가 완전한 세트로 출토되어 이 묘의 주인공이 정치적 실력을 가진 「天君」(천군: 祭政一致 시대의 지도자인 샤먼)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묘의 조성 시기는 前期 가야의 구야국에서 가락국으로 변하는 2세기 초엽으로 추정됩니다』
 
  양동리 고분군 중 548基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청동기·철기·장신구 등 모두 5192점에 이른다. 토기에 있어서는 가야토기의 변화·발전상, 특히 瓦質(와질)토기에서 硬質(경질)토기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 확인되었다.
 
  『신라토기·백제토기·가야토기 중에서 가야토기가 가장 멋있습니다. 경제적 여유에 의한 멋입니다. 당시 가야는 경제적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앞서가던 지역이었어요』
 
양동리·대성동 고분 등에서 무더기로 출토되는 철정(왼쪽 사진). 삼국시대의 철정은 오늘날의 금괴와 같이 규격화된 쇳덩이. 정련과정을 거친 시우쇠(熱鐵)로서 불에 달궈 두드리면 얼마든지 원하는 형태의 도구를 만들 수 있는 中間材이다. 철정은 금관가야의 主力 수출품인 동시에 국제적 통용 화폐였다. 철정은 10매 단위로 끈으로 묶여 무덤에 부장되었다(오른쪽 사진).
 
 
 무덤에 넣은 철정은 地神에게 지불한 땅값
 
  양동리 고분과 대성동 고분에서는 많은 양의 鐵鋌(철정)이 바닥에 질서정연하게 깔린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우리 학계에서는 철정을 우리말로 「덩이쇠」라고 풀이하고 있다. 「덩이쇠」라면 대번에 주먹 모양이 연상된다.
 
  실제의 모습은 중앙은행에서 지불준비금으로 보유하는 金塊(금괴)와 비슷하다. 다만 허리 부분이 조금 잘록할 뿐이다. 필자는 「철정」 또는 「덩이쇠」보다 「鐵塊(철괴)」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고 느꼈다.
 
  『가야시대의 철정은 오늘날의 금괴와 같이 규격화된 쇳덩이입니다. 삼한 시기의 납작도끼(板狀鐵斧)에서 기원되었죠. 4~5세기에는 도끼와 매우 다른 형태의 덩이쇠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덩이쇠는 精鍊(정련)의 과정을 거친 시우쇠(熱鐵)인데, 불에 달궈 두드리면 얼마든지 원하는 형태의 도구로 만들 수 있어요』
 
  가야의 무덤에서는 이런 철정이 10매 단위로 끈에 묶여 차곡차곡 쌓인 채로 부장되어 있다. 왜 하필 무덤에 철정을 묻었을까.
 
  『地神(지신)에게 무덤의 땅을 사면서 철정을 값으로 치른 것입니다. 公州에 있는 백제의 武寧王陵(무녕왕릉)에서도 地神에게 대가를 치르고 땅의 권리를 취득했다는 買地權(매지권)이 발굴되지 않았습니까. 가야의 철정은 산업의 중간재와 수출품인 동시에 당시의 국제화폐였습니다』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여러 종류의 철제 무기, 농·공구류, 馬具(마구) 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갑옷과 투구, 독특한 모양의 말 재갈 등 고도의 전문적 기술로 제작된 철제품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이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 가야사회의 역동성과 선진성을 보여 주는 바로미터인 동시에 酒村面 일대가 초기 가야의 중심지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고대에 있어 제철은 오늘의 반도체처럼 최고의 첨단산업이었습니다. 「해양왕국 가야」, 「쇠의 왕국」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철기유물 하나만을 지적한다면 그것은 철정입니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주변의 풍부한 鐵鑛床(철광상)을 이용하여 제철업을 발전시켰다. 기원전 2세기 무렵에 이미 철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기원후 3세기 이후에는 樂浪(낙랑)과 帶方(대방), 馬韓과 東濊(동예), 그리고 왜국에 수출했다.
 
  『금관가야는 「日本書紀(일본서기)」에 「須那羅(수나라)」 또는 「素奈羅(소나라)」라고 표기했는데, 이것은 「쇠의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三國史記」에 「金官國」이라고 기록된 것도 「쇠를 관장하는 나라」라는 의미예요. 금관가야는 농업국이 아니라 古代의 일류 공업국이며 東아시아 최초의 해양국이었습니다. 지금 김해평야의 구릉이나 산은 가야시대엔 섬이었고, 지금의 평지는 바다였습니다. 농토가 그렇게 넓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이름 「金海」도 「쇠의 바다」라는 뜻 아닙니까』
 
  ―가락국이 「철의 나라」로 부상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기원전 108년, 漢武帝(한무제)가 2년에 걸친 침략전쟁 끝에 위만조선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때 위만조선의 유민들이 대거 김해로 내려왔고, 그중에는 제철기술자들도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위만조선이 어떤 나라입니까. 적어도 당시 세계 최강 漢武帝의 군대에 맞서 장기간 방어전을 전개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상당한 제철기술을 보유했을 겁니다. 그런 집단인 만큼 김해·부산·양산 등 낙동강 하류 유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철광산을 그냥 둘 리 있겠습니까. 양동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류를 샘플링해 포항제철 산하 산업과학기술연구소에 성분분석을 의뢰했는데, 바로 양산의 勿禁(물금) 광산에서 채굴된 철광석이라는 해답이 나왔습니다』
 
  ―전성기 가야인은 어떤 모습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4~5세기의 가야인들은 잘 먹고 잘 살았고, 문화적으로도 한반도에서 가장 세련된 사람이었을 겁니다. 철정의 무역으로 거금을 벌어 당시 東아시아 세계의 선진지역인 중국에서 최신 패션과 기호품을 바로바로 들여왔겠죠. 당연히 사치풍조도 만연했을 거예요』
 
  가락국의 최전성기는 3세기부터 4세기까지 100여 년간이었다. 북방의 강력한 군사체제를 도입했고, 철을 매개로 광범위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富國(부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4세기 중엽 이후 격동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야인의 제철 장비. 고대에 있어 제철은 최고의 첨단산업이었다. ① 鍛冶도구(부산 동래구 복천동 71호 고분에서 출토) ② 송풍관(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출토) ③ 철 찌꺼기(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출토).
 
 
 廣開土王의 南征으로 金官伽倻 약화
 
김해 神魚山 銀河寺의 쌍어. 불상을 받치는 수미단 정면에 새겨져 있다.
  4세기 말의 영남지역에서는 경주의 신라와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兩大 정치적 연합체가 결성되어, 두 진영이 서로 경쟁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한반도 중부지역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치열한 영토확장 전쟁에 돌입했다.
 
  이러한 국가 간의 경쟁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국가 간의 결연과 외교전을 유발했고, 결국 대항세력인 신라의 구원 요청에 의해 서기 400년 고구려의 廣開土王(광개토왕)이 5만 대군을 남하시켜 가야의 세력을 꺾어 버렸다. 고구려의 남침에 의해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는 더 이상의 발전을 못 하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경자년(서기 400년) 南征(남정)은 한반도 남부에 정치·군사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던졌습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 勢를 업고 낙동강 유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합니다. 그 결과 낙동강 東岸에 위치한 釜山지역의 新羅化(신라화)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부산지역은 4세기까지 김해지역과 동일한 금관가야 문화권이었다. 5세기 이후 금관가야는 國運 위축의 시대로 접어든다.
 
사적 제73호 수로왕릉.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서 춘추로 제향을 올리는데, 특히 봄 제례 때는 참여하는 종친이 2만~3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잘 보여 주는 것이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입니다. 복천동 고분들 가운데 4세기 무덤까지는 伽倻系(가야계) 유물이 출토되지만, 5세기 이후 무덤에는 차츰 新羅系(신라계) 유물로 바뀝니다, 고리가 달린 큰 칼(三累環頭大刀·삼루환두대도)과 金銅冠(금동관) 등 威勢品(위세품)에 이르기까지 신라系 유물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김해에서도 5세기 이후의 王墓級(왕묘급) 또는 지배자층의 무덤이 더 이상 축조되지 않습니다. 그 배경이 무엇입니까.
 
  『광개토왕 發 파문이 東아시아 세계에 일파만파로 번져 나간 것입니다. 우선, 신라를 압도하던 금관가야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이어 금관가야를 문화적 젖줄로 삼아 오던 일본이 백제에 의지하는 등 지각변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야 세력이 대거 일본으로 몰려가 지배세력화했던 것입니다. 금관가야의 세력은 일본 열도로만 이동한 것이 아닙니다. 낙동강 물길을 이용해 합천·고령·함안 등지로 이동함으로써 대가야(고령-합천)·아라가야(함안)가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금관가야는 더 이상 발전을 못 한 채 명맥만을 유지해 오다 532년 仇亥王(구해왕)이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왜 금관가야는 再起(재기)에 실패했던 것일까.
 
  『금관가야는 철로 인해 융성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철로 인해 쇠망의 길로 접어듭니다. 철의 국제가격이 급락했기 때문입니다. 5세기에 들면 일본 열도에서도 제철기술을 배워 자국의 풍부한 철광산에서 원료를 채취해 자체적으로 철 생산에 들어감으로써 더 이상 금관가야의 철정을 수입해 가지 않았습니다. 가야 철정을 수입해 가던 낙랑과 대방도 4세기 초엽에 고구려·백제에 의해 멸망당해 금관가야로서는 북쪽 시장도 이미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1914년의 김해읍. 오른쪽 구릉은 구지봉, 대성동 고분군 뒤에 보이는 산은 臨虎山, 그 앞쪽은 봉황대 유적지. 「임나일본부 유적 찾기」는 패망 전 일본학계의 지상과제였다. 일본의 대표적 학자들이 그룹별로 김해 일대를 뒤졌지만, 「임나일본부」와 관련한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

가야의 배 모양 토기(호림미술관 소장). 금관가야는 古代 그리스의 아테네, 르네상스期의 제노아와 같은 해양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