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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노점상 “세상은 따뜻하네요”

화이트보스 2015. 1. 9. 17:08

문맹 노점상 “세상은 따뜻하네요”

조동주기자

입력 2015-01-09 03:00:00 수정 2015-01-09 03:00:00

눈앞이 캄캄했다. 손에 든 하얀 종이에 검은 글씨가 쓰여 있는 건 알겠는데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고요가 길어지자 모두들 이상한 시선을 보내는 듯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차에 옆에 있던 법원 서기가 종이에 적힌 글을 대신 읽어줘 따라 읊었다.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상해 피해자 윤모 씨(59·여)는 지난해 7월 23일 대구지법 경주지원 1호 법정에서 서기의 도움으로 간신히 증인선서를 했다.

윤 씨는 한글을 전혀 읽지 못하는 ‘문맹(文盲)’이다. 경북 경주시의 한 시장 바닥에 해물과 채소를 펼쳐놓고 팔며 겨우 생계를 유지해 왔지만 2013년 5월부터는 그마저도 못하게 됐다. 윤 씨가 경주의 지인 집에서 임모 씨(68·여)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다 폭행을 당해 왼쪽 넷째손가락을 크게 다친 것이다. 완치에 6주나 걸리는 데다 병원에서 “형사사건 연루자는 건강보험 처리를 해줄 수 없다”고 해 수술비와 입원비가 250만 원이나 들었다. 윤 씨는 별다른 수입이 없어 이자가 높은 ‘카드론’으로 250만 원을 대출받아 병원비를 냈다.

윤 씨에게 상해를 입힌 임 씨는 지난해 3월 28일 법원의 약식명령으로 벌금 150만 원을 선고받았지만 이에 불복해 곧바로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윤 씨는 아무 잘못 없이 손가락을 다쳐 대출 이자조차 제대로 갚기 힘든 처지가 된 것도 서러운데 법정에서 증인선서문조차 제대로 읽지 못해 눈총을 받는 현실이 참담했다. 결국 사건담당 검사에게 “세상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문맹인 것도 서러운데 빚까지 져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며 눈물을 쏟았다.

윤 씨의 딱한 사연을 접한 대구지검 경주지청 김용준 피해자지원 법무담당관(30)은 우선 윤 씨가 낸 병원비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도록 도와 200만 원을 돌려받게 해줬다. 형사사건 피해자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도 일부 병원에서 ‘고의나 중대한 과실로 인한 범죄에 원인이 있으면 건강보험을 적용할 수 없다’는 법조항을 오해해 보험 처리를 해주지 않는 사례가 많다.

경주지청은 경주범죄피해자지원센터와 연계해 윤 씨의 나머지 병원비 50여만 원을 대신 내주고 긴급생계비 80만 원을 지원했다. 윤 씨가 문맹인지라 서류를 꾸미는 모든 작업은 김 법무관과 피해자지원센터 측이 도왔다. 이후 윤 씨가 “아직 세상이 따뜻하다”며 자신이 파는 전복을 잔뜩 싸와 건네자 김 법무관과 피해자지원센터 측은 연신 거절하다가 결국 전복을 받고 윤 씨에게 전복 값 10만 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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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범죄 때문에 다친 피해자에게 각종 구조지원을 해주고 있지만 ‘사정(司正)기관’의 인상이 강한 탓인지 이 제도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검찰은 지난 한 해 범죄피해자 320여 명에게 구조금 70억여 원을 지원했다. 전치 5주 이상의 피해자가 지원 가능 대상이지만 사정에 따라 그 이하의 부상도 지원할 수 있다. 박지영 대검찰청 피해자인권과장은 “범죄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강화해야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기자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