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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의 철판과 정주영의 배가 만나는 순간2015.01.19 (월)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4)] 박태준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죽어야 합니다"2015.01.16 (금)
- 1970년과 1970년대의 개막을 한꺼번에 알리는 붉은 햇덩이가 영일만 수평선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쇳물, 바로 그 빛깔이었다. 한국 산업화 역사에서 1970년 새해에 기록할 쾌거는 마침내 종합제철 건설의 막을 올..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3)] 박태준에게 "뭐든 배워오면 국가를 위해 쓰일 날이 온다"고 했던 박정희2015.01.12 (월)
- 아카자와 쇼이치가 인솔한 일본조사단이 포항을 다녀간 1969년 9월 중순, 박태준은 포스코 내에 ‘건설기획조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조직은 설계 및 공정 기획, 시공업체와 계약업무 조정, 예산 통제, 설비구매 기획..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1)] 박태준의 발품에 감동한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2015.01.02 (금)
- 박태준은 도리없이 또다시 김포공항으로 달려갔다. 오직 ‘일응’이라는 두 글자의 일본어(한자)를 빼기 위하여. 그러나 그것이 ‘마라톤 같은 장정’이 될 것이라는 예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태준은 도쿄에 닿기 바..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0)] 기술협약서 한장 위해 일본 철강업계에 3번이나 머리를 조아린 박태준2014.12.31 (수)
- 8월 22일 일본철강연맹은 이나야마 회장의 주선으로 ‘한국제철소건설협력위원회’를 구성했다. 일본 철강회사들과 종합상사들로 구성한 이 위원회는 설계‧건설의 기술지원과 기자재 선정의 협력을 위한 조직이었다. 이날 일본정..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9)] 종합제철소 자금조달의 마지막 난관을 넘다2014.12.29 (월)
- 1969년 8월 15일, 아이치 외무상이 한국 광복절을 축하하듯 기자회견을 통해 외무성 대장성 통산성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합동회의를 한 결과 대일청구권자금 전용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가 이루어졌고 22일 일..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8)] 박태준 "일본을 이기려면..."2014.12.26 (금)
- 8월의 도쿄는 서울보다 뜨거웠다. 박태준은 맨 먼저 야스오카를 찾아간다. 포철에 대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언약도 해주고 서신도 보내준 이나야마를 또다시 찾아가는 이번 길에도 박철언, 야기 노부오와 함께 야스오카의..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7)] 박태준이 3선 개헌 서명을 거부하자 박정희는...2014.12.22 (월)
- 한국 정부가 KISA에 휘둘리고 있어서 포스코는 착공 시기조차 예측할 수 없었던 1969년 4월, 국내 정치적 상황은 갈등과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해 1월 여당(공화당)이 박정희의 3선을 허용하는 개헌을 검토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6)]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 박정희2014.12.16 (화)
- 1969년 4월의 IECOK 파리 총회가 포항종합제철 건설 차관 제공에 대해 ‘불가’를 결정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경제성이 결여되었다, 둘째는 한국의 외채 증가로 상환 능력이 없다. 박태준은 첫째 이유에 분..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5)] 박정희와 대화를 끝까지 발설않고 지킨 박태준2014.12.11 (목)
- 대일청구권자금의 포철 전용에 대한 오원철의 회고도 짚어봐야 한다.1928년에 태어난 오원철은 1957년 시발자동차 공장장을 지낸 경력이 보여주듯 엔지니어 출신으로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을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4)] 폭설에도 비행기 타고 협상하러 미국간 박태준2014.12.05 (금)
- 1969년 2월 박태준이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자금 여분을 포항제철 1기 건설비로 전용하자는 아이디어에 착안했고, 박정희가 그것을 재가했다. 이를 포스코는 ‘하와이 구상의 실현’이라고 한다. ‘하와이 구상’이라는 명명..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3)] 박정희가 대일청구권 자금의 포철 전용 구상을 비밀에 붙인 이유2014.12.03 (수)
- 대일청구권자금의 포항종합제철 건설비 전용, 1969년 2월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구원의 밧줄처럼 거머쥔 박태준의 착안에 대한 박정희의 승인과 재가. 뒷날에 포스코 사람들은 ‘하와이 구상’이라 명명한다. 그것은 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2)] 미국 자금줄이 막힌 박태준에게 번뜩 떠오른 기발한 생각2014.12.01 (월)
- 박태준은 포이에게 심야 결례의 이해부터 구했다. 포이는 기분이 상한 표정은 아니었다. 한국어 바이블에 등장하는 단어를 빌리자면 ‘젊고 가난한’ 한국인 사장을 ‘긍휼히’ 여기는 것 같았다. “박 사장님, 하고 싶은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1)] 일본 정부 "포철 건설 말고 일본 제품 사가라"2014.11.28 (금)
- 박태준은 미국 피츠버그로 가기 위해 서울을 출발했다. 그날은 1969년 1월 31일이었다. 폭설에 덮인 김포공항. 간신히 확보한 활주로가 있어 대한항공은 뜬다고 했다. 경제팀 관료로는 정문도 경제기획원 차관보, 포스..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0)] 건설차관 조달 위해 미국으로 가기전 박태준이 내린 엄청난 결정2014.11.26 (수)
- 해가 바뀌었다. 1969년 새해. ‘해를 맞이하는 만’이라는 뜻의 영일만(迎日灣), 그 수평선 위로 쇳물 빛깔의 붉은 해가 힘차게 솟아올랐다. 포항종합제철 고로에서 그 태양 빛깔의 쇳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 쇳물이 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9)] 포철 건설현장을 첫 방문한 박정희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거야?"2014.11.24 (월)
- 1968년 11월 5일 박태준은 모처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 31일 KISA에 제안했던 GEP 수정 협상안이 지루한 협의를 거쳐 일괄 타결되었다는 것. 공장 일반배치의 변경에 소요되는 비용 88만5000..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8)] 공장 건설에 앞서 은행 빚내서 좋은 사원주택부터 짓다2014.11.20 (목)
- 철거민의 이주 행렬, 수녀원과 고아원의 폭파를 지켜보는 포항시민이 포항종합제철 건설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1968년 여름, 실상 포스코의 미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KISA와 일반기술계획(GEP)의 문제점들에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7)] 육영수, 포스코에 밀려나는 고아원의 이주비를 지원하다2014.11.17 (월)
- 2005년 가을이었다. 아흔한 살의 김벨라뎃다 수녀는 사십대 중반의 작가(이대환) 앞에서 저 아득한 37년 전에 포항종합제철을 위해 터전을 내줘야 했던 그때 그 희붐해진 기억을 더듬다 말고 문득 소녀 같은 미소를 머..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6)] 포스코 부지에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집이 들어선 사연2014.11.14 (금)
- 1967년 여름에 이미 KISA를 ‘어중이떠중이 장사치들의 집합’이라고 의심했던 박태준. 가난한 한국정부에 차관도입이나 공장설립을 주선해온 공로를 앞세우며 KISA의 거간꾼 노릇까지 하고 있는 아이젠버그. 1968년..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5)] 구미 철강사들이 한국에 싸구려 시설을 떠넘기려 하자 박태준은 분노하고2014.11.13 (목)
- 박태준은 진작부터 대한중석 인재들을 종합제철로 데려갈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불확실한 쪽을 택해야 하는 그들에게 그는 힘차게 말했다. “대한민국도 이제 밥 먹고 사는 것은 별 문제가..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4)] 박정희도 꺽지 못한 박태준의 고집2014.11.10 (월)
-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특공대가 청와대 턱밑까지 잠입했다가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이른바 1‧21사태가 발발했으나, 박정희는 흔들림 없이 국정을 챙기는 가운데 1월 25일 대통령령에 의거해 ‘종합..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3)] 마침내 박태준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 박정희2014.11.07 (금)
- 박정희는 장기영의 후임으로 상공부장관 박충훈을 경제기획원 부총리에 발탁했다. 박충훈은 그동안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에도 깊숙이 관여해온 관료였다. 1967년 10월 12일 박충훈의 경제팀(한국정부)이 KISA와 종합..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2)] 이병철이 박태준에게 준 선물2014.11.06 (목)
- 10월 3일 종합제철 기공식. 5·16 이후부터만 꼽아도 장장 6년 넘게 끌어온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이 마침내 출발의 팡파르만 남겨둔 것 같았다. KISA 계획안을 검토하느라 시일을 끌어온 데다 KISA마저 느긋하게..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1)]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2014.11.03 (월)
- KISA가 다시 약속한 ‘기본협정 체결과 착공의 7월’을 맞았다. 그러나 7월이 다 지나도 한국정부와 KISA는 기본협정조차 체결하지 못했다. 초조한 쪽은 한국정부, 특히 대통령 박정희였다. KISA와 기본협정을 체..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0)] 제철소 부지로 포항을 염두에 둔 박정희, 반대파를 꺾기 위해...2014.10.31 (금)
- 1967년 상반기 한국에는 ‘선거 바람’이 드세게 불었다. 5월 11일 대통령선거, 6월 8일 국회의원선거. 아직은 한국의 경제관료들과 KISA가 공식적 파트너로서 함께 끌어나가는 종합제철소 건설은 드세게 불어대는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9)] 미국 주도의 한국 제철사업을 못마땅해 했던 일본2014.10.29 (수)
- 1966년 1월 한국 대통령 박정희는 미국을 공식 방문한 기회에 다시 코퍼스사 회장 포이와 만났다. 국제차관단 구성에 속도를 내달라고 부탁하는 자리였다. 포이가 적극성을 보였다. 그래서 그해 2월 2일 한국 대통령과..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8)]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내린 특명 "김기수의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라"2014.10.22 (수)
- 미국 코퍼스사(社) 대표 포이를 비롯한 서방 몇 개국의 철강업계 백인 기업가들과 한국정부의 경제부처 관료들이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한 문제를 놓고 기본적인 교감을 나누는 수준의 교섭을 벌이고 있던 1965년..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7)] 이후락의 부탁으로 종합제철사업을 준비했던 신격호2014.10.20 (월)
- 1965년 가을부터 1966년 봄까지, 박태준이 박정희에게서 종합제철에 관한 특명을 받아 초보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그 언저리에는, 박태준 아닌 또 다른 한국인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해 도쿄의..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6)] 가족 만나러 북한 갔다가 6년간 감옥생활했던 포스코 공신 김철우2014.10.16 (목)
- 1965년 여름, 뜨거운 서울거리를 한국사회의 격렬한 갈등이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6월 22일에 조인된 ‘한일조약’이 기폭제였다. 사정없고 거침없는 흑백논리가 세워졌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핵심으로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5)] "나는 고속도로, 임자는 종합제철이야"2014.10.14 (화)
- 1965년 5월 초순, 박정희는 미국 존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방미 장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대한중석 경영 혁신에 몰두하고 있는 박태준이 박정희의 호출을 받았다. 대통령과 대한중석 사..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4)] 박정희, 독일 제철소장에게 "저건 짓는데 얼마듭니까?" 꼼꼼히 물어2014.10.13 (월)
- 철강은 ‘산업의 쌀’이며, 철강 없는 산업화는 없다. 이것은 대통령 이승만도 알고 있었다. 오랜 미국 망명생활에서 터득한 지식의 하나였다. 한국정부는 1955년부터 서서히 전후(戰後)의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면서 산업..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3)] 박태준에게 대한중석 사장을 맡긴 박정희의 속내2014.10.10 (금)
- 박정희는 군대 시절부터 현장을 가장 중시했던 리더로 알려져 있다. 박태준도 현장제일주의 리더십을 철저히 실행한 최고경영자였다. 그러한 그의 특질은 대한중석 사장 시절부터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경영지표의 각종 수치가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2)] 김종필이 이후락 대신 박태준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앉히려 하자 이후락은2014.10.06 (월)
- 1964년 12월 초, 서독(독일) 방문을 앞둔 박정희가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렀다.“대한중석을 맡아줘야겠어.”‘달러박스’ 대한중석. ‘정치’의 자리가 아니라 ‘경제’의 자리였다. 박태준은 마음을 열었다.“서독 갔다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1)] 일본 간 박태준, 6·25 덕에 사상 최고 호황 누리는 일본을 보고2014.10.01 (수)
- 일본의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한국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그 천거의 무게와 명찰에 어울리는 인품과 언행을 보여야 하는 박태준은 1964년 1월 도쿄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오노가 일본 중의원 의장, 내각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0)] 매국노 역할을 맡긴 박정희, 떠맡은 박태준2014.09.26 (금)
- “박태준이 왔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박태준이 한 번 더 고했다. 그래도 서재에 서 있는 박정희는 책을 찾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박태준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1964년 1월 1..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9)] 박태준이 살아 이정현 당선을 봤다면?2014.09.24 (수)
- 1963년 9월 15일 대통령 후보 등록 마감, 법정 선거운동 기간은 한 달, 10월 15일 투표. ‘5‧16의 2년 6개월’에 대해 국민이 심판하는 선거는 예상대로 윤보선 후보와 박정희 후보의 치열한 각축전이었다...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8)] 국회의원 출마 안하려고 박태준은 아내에게...2014.09.16 (화)
-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가 ‘내각제 폐지와 대통령중심제 채택’ 개헌안을 찬성했다. 1963년은 새해 벽두부터 ‘정치의 계절’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그해 8월 15일에 제3공화국 대통령 선거일을 10월 15..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7)] 땔감 때문에 벌겋게 된 민둥산을 푸르게 만든 박태준의 묘안2014.09.15 (월)
- 1960년대, 한국 야산들은 가난한 국민에게 땔감을 대는 고마운 창고였다. 겨울에는 더욱 그랬다. 삭정이도 솔방울도 낙엽도 귀중한 ‘가정 연료’였다. 농한기에 시골의 가장(家長)들은 장작을 패서 달구지에 싣고 장터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6)] 박정희, 미국 차관 못얻어 울산제철 건설에 실패한 뒤 한이 맺히고2014.09.11 (목)
- 박태준은 1961년 세밑에 유럽으로 날아갔다. 구라파통상사절단 단장이었다. 최고위원은 혼자였다. 통상도 통상이거니와 선진국 산업현장을 견학할 좋은 기회였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을 진리로 신봉하는 그의 목적의식..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5)] 경제개발 밑천이 없어 애가 탄 박정희, 미국-일본-서독으로...2014.09.02 (화)
- 1961년 11월 11일,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빼빼로 데이’라 부르는 그날, 박정희가 통치자로서 최초 해외 순방에 나선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러 일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와 만..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4)] 박정희와 박태준, "아들 6명이 6-25 때 전사했다"는 사기꾼에 속아...2014.08.28 (목)
-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엔간히 안정 기반을 다진 1961년 7월, 서울은 무더위에 갇혀 있었다. 그 여름의 어느 날, 비서실장 박태준은 가슴 아픈 사연을 들어야 했다. 함경북도 출신의 김 아무개 노인이 국군에 들어간 아들..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3)] 한심했던 한국경제…박정희, 박태준을 경제 분야에 전진배치2014.08.25 (월)
- 박정희는 호랑이 등에 완전히 올라탔다. 박태준도 그 뒤에 앉았다. 전진을 멈출 수도 스스로 내릴 수도 없는, 험난한 앞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실력이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2)] 박정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 자네에게..."2014.08.21 (목)
-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태준은 전투복 차림으로 군화 끈을 졸라맸다. 그리고 대문까지 배웅을 나온 아내에게 묵직하게 말했다.“지금 나가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소. 그럴 때는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1)] 박정희 따라 대구 간 박태준, 신성일 집에서 하숙2014.08.20 (수)
- 이철승은 유효한 줄이었다. 박정희는 ‘군복을 벗어야 하는 위기’를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곧 서울을 떠나야 했다. 그것은 거사의 공간에서 멀리 벗어나야 하는 괴로운 노릇이었다. 1961년 1월 박태준은 귀국..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0)] 강제전역 위기에 몰린 박정희가 붙잡은 구명줄2014.08.18 (월)
- “광주로 같이 가자. 참모장을 맡아줘.”대취에서 깨어난 박정희의 제안에 담긴 의미를 박태준은 금세 알아차렸다. 최소한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을 깊이 신뢰하고 있다는 것, 또 하나는 좌천당한 울분과 과음의 후유증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9)] 박정희, 송요찬 계엄사령관에게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시라"2014.08.14 (목)
- 4·19의 신선한 기풍이 군부에도 쇄신 바람을 일으켰다. 군부는 변해야 했다. 박정희는 박태준을 비롯한 핵심참모와 숙의하고 드디어 과감한 행동에 나선다. 그것은 1960년 5월 2일 송요찬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에..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8)] 박정희와 박태준이 부산 동백섬에서 한 사나이간 맹세2014.08.11 (월)
- 부산군수기지사령부 관사는 동래 온천장 동네였다. 이른 봄날에 박정희는 술집의 일차를 마치면 얼큰한 술기운 속에서 곧잘 자기 관사로 참모들을 몰고 갔다. 대화도 노래도 참으로 편한 장소였다. 관사로 가자, 나를 따르라..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7)] 박정희, 참모들에게 "박태준을 술로 뻗게 하라"2014.08.06 (수)
- 1958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시가행진 부대를 지휘하여 25사단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박태준은 1959년 3월 육군본부 인사처리과장으로 부임하여 그해 8월 미국 연수를 다녀온다. 9월 17일 귀국. 자리는 그대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6)] 박태준, 가짜 고추가루 납품업자 얼굴에 권총을 겨누다2014.08.05 (화)
- 단 한 번, 박정희는 군대경력에서 박태준의 후배라는 기록을 남겼다. 육군대학이 그것이다. 1953년 11월 준장 진급 후 미국 육군 포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유학하고 광주포병학교 교장을 거쳐 5사단장으로 있던 박정희가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2014.07.29 (화)
- “……견딜 수 없는 바를 견디고 참을 수 없는 바를 참아갑시다.” 일본 왕 히로히토의 저 목소리가 라디오 전파에 실린 것은 1945년 8월 15일 정오였다. 이른바 ‘무조건 항복’ 선언. 이것을 박태준은 일본 산골의..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 박정희가 재임 내내 박태준에게만은 독대 특혜를 준 사연2014.07.25 (금)
- 1968년 4월 1일. 이 만우절에는 한국 현대사가 기록할 두 가지 ‘특별한 기념식’이 열렸다. 장소는 대전과 서울. 대전의 것은 거창하고, 서울의 것은 조촐했다. 다만 시작이 조촐하다 해서 미래도 그래야 한다는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마패를 준 까닭2014.07.21 (월)
- <프롤로그> 왜 위대한 만남인가?(下) 1917년에 태어나 1979년에 생을 마친 박정희, 1927년에 태어나 2011년에 생을 마친 박태준. 십 년 차이로 이 험난한 땅에 태어나 공동의 운명을 짊어지고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 박정희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라", 박태준은...2014.07.15 (화)
- <프롤로그> 왜 위대한 만남인가?(中) 정치냐 경제냐, 이 갈림길이 박태준의 눈앞에 나타난 때는 1963년 9월이었다.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강의실에서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난 박정희..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 박정희의 과(過)에 박태준이 연루되지 않는 이유2014.07.08 (화)
- 진정한 신뢰로 위대한 일을 창조한 ‘롤 모델’이 우리 권력동네엔 없는가? ‘박정희와 박태준’이 답할 것이다. 한국산업화의 강건한 견인차였던 포항종합제철, 지난 3일로 준공 41주년을 맞았다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5)]
- 박태준의 철판과 정주영의 배가 만나는 순간2015.01.19 (월)
- 1970년 4월 1일 오후 3시. 영일만 모래벌판에서 천둥 같은 폭발음과 함께 오색찬란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지반을 다지기 위해 항타기로 파일을 두들겨 박는 굉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1961년부터 박정희가 꿈꿔..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4)] 박태준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죽어야 합니다"2015.01.16 (금)
- 1970년과 1970년대의 개막을 한꺼번에 알리는 붉은 햇덩이가 영일만 수평선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쇳물, 바로 그 빛깔이었다. 한국 산업화 역사에서 1970년 새해에 기록할 쾌거는 마침내 종합제철 건설의 막을 올..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3)] 박태준에게 "뭐든 배워오면 국가를 위해 쓰일 날이 온다"고 했던 박정희2015.01.12 (월)
- 아카자와 쇼이치가 인솔한 일본조사단이 포항을 다녀간 1969년 9월 중순, 박태준은 포스코 내에 ‘건설기획조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조직은 설계 및 공정 기획, 시공업체와 계약업무 조정, 예산 통제, 설비구매 기획..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1)] 박태준의 발품에 감동한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2015.01.02 (금)
- 박태준은 도리없이 또다시 김포공항으로 달려갔다. 오직 ‘일응’이라는 두 글자의 일본어(한자)를 빼기 위하여. 그러나 그것이 ‘마라톤 같은 장정’이 될 것이라는 예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태준은 도쿄에 닿기 바..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0)] 기술협약서 한장 위해 일본 철강업계에 3번이나 머리를 조아린 박태준2014.12.31 (수)
- 8월 22일 일본철강연맹은 이나야마 회장의 주선으로 ‘한국제철소건설협력위원회’를 구성했다. 일본 철강회사들과 종합상사들로 구성한 이 위원회는 설계‧건설의 기술지원과 기자재 선정의 협력을 위한 조직이었다. 이날 일본정..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9)] 종합제철소 자금조달의 마지막 난관을 넘다2014.12.29 (월)
- 1969년 8월 15일, 아이치 외무상이 한국 광복절을 축하하듯 기자회견을 통해 외무성 대장성 통산성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합동회의를 한 결과 대일청구권자금 전용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가 이루어졌고 22일 일..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8)] 박태준 "일본을 이기려면..."2014.12.26 (금)
- 8월의 도쿄는 서울보다 뜨거웠다. 박태준은 맨 먼저 야스오카를 찾아간다. 포철에 대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언약도 해주고 서신도 보내준 이나야마를 또다시 찾아가는 이번 길에도 박철언, 야기 노부오와 함께 야스오카의..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7)] 박태준이 3선 개헌 서명을 거부하자 박정희는...2014.12.22 (월)
- 한국 정부가 KISA에 휘둘리고 있어서 포스코는 착공 시기조차 예측할 수 없었던 1969년 4월, 국내 정치적 상황은 갈등과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해 1월 여당(공화당)이 박정희의 3선을 허용하는 개헌을 검토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6)]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 박정희2014.12.16 (화)
- 1969년 4월의 IECOK 파리 총회가 포항종합제철 건설 차관 제공에 대해 ‘불가’를 결정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경제성이 결여되었다, 둘째는 한국의 외채 증가로 상환 능력이 없다. 박태준은 첫째 이유에 분..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5)] 박정희와 대화를 끝까지 발설않고 지킨 박태준2014.12.11 (목)
- 대일청구권자금의 포철 전용에 대한 오원철의 회고도 짚어봐야 한다.1928년에 태어난 오원철은 1957년 시발자동차 공장장을 지낸 경력이 보여주듯 엔지니어 출신으로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을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4)] 폭설에도 비행기 타고 협상하러 미국간 박태준2014.12.05 (금)
- 1969년 2월 박태준이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자금 여분을 포항제철 1기 건설비로 전용하자는 아이디어에 착안했고, 박정희가 그것을 재가했다. 이를 포스코는 ‘하와이 구상의 실현’이라고 한다. ‘하와이 구상’이라는 명명..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3)] 박정희가 대일청구권 자금의 포철 전용 구상을 비밀에 붙인 이유2014.12.03 (수)
- 대일청구권자금의 포항종합제철 건설비 전용, 1969년 2월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구원의 밧줄처럼 거머쥔 박태준의 착안에 대한 박정희의 승인과 재가. 뒷날에 포스코 사람들은 ‘하와이 구상’이라 명명한다. 그것은 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2)] 미국 자금줄이 막힌 박태준에게 번뜩 떠오른 기발한 생각2014.12.01 (월)
- 박태준은 포이에게 심야 결례의 이해부터 구했다. 포이는 기분이 상한 표정은 아니었다. 한국어 바이블에 등장하는 단어를 빌리자면 ‘젊고 가난한’ 한국인 사장을 ‘긍휼히’ 여기는 것 같았다. “박 사장님, 하고 싶은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1)] 일본 정부 "포철 건설 말고 일본 제품 사가라"2014.11.28 (금)
- 박태준은 미국 피츠버그로 가기 위해 서울을 출발했다. 그날은 1969년 1월 31일이었다. 폭설에 덮인 김포공항. 간신히 확보한 활주로가 있어 대한항공은 뜬다고 했다. 경제팀 관료로는 정문도 경제기획원 차관보, 포스..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0)] 건설차관 조달 위해 미국으로 가기전 박태준이 내린 엄청난 결정2014.11.26 (수)
- 해가 바뀌었다. 1969년 새해. ‘해를 맞이하는 만’이라는 뜻의 영일만(迎日灣), 그 수평선 위로 쇳물 빛깔의 붉은 해가 힘차게 솟아올랐다. 포항종합제철 고로에서 그 태양 빛깔의 쇳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 쇳물이 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9)] 포철 건설현장을 첫 방문한 박정희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거야?"2014.11.24 (월)
- 1968년 11월 5일 박태준은 모처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 31일 KISA에 제안했던 GEP 수정 협상안이 지루한 협의를 거쳐 일괄 타결되었다는 것. 공장 일반배치의 변경에 소요되는 비용 88만5000..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8)] 공장 건설에 앞서 은행 빚내서 좋은 사원주택부터 짓다2014.11.20 (목)
- 철거민의 이주 행렬, 수녀원과 고아원의 폭파를 지켜보는 포항시민이 포항종합제철 건설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1968년 여름, 실상 포스코의 미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KISA와 일반기술계획(GEP)의 문제점들에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7)] 육영수, 포스코에 밀려나는 고아원의 이주비를 지원하다2014.11.17 (월)
- 2005년 가을이었다. 아흔한 살의 김벨라뎃다 수녀는 사십대 중반의 작가(이대환) 앞에서 저 아득한 37년 전에 포항종합제철을 위해 터전을 내줘야 했던 그때 그 희붐해진 기억을 더듬다 말고 문득 소녀 같은 미소를 머..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6)] 포스코 부지에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집이 들어선 사연2014.11.14 (금)
- 1967년 여름에 이미 KISA를 ‘어중이떠중이 장사치들의 집합’이라고 의심했던 박태준. 가난한 한국정부에 차관도입이나 공장설립을 주선해온 공로를 앞세우며 KISA의 거간꾼 노릇까지 하고 있는 아이젠버그. 1968년..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5)] 구미 철강사들이 한국에 싸구려 시설을 떠넘기려 하자 박태준은 분노하고2014.11.13 (목)
- 박태준은 진작부터 대한중석 인재들을 종합제철로 데려갈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불확실한 쪽을 택해야 하는 그들에게 그는 힘차게 말했다. “대한민국도 이제 밥 먹고 사는 것은 별 문제가..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4)] 박정희도 꺽지 못한 박태준의 고집2014.11.10 (월)
-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특공대가 청와대 턱밑까지 잠입했다가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이른바 1‧21사태가 발발했으나, 박정희는 흔들림 없이 국정을 챙기는 가운데 1월 25일 대통령령에 의거해 ‘종합..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3)] 마침내 박태준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 박정희2014.11.07 (금)
- 박정희는 장기영의 후임으로 상공부장관 박충훈을 경제기획원 부총리에 발탁했다. 박충훈은 그동안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에도 깊숙이 관여해온 관료였다. 1967년 10월 12일 박충훈의 경제팀(한국정부)이 KISA와 종합..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2)] 이병철이 박태준에게 준 선물2014.11.06 (목)
- 10월 3일 종합제철 기공식. 5·16 이후부터만 꼽아도 장장 6년 넘게 끌어온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이 마침내 출발의 팡파르만 남겨둔 것 같았다. KISA 계획안을 검토하느라 시일을 끌어온 데다 KISA마저 느긋하게..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1)]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2014.11.03 (월)
- KISA가 다시 약속한 ‘기본협정 체결과 착공의 7월’을 맞았다. 그러나 7월이 다 지나도 한국정부와 KISA는 기본협정조차 체결하지 못했다. 초조한 쪽은 한국정부, 특히 대통령 박정희였다. KISA와 기본협정을 체..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0)] 제철소 부지로 포항을 염두에 둔 박정희, 반대파를 꺾기 위해...2014.10.31 (금)
- 1967년 상반기 한국에는 ‘선거 바람’이 드세게 불었다. 5월 11일 대통령선거, 6월 8일 국회의원선거. 아직은 한국의 경제관료들과 KISA가 공식적 파트너로서 함께 끌어나가는 종합제철소 건설은 드세게 불어대는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9)] 미국 주도의 한국 제철사업을 못마땅해 했던 일본2014.10.29 (수)
- 1966년 1월 한국 대통령 박정희는 미국을 공식 방문한 기회에 다시 코퍼스사 회장 포이와 만났다. 국제차관단 구성에 속도를 내달라고 부탁하는 자리였다. 포이가 적극성을 보였다. 그래서 그해 2월 2일 한국 대통령과..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8)]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내린 특명 "김기수의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라"2014.10.22 (수)
- 미국 코퍼스사(社) 대표 포이를 비롯한 서방 몇 개국의 철강업계 백인 기업가들과 한국정부의 경제부처 관료들이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한 문제를 놓고 기본적인 교감을 나누는 수준의 교섭을 벌이고 있던 1965년..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7)] 이후락의 부탁으로 종합제철사업을 준비했던 신격호2014.10.20 (월)
- 1965년 가을부터 1966년 봄까지, 박태준이 박정희에게서 종합제철에 관한 특명을 받아 초보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그 언저리에는, 박태준 아닌 또 다른 한국인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해 도쿄의..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6)] 가족 만나러 북한 갔다가 6년간 감옥생활했던 포스코 공신 김철우2014.10.16 (목)
- 1965년 여름, 뜨거운 서울거리를 한국사회의 격렬한 갈등이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6월 22일에 조인된 ‘한일조약’이 기폭제였다. 사정없고 거침없는 흑백논리가 세워졌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핵심으로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5)] "나는 고속도로, 임자는 종합제철이야"2014.10.14 (화)
- 1965년 5월 초순, 박정희는 미국 존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방미 장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대한중석 경영 혁신에 몰두하고 있는 박태준이 박정희의 호출을 받았다. 대통령과 대한중석 사..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4)] 박정희, 독일 제철소장에게 "저건 짓는데 얼마듭니까?" 꼼꼼히 물어2014.10.13 (월)
- 철강은 ‘산업의 쌀’이며, 철강 없는 산업화는 없다. 이것은 대통령 이승만도 알고 있었다. 오랜 미국 망명생활에서 터득한 지식의 하나였다. 한국정부는 1955년부터 서서히 전후(戰後)의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면서 산업..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3)] 박태준에게 대한중석 사장을 맡긴 박정희의 속내2014.10.10 (금)
- 박정희는 군대 시절부터 현장을 가장 중시했던 리더로 알려져 있다. 박태준도 현장제일주의 리더십을 철저히 실행한 최고경영자였다. 그러한 그의 특질은 대한중석 사장 시절부터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경영지표의 각종 수치가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2)] 김종필이 이후락 대신 박태준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앉히려 하자 이후락은2014.10.06 (월)
- 1964년 12월 초, 서독(독일) 방문을 앞둔 박정희가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렀다.“대한중석을 맡아줘야겠어.”‘달러박스’ 대한중석. ‘정치’의 자리가 아니라 ‘경제’의 자리였다. 박태준은 마음을 열었다.“서독 갔다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1)] 일본 간 박태준, 6·25 덕에 사상 최고 호황 누리는 일본을 보고2014.10.01 (수)
- 일본의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한국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그 천거의 무게와 명찰에 어울리는 인품과 언행을 보여야 하는 박태준은 1964년 1월 도쿄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오노가 일본 중의원 의장, 내각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0)] 매국노 역할을 맡긴 박정희, 떠맡은 박태준2014.09.26 (금)
- “박태준이 왔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박태준이 한 번 더 고했다. 그래도 서재에 서 있는 박정희는 책을 찾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박태준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1964년 1월 1..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9)] 박태준이 살아 이정현 당선을 봤다면?2014.09.24 (수)
- 1963년 9월 15일 대통령 후보 등록 마감, 법정 선거운동 기간은 한 달, 10월 15일 투표. ‘5‧16의 2년 6개월’에 대해 국민이 심판하는 선거는 예상대로 윤보선 후보와 박정희 후보의 치열한 각축전이었다...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8)] 국회의원 출마 안하려고 박태준은 아내에게...2014.09.16 (화)
-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가 ‘내각제 폐지와 대통령중심제 채택’ 개헌안을 찬성했다. 1963년은 새해 벽두부터 ‘정치의 계절’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그해 8월 15일에 제3공화국 대통령 선거일을 10월 15..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7)] 땔감 때문에 벌겋게 된 민둥산을 푸르게 만든 박태준의 묘안2014.09.15 (월)
- 1960년대, 한국 야산들은 가난한 국민에게 땔감을 대는 고마운 창고였다. 겨울에는 더욱 그랬다. 삭정이도 솔방울도 낙엽도 귀중한 ‘가정 연료’였다. 농한기에 시골의 가장(家長)들은 장작을 패서 달구지에 싣고 장터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6)] 박정희, 미국 차관 못얻어 울산제철 건설에 실패한 뒤 한이 맺히고2014.09.11 (목)
- 박태준은 1961년 세밑에 유럽으로 날아갔다. 구라파통상사절단 단장이었다. 최고위원은 혼자였다. 통상도 통상이거니와 선진국 산업현장을 견학할 좋은 기회였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을 진리로 신봉하는 그의 목적의식..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5)] 경제개발 밑천이 없어 애가 탄 박정희, 미국-일본-서독으로...2014.09.02 (화)
- 1961년 11월 11일,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빼빼로 데이’라 부르는 그날, 박정희가 통치자로서 최초 해외 순방에 나선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러 일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와 만..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4)] 박정희와 박태준, "아들 6명이 6-25 때 전사했다"는 사기꾼에 속아...2014.08.28 (목)
-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엔간히 안정 기반을 다진 1961년 7월, 서울은 무더위에 갇혀 있었다. 그 여름의 어느 날, 비서실장 박태준은 가슴 아픈 사연을 들어야 했다. 함경북도 출신의 김 아무개 노인이 국군에 들어간 아들..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3)] 한심했던 한국경제…박정희, 박태준을 경제 분야에 전진배치2014.08.25 (월)
- 박정희는 호랑이 등에 완전히 올라탔다. 박태준도 그 뒤에 앉았다. 전진을 멈출 수도 스스로 내릴 수도 없는, 험난한 앞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실력이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2)] 박정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 자네에게..."2014.08.21 (목)
-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태준은 전투복 차림으로 군화 끈을 졸라맸다. 그리고 대문까지 배웅을 나온 아내에게 묵직하게 말했다.“지금 나가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소. 그럴 때는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1)] 박정희 따라 대구 간 박태준, 신성일 집에서 하숙2014.08.20 (수)
- 이철승은 유효한 줄이었다. 박정희는 ‘군복을 벗어야 하는 위기’를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곧 서울을 떠나야 했다. 그것은 거사의 공간에서 멀리 벗어나야 하는 괴로운 노릇이었다. 1961년 1월 박태준은 귀국..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0)] 강제전역 위기에 몰린 박정희가 붙잡은 구명줄2014.08.18 (월)
- “광주로 같이 가자. 참모장을 맡아줘.”대취에서 깨어난 박정희의 제안에 담긴 의미를 박태준은 금세 알아차렸다. 최소한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을 깊이 신뢰하고 있다는 것, 또 하나는 좌천당한 울분과 과음의 후유증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9)] 박정희, 송요찬 계엄사령관에게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시라"2014.08.14 (목)
- 4·19의 신선한 기풍이 군부에도 쇄신 바람을 일으켰다. 군부는 변해야 했다. 박정희는 박태준을 비롯한 핵심참모와 숙의하고 드디어 과감한 행동에 나선다. 그것은 1960년 5월 2일 송요찬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에..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8)] 박정희와 박태준이 부산 동백섬에서 한 사나이간 맹세2014.08.11 (월)
- 부산군수기지사령부 관사는 동래 온천장 동네였다. 이른 봄날에 박정희는 술집의 일차를 마치면 얼큰한 술기운 속에서 곧잘 자기 관사로 참모들을 몰고 갔다. 대화도 노래도 참으로 편한 장소였다. 관사로 가자, 나를 따르라..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7)] 박정희, 참모들에게 "박태준을 술로 뻗게 하라"2014.08.06 (수)
- 1958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시가행진 부대를 지휘하여 25사단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박태준은 1959년 3월 육군본부 인사처리과장으로 부임하여 그해 8월 미국 연수를 다녀온다. 9월 17일 귀국. 자리는 그대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6)] 박태준, 가짜 고추가루 납품업자 얼굴에 권총을 겨누다2014.08.05 (화)
- 단 한 번, 박정희는 군대경력에서 박태준의 후배라는 기록을 남겼다. 육군대학이 그것이다. 1953년 11월 준장 진급 후 미국 육군 포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유학하고 광주포병학교 교장을 거쳐 5사단장으로 있던 박정희가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2014.07.29 (화)
- “……견딜 수 없는 바를 견디고 참을 수 없는 바를 참아갑시다.” 일본 왕 히로히토의 저 목소리가 라디오 전파에 실린 것은 1945년 8월 15일 정오였다. 이른바 ‘무조건 항복’ 선언. 이것을 박태준은 일본 산골의..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 박정희가 재임 내내 박태준에게만은 독대 특혜를 준 사연2014.07.25 (금)
- 1968년 4월 1일. 이 만우절에는 한국 현대사가 기록할 두 가지 ‘특별한 기념식’이 열렸다. 장소는 대전과 서울. 대전의 것은 거창하고, 서울의 것은 조촐했다. 다만 시작이 조촐하다 해서 미래도 그래야 한다는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마패를 준 까닭2014.07.21 (월)
- <프롤로그> 왜 위대한 만남인가?(下) 1917년에 태어나 1979년에 생을 마친 박정희, 1927년에 태어나 2011년에 생을 마친 박태준. 십 년 차이로 이 험난한 땅에 태어나 공동의 운명을 짊어지고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 박정희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라", 박태준은...2014.07.15 (화)
- <프롤로그> 왜 위대한 만남인가?(中) 정치냐 경제냐, 이 갈림길이 박태준의 눈앞에 나타난 때는 1963년 9월이었다.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강의실에서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난 박정희..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 박정희의 과(過)에 박태준이 연루되지 않는 이유2014.07.08 (화)
- 진정한 신뢰로 위대한 일을 창조한 ‘롤 모델’이 우리 권력동네엔 없는가? ‘박정희와 박태준’이 답할 것이다. 한국산업화의 강건한 견인차였던 포항종합제철, 지난 3일로 준공 41주년을 맞았다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5)]
- 박태준의 철판과 정주영의 배가 만나는 순간2015.01.19 (월)
- 1970년 4월 1일 오후 3시. 영일만 모래벌판에서 천둥 같은 폭발음과 함께 오색찬란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지반을 다지기 위해 항타기로 파일을 두들겨 박는 굉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1961년부터 박정희가 꿈꿔..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4)] 박태준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죽어야 합니다"2015.01.16 (금)
- 1970년과 1970년대의 개막을 한꺼번에 알리는 붉은 햇덩이가 영일만 수평선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쇳물, 바로 그 빛깔이었다. 한국 산업화 역사에서 1970년 새해에 기록할 쾌거는 마침내 종합제철 건설의 막을 올..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3)] 박태준에게 "뭐든 배워오면 국가를 위해 쓰일 날이 온다"고 했던 박정희2015.01.12 (월)
- 아카자와 쇼이치가 인솔한 일본조사단이 포항을 다녀간 1969년 9월 중순, 박태준은 포스코 내에 ‘건설기획조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조직은 설계 및 공정 기획, 시공업체와 계약업무 조정, 예산 통제, 설비구매 기획..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1)] 박태준의 발품에 감동한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2015.01.02 (금)
- 박태준은 도리없이 또다시 김포공항으로 달려갔다. 오직 ‘일응’이라는 두 글자의 일본어(한자)를 빼기 위하여. 그러나 그것이 ‘마라톤 같은 장정’이 될 것이라는 예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태준은 도쿄에 닿기 바..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0)] 기술협약서 한장 위해 일본 철강업계에 3번이나 머리를 조아린 박태준2014.12.31 (수)
- 8월 22일 일본철강연맹은 이나야마 회장의 주선으로 ‘한국제철소건설협력위원회’를 구성했다. 일본 철강회사들과 종합상사들로 구성한 이 위원회는 설계‧건설의 기술지원과 기자재 선정의 협력을 위한 조직이었다. 이날 일본정..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9)] 종합제철소 자금조달의 마지막 난관을 넘다2014.12.29 (월)
- 1969년 8월 15일, 아이치 외무상이 한국 광복절을 축하하듯 기자회견을 통해 외무성 대장성 통산성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합동회의를 한 결과 대일청구권자금 전용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가 이루어졌고 22일 일..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8)] 박태준 "일본을 이기려면..."2014.12.26 (금)
- 8월의 도쿄는 서울보다 뜨거웠다. 박태준은 맨 먼저 야스오카를 찾아간다. 포철에 대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언약도 해주고 서신도 보내준 이나야마를 또다시 찾아가는 이번 길에도 박철언, 야기 노부오와 함께 야스오카의..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7)] 박태준이 3선 개헌 서명을 거부하자 박정희는...2014.12.22 (월)
- 한국 정부가 KISA에 휘둘리고 있어서 포스코는 착공 시기조차 예측할 수 없었던 1969년 4월, 국내 정치적 상황은 갈등과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해 1월 여당(공화당)이 박정희의 3선을 허용하는 개헌을 검토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6)]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 박정희2014.12.16 (화)
- 1969년 4월의 IECOK 파리 총회가 포항종합제철 건설 차관 제공에 대해 ‘불가’를 결정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경제성이 결여되었다, 둘째는 한국의 외채 증가로 상환 능력이 없다. 박태준은 첫째 이유에 분..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5)] 박정희와 대화를 끝까지 발설않고 지킨 박태준2014.12.11 (목)
- 대일청구권자금의 포철 전용에 대한 오원철의 회고도 짚어봐야 한다.1928년에 태어난 오원철은 1957년 시발자동차 공장장을 지낸 경력이 보여주듯 엔지니어 출신으로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을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4)] 폭설에도 비행기 타고 협상하러 미국간 박태준2014.12.05 (금)
- 1969년 2월 박태준이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자금 여분을 포항제철 1기 건설비로 전용하자는 아이디어에 착안했고, 박정희가 그것을 재가했다. 이를 포스코는 ‘하와이 구상의 실현’이라고 한다. ‘하와이 구상’이라는 명명..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3)] 박정희가 대일청구권 자금의 포철 전용 구상을 비밀에 붙인 이유2014.12.03 (수)
- 대일청구권자금의 포항종합제철 건설비 전용, 1969년 2월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구원의 밧줄처럼 거머쥔 박태준의 착안에 대한 박정희의 승인과 재가. 뒷날에 포스코 사람들은 ‘하와이 구상’이라 명명한다. 그것은 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2)] 미국 자금줄이 막힌 박태준에게 번뜩 떠오른 기발한 생각2014.12.01 (월)
- 박태준은 포이에게 심야 결례의 이해부터 구했다. 포이는 기분이 상한 표정은 아니었다. 한국어 바이블에 등장하는 단어를 빌리자면 ‘젊고 가난한’ 한국인 사장을 ‘긍휼히’ 여기는 것 같았다. “박 사장님, 하고 싶은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1)] 일본 정부 "포철 건설 말고 일본 제품 사가라"2014.11.28 (금)
- 박태준은 미국 피츠버그로 가기 위해 서울을 출발했다. 그날은 1969년 1월 31일이었다. 폭설에 덮인 김포공항. 간신히 확보한 활주로가 있어 대한항공은 뜬다고 했다. 경제팀 관료로는 정문도 경제기획원 차관보, 포스..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0)] 건설차관 조달 위해 미국으로 가기전 박태준이 내린 엄청난 결정2014.11.26 (수)
- 해가 바뀌었다. 1969년 새해. ‘해를 맞이하는 만’이라는 뜻의 영일만(迎日灣), 그 수평선 위로 쇳물 빛깔의 붉은 해가 힘차게 솟아올랐다. 포항종합제철 고로에서 그 태양 빛깔의 쇳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 쇳물이 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9)] 포철 건설현장을 첫 방문한 박정희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거야?"2014.11.24 (월)
- 1968년 11월 5일 박태준은 모처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 31일 KISA에 제안했던 GEP 수정 협상안이 지루한 협의를 거쳐 일괄 타결되었다는 것. 공장 일반배치의 변경에 소요되는 비용 88만5000..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8)] 공장 건설에 앞서 은행 빚내서 좋은 사원주택부터 짓다2014.11.20 (목)
- 철거민의 이주 행렬, 수녀원과 고아원의 폭파를 지켜보는 포항시민이 포항종합제철 건설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1968년 여름, 실상 포스코의 미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KISA와 일반기술계획(GEP)의 문제점들에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7)] 육영수, 포스코에 밀려나는 고아원의 이주비를 지원하다2014.11.17 (월)
- 2005년 가을이었다. 아흔한 살의 김벨라뎃다 수녀는 사십대 중반의 작가(이대환) 앞에서 저 아득한 37년 전에 포항종합제철을 위해 터전을 내줘야 했던 그때 그 희붐해진 기억을 더듬다 말고 문득 소녀 같은 미소를 머..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6)] 포스코 부지에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집이 들어선 사연2014.11.14 (금)
- 1967년 여름에 이미 KISA를 ‘어중이떠중이 장사치들의 집합’이라고 의심했던 박태준. 가난한 한국정부에 차관도입이나 공장설립을 주선해온 공로를 앞세우며 KISA의 거간꾼 노릇까지 하고 있는 아이젠버그. 1968년..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5)] 구미 철강사들이 한국에 싸구려 시설을 떠넘기려 하자 박태준은 분노하고2014.11.13 (목)
- 박태준은 진작부터 대한중석 인재들을 종합제철로 데려갈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불확실한 쪽을 택해야 하는 그들에게 그는 힘차게 말했다. “대한민국도 이제 밥 먹고 사는 것은 별 문제가..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4)] 박정희도 꺽지 못한 박태준의 고집2014.11.10 (월)
-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특공대가 청와대 턱밑까지 잠입했다가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이른바 1‧21사태가 발발했으나, 박정희는 흔들림 없이 국정을 챙기는 가운데 1월 25일 대통령령에 의거해 ‘종합..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3)] 마침내 박태준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 박정희2014.11.07 (금)
- 박정희는 장기영의 후임으로 상공부장관 박충훈을 경제기획원 부총리에 발탁했다. 박충훈은 그동안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에도 깊숙이 관여해온 관료였다. 1967년 10월 12일 박충훈의 경제팀(한국정부)이 KISA와 종합..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2)] 이병철이 박태준에게 준 선물2014.11.06 (목)
- 10월 3일 종합제철 기공식. 5·16 이후부터만 꼽아도 장장 6년 넘게 끌어온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이 마침내 출발의 팡파르만 남겨둔 것 같았다. KISA 계획안을 검토하느라 시일을 끌어온 데다 KISA마저 느긋하게..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1)]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2014.11.03 (월)
- KISA가 다시 약속한 ‘기본협정 체결과 착공의 7월’을 맞았다. 그러나 7월이 다 지나도 한국정부와 KISA는 기본협정조차 체결하지 못했다. 초조한 쪽은 한국정부, 특히 대통령 박정희였다. KISA와 기본협정을 체..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0)] 제철소 부지로 포항을 염두에 둔 박정희, 반대파를 꺾기 위해...2014.10.31 (금)
- 1967년 상반기 한국에는 ‘선거 바람’이 드세게 불었다. 5월 11일 대통령선거, 6월 8일 국회의원선거. 아직은 한국의 경제관료들과 KISA가 공식적 파트너로서 함께 끌어나가는 종합제철소 건설은 드세게 불어대는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9)] 미국 주도의 한국 제철사업을 못마땅해 했던 일본2014.10.29 (수)
- 1966년 1월 한국 대통령 박정희는 미국을 공식 방문한 기회에 다시 코퍼스사 회장 포이와 만났다. 국제차관단 구성에 속도를 내달라고 부탁하는 자리였다. 포이가 적극성을 보였다. 그래서 그해 2월 2일 한국 대통령과..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8)]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내린 특명 "김기수의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라"2014.10.22 (수)
- 미국 코퍼스사(社) 대표 포이를 비롯한 서방 몇 개국의 철강업계 백인 기업가들과 한국정부의 경제부처 관료들이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한 문제를 놓고 기본적인 교감을 나누는 수준의 교섭을 벌이고 있던 1965년..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7)] 이후락의 부탁으로 종합제철사업을 준비했던 신격호2014.10.20 (월)
- 1965년 가을부터 1966년 봄까지, 박태준이 박정희에게서 종합제철에 관한 특명을 받아 초보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그 언저리에는, 박태준 아닌 또 다른 한국인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해 도쿄의..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6)] 가족 만나러 북한 갔다가 6년간 감옥생활했던 포스코 공신 김철우2014.10.16 (목)
- 1965년 여름, 뜨거운 서울거리를 한국사회의 격렬한 갈등이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6월 22일에 조인된 ‘한일조약’이 기폭제였다. 사정없고 거침없는 흑백논리가 세워졌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핵심으로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5)] "나는 고속도로, 임자는 종합제철이야"2014.10.14 (화)
- 1965년 5월 초순, 박정희는 미국 존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방미 장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대한중석 경영 혁신에 몰두하고 있는 박태준이 박정희의 호출을 받았다. 대통령과 대한중석 사..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4)] 박정희, 독일 제철소장에게 "저건 짓는데 얼마듭니까?" 꼼꼼히 물어2014.10.13 (월)
- 철강은 ‘산업의 쌀’이며, 철강 없는 산업화는 없다. 이것은 대통령 이승만도 알고 있었다. 오랜 미국 망명생활에서 터득한 지식의 하나였다. 한국정부는 1955년부터 서서히 전후(戰後)의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면서 산업..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3)] 박태준에게 대한중석 사장을 맡긴 박정희의 속내2014.10.10 (금)
- 박정희는 군대 시절부터 현장을 가장 중시했던 리더로 알려져 있다. 박태준도 현장제일주의 리더십을 철저히 실행한 최고경영자였다. 그러한 그의 특질은 대한중석 사장 시절부터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경영지표의 각종 수치가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2)] 김종필이 이후락 대신 박태준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앉히려 하자 이후락은2014.10.06 (월)
- 1964년 12월 초, 서독(독일) 방문을 앞둔 박정희가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렀다.“대한중석을 맡아줘야겠어.”‘달러박스’ 대한중석. ‘정치’의 자리가 아니라 ‘경제’의 자리였다. 박태준은 마음을 열었다.“서독 갔다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1)] 일본 간 박태준, 6·25 덕에 사상 최고 호황 누리는 일본을 보고2014.10.01 (수)
- 일본의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한국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그 천거의 무게와 명찰에 어울리는 인품과 언행을 보여야 하는 박태준은 1964년 1월 도쿄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오노가 일본 중의원 의장, 내각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0)] 매국노 역할을 맡긴 박정희, 떠맡은 박태준2014.09.26 (금)
- “박태준이 왔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박태준이 한 번 더 고했다. 그래도 서재에 서 있는 박정희는 책을 찾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박태준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1964년 1월 1..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9)] 박태준이 살아 이정현 당선을 봤다면?2014.09.24 (수)
- 1963년 9월 15일 대통령 후보 등록 마감, 법정 선거운동 기간은 한 달, 10월 15일 투표. ‘5‧16의 2년 6개월’에 대해 국민이 심판하는 선거는 예상대로 윤보선 후보와 박정희 후보의 치열한 각축전이었다...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8)] 국회의원 출마 안하려고 박태준은 아내에게...2014.09.16 (화)
-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가 ‘내각제 폐지와 대통령중심제 채택’ 개헌안을 찬성했다. 1963년은 새해 벽두부터 ‘정치의 계절’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그해 8월 15일에 제3공화국 대통령 선거일을 10월 15..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7)] 땔감 때문에 벌겋게 된 민둥산을 푸르게 만든 박태준의 묘안2014.09.15 (월)
- 1960년대, 한국 야산들은 가난한 국민에게 땔감을 대는 고마운 창고였다. 겨울에는 더욱 그랬다. 삭정이도 솔방울도 낙엽도 귀중한 ‘가정 연료’였다. 농한기에 시골의 가장(家長)들은 장작을 패서 달구지에 싣고 장터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6)] 박정희, 미국 차관 못얻어 울산제철 건설에 실패한 뒤 한이 맺히고2014.09.11 (목)
- 박태준은 1961년 세밑에 유럽으로 날아갔다. 구라파통상사절단 단장이었다. 최고위원은 혼자였다. 통상도 통상이거니와 선진국 산업현장을 견학할 좋은 기회였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을 진리로 신봉하는 그의 목적의식..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5)] 경제개발 밑천이 없어 애가 탄 박정희, 미국-일본-서독으로...2014.09.02 (화)
- 1961년 11월 11일,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빼빼로 데이’라 부르는 그날, 박정희가 통치자로서 최초 해외 순방에 나선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러 일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와 만..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4)] 박정희와 박태준, "아들 6명이 6-25 때 전사했다"는 사기꾼에 속아...2014.08.28 (목)
-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엔간히 안정 기반을 다진 1961년 7월, 서울은 무더위에 갇혀 있었다. 그 여름의 어느 날, 비서실장 박태준은 가슴 아픈 사연을 들어야 했다. 함경북도 출신의 김 아무개 노인이 국군에 들어간 아들..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3)] 한심했던 한국경제…박정희, 박태준을 경제 분야에 전진배치2014.08.25 (월)
- 박정희는 호랑이 등에 완전히 올라탔다. 박태준도 그 뒤에 앉았다. 전진을 멈출 수도 스스로 내릴 수도 없는, 험난한 앞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실력이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2)] 박정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 자네에게..."2014.08.21 (목)
-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태준은 전투복 차림으로 군화 끈을 졸라맸다. 그리고 대문까지 배웅을 나온 아내에게 묵직하게 말했다.“지금 나가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소. 그럴 때는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1)] 박정희 따라 대구 간 박태준, 신성일 집에서 하숙2014.08.20 (수)
- 이철승은 유효한 줄이었다. 박정희는 ‘군복을 벗어야 하는 위기’를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곧 서울을 떠나야 했다. 그것은 거사의 공간에서 멀리 벗어나야 하는 괴로운 노릇이었다. 1961년 1월 박태준은 귀국..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0)] 강제전역 위기에 몰린 박정희가 붙잡은 구명줄2014.08.18 (월)
- “광주로 같이 가자. 참모장을 맡아줘.”대취에서 깨어난 박정희의 제안에 담긴 의미를 박태준은 금세 알아차렸다. 최소한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을 깊이 신뢰하고 있다는 것, 또 하나는 좌천당한 울분과 과음의 후유증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9)] 박정희, 송요찬 계엄사령관에게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시라"2014.08.14 (목)
- 4·19의 신선한 기풍이 군부에도 쇄신 바람을 일으켰다. 군부는 변해야 했다. 박정희는 박태준을 비롯한 핵심참모와 숙의하고 드디어 과감한 행동에 나선다. 그것은 1960년 5월 2일 송요찬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에..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8)] 박정희와 박태준이 부산 동백섬에서 한 사나이간 맹세2014.08.11 (월)
- 부산군수기지사령부 관사는 동래 온천장 동네였다. 이른 봄날에 박정희는 술집의 일차를 마치면 얼큰한 술기운 속에서 곧잘 자기 관사로 참모들을 몰고 갔다. 대화도 노래도 참으로 편한 장소였다. 관사로 가자, 나를 따르라..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7)] 박정희, 참모들에게 "박태준을 술로 뻗게 하라"2014.08.06 (수)
- 1958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시가행진 부대를 지휘하여 25사단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박태준은 1959년 3월 육군본부 인사처리과장으로 부임하여 그해 8월 미국 연수를 다녀온다. 9월 17일 귀국. 자리는 그대로..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6)] 박태준, 가짜 고추가루 납품업자 얼굴에 권총을 겨누다2014.08.05 (화)
- 단 한 번, 박정희는 군대경력에서 박태준의 후배라는 기록을 남겼다. 육군대학이 그것이다. 1953년 11월 준장 진급 후 미국 육군 포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유학하고 광주포병학교 교장을 거쳐 5사단장으로 있던 박정희가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2014.07.29 (화)
- “……견딜 수 없는 바를 견디고 참을 수 없는 바를 참아갑시다.” 일본 왕 히로히토의 저 목소리가 라디오 전파에 실린 것은 1945년 8월 15일 정오였다. 이른바 ‘무조건 항복’ 선언. 이것을 박태준은 일본 산골의..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 박정희가 재임 내내 박태준에게만은 독대 특혜를 준 사연2014.07.25 (금)
- 1968년 4월 1일. 이 만우절에는 한국 현대사가 기록할 두 가지 ‘특별한 기념식’이 열렸다. 장소는 대전과 서울. 대전의 것은 거창하고, 서울의 것은 조촐했다. 다만 시작이 조촐하다 해서 미래도 그래야 한다는 ..이대환
-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마패를 준 까닭2014.07.21 (월)
- <프롤로그> 왜 위대한 만남인가?(下) 1917년에 태어나 1979년에 생을 마친 박정희, 1927년에 태어나 2011년에 생을 마친 박태준. 십 년 차이로 이 험난한 땅에 태어나 공동의 운명을 짊어지고 ..이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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