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겨례의 지도자

박정희와 박태준 위대한 만남

화이트보스 2015. 1. 19. 15:35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5)]

박태준의 철판과 정주영의 배가 만나는 순간2015.01.19 (월)

1970년 4월 1일 오후 3시. 영일만 모래벌판에서 천둥 같은 폭발음과 함께 오색찬란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지반을 다지기 위해 항타기로 파일을 두들겨 박는 굉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1961년부터 박정희가 꿈꿔..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4)]
박태준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죽어야 합니다"2015.01.16 (금)
1970년과 1970년대의 개막을 한꺼번에 알리는 붉은 햇덩이가 영일만 수평선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쇳물, 바로 그 빛깔이었다. 한국 산업화 역사에서 1970년 새해에 기록할 쾌거는 마침내 종합제철 건설의 막을 올..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3)]
박태준에게 "뭐든 배워오면 국가를 위해 쓰일 날이 온다"고 했던 박정희2015.01.12 (월)
아카자와 쇼이치가 인솔한 일본조사단이 포항을 다녀간 1969년 9월 중순, 박태준은 포스코 내에 ‘건설기획조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조직은 설계 및 공정 기획, 시공업체와 계약업무 조정, 예산 통제, 설비구매 기획..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1)]
박태준의 발품에 감동한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2015.01.02 (금)
박태준은 도리없이 또다시 김포공항으로 달려갔다. 오직 ‘일응’이라는 두 글자의 일본어(한자)를 빼기 위하여. 그러나 그것이 ‘마라톤 같은 장정’이 될 것이라는 예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태준은 도쿄에 닿기 바..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0)]
기술협약서 한장 위해 일본 철강업계에 3번이나 머리를 조아린 박태준2014.12.31 (수)
8월 22일 일본철강연맹은 이나야마 회장의 주선으로 ‘한국제철소건설협력위원회’를 구성했다. 일본 철강회사들과 종합상사들로 구성한 이 위원회는 설계‧건설의 기술지원과 기자재 선정의 협력을 위한 조직이었다. 이날 일본정..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9)]
종합제철소 자금조달의 마지막 난관을 넘다2014.12.29 (월)
1969년 8월 15일, 아이치 외무상이 한국 광복절을 축하하듯 기자회견을 통해 외무성 대장성 통산성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합동회의를 한 결과 대일청구권자금 전용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가 이루어졌고 22일 일..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8)]
박태준 "일본을 이기려면..."2014.12.26 (금)
8월의 도쿄는 서울보다 뜨거웠다. 박태준은 맨 먼저 야스오카를 찾아간다. 포철에 대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언약도 해주고 서신도 보내준 이나야마를 또다시 찾아가는 이번 길에도 박철언, 야기 노부오와 함께 야스오카의..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7)]
박태준이 3선 개헌 서명을 거부하자 박정희는...2014.12.22 (월)
한국 정부가 KISA에 휘둘리고 있어서 포스코는 착공 시기조차 예측할 수 없었던 1969년 4월, 국내 정치적 상황은 갈등과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해 1월 여당(공화당)이 박정희의 3선을 허용하는 개헌을 검토한..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6)]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 박정희2014.12.16 (화)
1969년 4월의 IECOK 파리 총회가 포항종합제철 건설 차관 제공에 대해 ‘불가’를 결정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경제성이 결여되었다, 둘째는 한국의 외채 증가로 상환 능력이 없다. 박태준은 첫째 이유에 분..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5)]
박정희와 대화를 끝까지 발설않고 지킨 박태준2014.12.11 (목)
대일청구권자금의 포철 전용에 대한 오원철의 회고도 짚어봐야 한다.1928년에 태어난 오원철은 1957년 시발자동차 공장장을 지낸 경력이 보여주듯 엔지니어 출신으로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을 ..이대환
폭설에도 비행기 타고 협상하러 미국간 박태준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4)]
폭설에도 비행기 타고 협상하러 미국간 박태준2014.12.05 (금)
1969년 2월 박태준이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자금 여분을 포항제철 1기 건설비로 전용하자는 아이디어에 착안했고, 박정희가 그것을 재가했다. 이를 포스코는 ‘하와이 구상의 실현’이라고 한다. ‘하와이 구상’이라는 명명..이대환
박정희가 대일청구권 자금의 포철 전용 구상을 비밀에 붙인 이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3)]
박정희가 대일청구권 자금의 포철 전용 구상을 비밀에 붙인 이유2014.12.03 (수)
대일청구권자금의 포항종합제철 건설비 전용, 1969년 2월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구원의 밧줄처럼 거머쥔 박태준의 착안에 대한 박정희의 승인과 재가. 뒷날에 포스코 사람들은 ‘하와이 구상’이라 명명한다. 그것은 한..이대환
미국 자금줄이 막힌 박태준에게 번뜩 떠오른 기발한 생각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2)]
미국 자금줄이 막힌 박태준에게 번뜩 떠오른 기발한 생각2014.12.01 (월)
박태준은 포이에게 심야 결례의 이해부터 구했다. 포이는 기분이 상한 표정은 아니었다. 한국어 바이블에 등장하는 단어를 빌리자면 ‘젊고 가난한’ 한국인 사장을 ‘긍휼히’ 여기는 것 같았다. “박 사장님, 하고 싶은 ..이대환
일본 정부 "포철 건설 말고 일본 제품 사가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1)]
일본 정부 "포철 건설 말고 일본 제품 사가라"2014.11.28 (금)
박태준은 미국 피츠버그로 가기 위해 서울을 출발했다. 그날은 1969년 1월 31일이었다. 폭설에 덮인 김포공항. 간신히 확보한 활주로가 있어 대한항공은 뜬다고 했다. 경제팀 관료로는 정문도 경제기획원 차관보, 포스..이대환
건설차관 조달 위해 미국으로 가기전 박태준이 내린 엄청난 결정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0)]
건설차관 조달 위해 미국으로 가기전 박태준이 내린 엄청난 결정2014.11.26 (수)
해가 바뀌었다. 1969년 새해. ‘해를 맞이하는 만’이라는 뜻의 영일만(迎日灣), 그 수평선 위로 쇳물 빛깔의 붉은 해가 힘차게 솟아올랐다. 포항종합제철 고로에서 그 태양 빛깔의 쇳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 쇳물이 한..이대환
포철 건설현장을 첫 방문한 박정희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거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9)]
포철 건설현장을 첫 방문한 박정희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거야?"2014.11.24 (월)
1968년 11월 5일 박태준은 모처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 31일 KISA에 제안했던 GEP 수정 협상안이 지루한 협의를 거쳐 일괄 타결되었다는 것. 공장 일반배치의 변경에 소요되는 비용 88만5000..이대환
공장 건설에 앞서 은행 빚내서 좋은 사원주택부터 짓다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8)]
공장 건설에 앞서 은행 빚내서 좋은 사원주택부터 짓다2014.11.20 (목)
철거민의 이주 행렬, 수녀원과 고아원의 폭파를 지켜보는 포항시민이 포항종합제철 건설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1968년 여름, 실상 포스코의 미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KISA와 일반기술계획(GEP)의 문제점들에 ..이대환
육영수, 포스코에 밀려나는 고아원의 이주비를 지원하다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7)]
육영수, 포스코에 밀려나는 고아원의 이주비를 지원하다2014.11.17 (월)
2005년 가을이었다. 아흔한 살의 김벨라뎃다 수녀는 사십대 중반의 작가(이대환) 앞에서 저 아득한 37년 전에 포항종합제철을 위해 터전을 내줘야 했던 그때 그 희붐해진 기억을 더듬다 말고 문득 소녀 같은 미소를 머..이대환
포스코 부지에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집이 들어선 사연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6)]
포스코 부지에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집이 들어선 사연2014.11.14 (금)
1967년 여름에 이미 KISA를 ‘어중이떠중이 장사치들의 집합’이라고 의심했던 박태준. 가난한 한국정부에 차관도입이나 공장설립을 주선해온 공로를 앞세우며 KISA의 거간꾼 노릇까지 하고 있는 아이젠버그. 1968년..이대환
구미 철강사들이 한국에 싸구려 시설을 떠넘기려 하자 박태준은 분노하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5)]
구미 철강사들이 한국에 싸구려 시설을 떠넘기려 하자 박태준은 분노하고2014.11.13 (목)
박태준은 진작부터 대한중석 인재들을 종합제철로 데려갈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불확실한 쪽을 택해야 하는 그들에게 그는 힘차게 말했다. “대한민국도 이제 밥 먹고 사는 것은 별 문제가..이대환
박정희도 꺽지 못한 박태준의 고집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4)]
박정희도 꺽지 못한 박태준의 고집2014.11.10 (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특공대가 청와대 턱밑까지 잠입했다가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이른바 1‧21사태가 발발했으나, 박정희는 흔들림 없이 국정을 챙기는 가운데 1월 25일 대통령령에 의거해 ‘종합..이대환
마침내 박태준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 박정희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3)]
마침내 박태준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 박정희2014.11.07 (금)
박정희는 장기영의 후임으로 상공부장관 박충훈을 경제기획원 부총리에 발탁했다. 박충훈은 그동안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에도 깊숙이 관여해온 관료였다. 1967년 10월 12일 박충훈의 경제팀(한국정부)이 KISA와 종합..이대환
이병철이 박태준에게 준 선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2)]
이병철이 박태준에게 준 선물2014.11.06 (목)
10월 3일 종합제철 기공식. 5·16 이후부터만 꼽아도 장장 6년 넘게 끌어온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이 마침내 출발의 팡파르만 남겨둔 것 같았다. KISA 계획안을 검토하느라 시일을 끌어온 데다 KISA마저 느긋하게..이대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1)]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2014.11.03 (월)
KISA가 다시 약속한 ‘기본협정 체결과 착공의 7월’을 맞았다. 그러나 7월이 다 지나도 한국정부와 KISA는 기본협정조차 체결하지 못했다. 초조한 쪽은 한국정부, 특히 대통령 박정희였다. KISA와 기본협정을 체..이대환
제철소 부지로 포항을 염두에 둔 박정희, 반대파를 꺾기 위해...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0)]
제철소 부지로 포항을 염두에 둔 박정희, 반대파를 꺾기 위해...2014.10.31 (금)
1967년 상반기 한국에는 ‘선거 바람’이 드세게 불었다. 5월 11일 대통령선거, 6월 8일 국회의원선거. 아직은 한국의 경제관료들과 KISA가 공식적 파트너로서 함께 끌어나가는 종합제철소 건설은 드세게 불어대는 ..이대환
미국 주도의 한국 제철사업을 못마땅해 했던 일본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9)]
미국 주도의 한국 제철사업을 못마땅해 했던 일본2014.10.29 (수)
1966년 1월 한국 대통령 박정희는 미국을 공식 방문한 기회에 다시 코퍼스사 회장 포이와 만났다. 국제차관단 구성에 속도를 내달라고 부탁하는 자리였다. 포이가 적극성을 보였다. 그래서 그해 2월 2일 한국 대통령과..이대환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내린 특명 "김기수의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8)]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내린 특명 "김기수의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라"2014.10.22 (수)
미국 코퍼스사(社) 대표 포이를 비롯한 서방 몇 개국의 철강업계 백인 기업가들과 한국정부의 경제부처 관료들이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한 문제를 놓고 기본적인 교감을 나누는 수준의 교섭을 벌이고 있던 1965년..이대환
이후락의 부탁으로 종합제철사업을 준비했던 신격호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7)]
이후락의 부탁으로 종합제철사업을 준비했던 신격호2014.10.20 (월)
1965년 가을부터 1966년 봄까지, 박태준이 박정희에게서 종합제철에 관한 특명을 받아 초보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그 언저리에는, 박태준 아닌 또 다른 한국인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해 도쿄의..이대환
가족 만나러 북한 갔다가 6년간 감옥생활했던 포스코 공신 김철우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6)]
가족 만나러 북한 갔다가 6년간 감옥생활했던 포스코 공신 김철우2014.10.16 (목)
1965년 여름, 뜨거운 서울거리를 한국사회의 격렬한 갈등이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6월 22일에 조인된 ‘한일조약’이 기폭제였다. 사정없고 거침없는 흑백논리가 세워졌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핵심으로 ..이대환
"나는 고속도로, 임자는 종합제철이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5)]
"나는 고속도로, 임자는 종합제철이야"2014.10.14 (화)
1965년 5월 초순, 박정희는 미국 존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방미 장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대한중석 경영 혁신에 몰두하고 있는 박태준이 박정희의 호출을 받았다. 대통령과 대한중석 사..이대환
박정희, 독일 제철소장에게 "저건 짓는데 얼마듭니까?" 꼼꼼히 물어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4)]
박정희, 독일 제철소장에게 "저건 짓는데 얼마듭니까?" 꼼꼼히 물어2014.10.13 (월)
철강은 ‘산업의 쌀’이며, 철강 없는 산업화는 없다. 이것은 대통령 이승만도 알고 있었다. 오랜 미국 망명생활에서 터득한 지식의 하나였다. 한국정부는 1955년부터 서서히 전후(戰後)의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면서 산업..이대환
박태준에게 대한중석 사장을 맡긴 박정희의 속내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3)]
박태준에게 대한중석 사장을 맡긴 박정희의 속내2014.10.10 (금)
박정희는 군대 시절부터 현장을 가장 중시했던 리더로 알려져 있다. 박태준도 현장제일주의 리더십을 철저히 실행한 최고경영자였다. 그러한 그의 특질은 대한중석 사장 시절부터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경영지표의 각종 수치가 ..이대환
김종필이 이후락 대신 박태준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앉히려 하자 이후락은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2)]
김종필이 이후락 대신 박태준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앉히려 하자 이후락은2014.10.06 (월)
1964년 12월 초, 서독(독일) 방문을 앞둔 박정희가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렀다.“대한중석을 맡아줘야겠어.”‘달러박스’ 대한중석. ‘정치’의 자리가 아니라 ‘경제’의 자리였다. 박태준은 마음을 열었다.“서독 갔다 ..이대환
일본 간 박태준, 6·25 덕에 사상 최고 호황 누리는 일본을 보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1)]
일본 간 박태준, 6·25 덕에 사상 최고 호황 누리는 일본을 보고2014.10.01 (수)
일본의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한국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그 천거의 무게와 명찰에 어울리는 인품과 언행을 보여야 하는 박태준은 1964년 1월 도쿄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오노가 일본 중의원 의장, 내각 ..이대환
매국노 역할을 맡긴 박정희, 떠맡은 박태준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0)]
매국노 역할을 맡긴 박정희, 떠맡은 박태준2014.09.26 (금)
“박태준이 왔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박태준이 한 번 더 고했다. 그래도 서재에 서 있는 박정희는 책을 찾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박태준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1964년 1월 1..이대환
박태준이 살아 이정현 당선을 봤다면?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9)]
박태준이 살아 이정현 당선을 봤다면?2014.09.24 (수)
1963년 9월 15일 대통령 후보 등록 마감, 법정 선거운동 기간은 한 달, 10월 15일 투표. ‘5‧16의 2년 6개월’에 대해 국민이 심판하는 선거는 예상대로 윤보선 후보와 박정희 후보의 치열한 각축전이었다...이대환
국회의원 출마 안하려고 박태준은 아내에게...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8)]
국회의원 출마 안하려고 박태준은 아내에게...2014.09.16 (화)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가 ‘내각제 폐지와 대통령중심제 채택’ 개헌안을 찬성했다. 1963년은 새해 벽두부터 ‘정치의 계절’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그해 8월 15일에 제3공화국 대통령 선거일을 10월 15..이대환
땔감 때문에 벌겋게 된 민둥산을 푸르게 만든 박태준의 묘안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7)]
땔감 때문에 벌겋게 된 민둥산을 푸르게 만든 박태준의 묘안2014.09.15 (월)
1960년대, 한국 야산들은 가난한 국민에게 땔감을 대는 고마운 창고였다. 겨울에는 더욱 그랬다. 삭정이도 솔방울도 낙엽도 귀중한 ‘가정 연료’였다. 농한기에 시골의 가장(家長)들은 장작을 패서 달구지에 싣고 장터로..이대환
박정희, 미국 차관 못얻어 울산제철 건설에 실패한 뒤 한이 맺히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6)]
박정희, 미국 차관 못얻어 울산제철 건설에 실패한 뒤 한이 맺히고2014.09.11 (목)
박태준은 1961년 세밑에 유럽으로 날아갔다. 구라파통상사절단 단장이었다. 최고위원은 혼자였다. 통상도 통상이거니와 선진국 산업현장을 견학할 좋은 기회였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을 진리로 신봉하는 그의 목적의식..이대환
경제개발 밑천이 없어 애가 탄 박정희, 미국-일본-서독으로...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5)]
경제개발 밑천이 없어 애가 탄 박정희, 미국-일본-서독으로...2014.09.02 (화)
1961년 11월 11일,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빼빼로 데이’라 부르는 그날, 박정희가 통치자로서 최초 해외 순방에 나선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러 일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와 만..이대환
박정희와 박태준, "아들 6명이 6-25 때 전사했다"는 사기꾼에 속아...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4)]
박정희와 박태준, "아들 6명이 6-25 때 전사했다"는 사기꾼에 속아...2014.08.28 (목)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엔간히 안정 기반을 다진 1961년 7월, 서울은 무더위에 갇혀 있었다. 그 여름의 어느 날, 비서실장 박태준은 가슴 아픈 사연을 들어야 했다. 함경북도 출신의 김 아무개 노인이 국군에 들어간 아들..이대환
한심했던 한국경제…박정희, 박태준을 경제 분야에 전진배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3)]
한심했던 한국경제…박정희, 박태준을 경제 분야에 전진배치2014.08.25 (월)
박정희는 호랑이 등에 완전히 올라탔다. 박태준도 그 뒤에 앉았다. 전진을 멈출 수도 스스로 내릴 수도 없는, 험난한 앞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실력이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이대환
박정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 자네에게..."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2)]
박정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 자네에게..."2014.08.21 (목)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태준은 전투복 차림으로 군화 끈을 졸라맸다. 그리고 대문까지 배웅을 나온 아내에게 묵직하게 말했다.“지금 나가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소. 그럴 때는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이대환
박정희 따라 대구 간 박태준, 신성일 집에서 하숙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1)]
박정희 따라 대구 간 박태준, 신성일 집에서 하숙2014.08.20 (수)
이철승은 유효한 줄이었다. 박정희는 ‘군복을 벗어야 하는 위기’를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곧 서울을 떠나야 했다. 그것은 거사의 공간에서 멀리 벗어나야 하는 괴로운 노릇이었다. 1961년 1월 박태준은 귀국..이대환
강제전역 위기에 몰린 박정희가 붙잡은 구명줄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0)]
강제전역 위기에 몰린 박정희가 붙잡은 구명줄2014.08.18 (월)
“광주로 같이 가자. 참모장을 맡아줘.”대취에서 깨어난 박정희의 제안에 담긴 의미를 박태준은 금세 알아차렸다. 최소한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을 깊이 신뢰하고 있다는 것, 또 하나는 좌천당한 울분과 과음의 후유증 ..이대환
박정희, 송요찬 계엄사령관에게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시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9)]
박정희, 송요찬 계엄사령관에게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시라"2014.08.14 (목)
4·19의 신선한 기풍이 군부에도 쇄신 바람을 일으켰다. 군부는 변해야 했다. 박정희는 박태준을 비롯한 핵심참모와 숙의하고 드디어 과감한 행동에 나선다. 그것은 1960년 5월 2일 송요찬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에..이대환
박정희와 박태준이 부산 동백섬에서 한 사나이간 맹세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8)]
박정희와 박태준이 부산 동백섬에서 한 사나이간 맹세2014.08.11 (월)
부산군수기지사령부 관사는 동래 온천장 동네였다. 이른 봄날에 박정희는 술집의 일차를 마치면 얼큰한 술기운 속에서 곧잘 자기 관사로 참모들을 몰고 갔다. 대화도 노래도 참으로 편한 장소였다. 관사로 가자, 나를 따르라..이대환
박정희, 참모들에게 "박태준을 술로 뻗게 하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7)]
박정희, 참모들에게 "박태준을 술로 뻗게 하라"2014.08.06 (수)
1958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시가행진 부대를 지휘하여 25사단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박태준은 1959년 3월 육군본부 인사처리과장으로 부임하여 그해 8월 미국 연수를 다녀온다. 9월 17일 귀국. 자리는 그대로..이대환
박태준, 가짜 고추가루 납품업자 얼굴에 권총을 겨누다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6)]
박태준, 가짜 고추가루 납품업자 얼굴에 권총을 겨누다2014.08.05 (화)
단 한 번, 박정희는 군대경력에서 박태준의 후배라는 기록을 남겼다. 육군대학이 그것이다. 1953년 11월 준장 진급 후 미국 육군 포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유학하고 광주포병학교 교장을 거쳐 5사단장으로 있던 박정희가 ..이대환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2014.07.29 (화)
“……견딜 수 없는 바를 견디고 참을 수 없는 바를 참아갑시다.” 일본 왕 히로히토의 저 목소리가 라디오 전파에 실린 것은 1945년 8월 15일 정오였다. 이른바 ‘무조건 항복’ 선언. 이것을 박태준은 일본 산골의..이대환
박정희가 재임 내내 박태준에게만은 독대 특혜를 준 사연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
박정희가 재임 내내 박태준에게만은 독대 특혜를 준 사연2014.07.25 (금)
1968년 4월 1일. 이 만우절에는 한국 현대사가 기록할 두 가지 ‘특별한 기념식’이 열렸다. 장소는 대전과 서울. 대전의 것은 거창하고, 서울의 것은 조촐했다. 다만 시작이 조촐하다 해서 미래도 그래야 한다는 ..이대환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마패를 준 까닭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마패를 준 까닭2014.07.21 (월)
<프롤로그> 왜 위대한 만남인가?(下) 1917년에 태어나 1979년에 생을 마친 박정희, 1927년에 태어나 2011년에 생을 마친 박태준. 십 년 차이로 이 험난한 땅에 태어나 공동의 운명을 짊어지고 ..이대환
박정희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라", 박태준은...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
박정희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라", 박태준은...2014.07.15 (화)
<프롤로그> 왜 위대한 만남인가?(中) 정치냐 경제냐, 이 갈림길이 박태준의 눈앞에 나타난 때는 1963년 9월이었다.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강의실에서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난 박정희..이대환
박정희의 과(過)에 박태준이 연루되지 않는 이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
박정희의 과(過)에 박태준이 연루되지 않는 이유2014.07.08 (화)
진정한 신뢰로 위대한 일을 창조한 ‘롤 모델’이 우리 권력동네엔 없는가? ‘박정희와 박태준’이 답할 것이다. 한국산업화의 강건한 견인차였던 포항종합제철, 지난 3일로 준공 41주년을 맞았다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5)]
박태준의 철판과 정주영의 배가 만나는 순간2015.01.19 (월)
1970년 4월 1일 오후 3시. 영일만 모래벌판에서 천둥 같은 폭발음과 함께 오색찬란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지반을 다지기 위해 항타기로 파일을 두들겨 박는 굉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1961년부터 박정희가 꿈꿔..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4)]
박태준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죽어야 합니다"2015.01.16 (금)
1970년과 1970년대의 개막을 한꺼번에 알리는 붉은 햇덩이가 영일만 수평선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쇳물, 바로 그 빛깔이었다. 한국 산업화 역사에서 1970년 새해에 기록할 쾌거는 마침내 종합제철 건설의 막을 올..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3)]
박태준에게 "뭐든 배워오면 국가를 위해 쓰일 날이 온다"고 했던 박정희2015.01.12 (월)
아카자와 쇼이치가 인솔한 일본조사단이 포항을 다녀간 1969년 9월 중순, 박태준은 포스코 내에 ‘건설기획조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조직은 설계 및 공정 기획, 시공업체와 계약업무 조정, 예산 통제, 설비구매 기획..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1)]
박태준의 발품에 감동한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2015.01.02 (금)
박태준은 도리없이 또다시 김포공항으로 달려갔다. 오직 ‘일응’이라는 두 글자의 일본어(한자)를 빼기 위하여. 그러나 그것이 ‘마라톤 같은 장정’이 될 것이라는 예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태준은 도쿄에 닿기 바..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0)]
기술협약서 한장 위해 일본 철강업계에 3번이나 머리를 조아린 박태준2014.12.31 (수)
8월 22일 일본철강연맹은 이나야마 회장의 주선으로 ‘한국제철소건설협력위원회’를 구성했다. 일본 철강회사들과 종합상사들로 구성한 이 위원회는 설계‧건설의 기술지원과 기자재 선정의 협력을 위한 조직이었다. 이날 일본정..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9)]
종합제철소 자금조달의 마지막 난관을 넘다2014.12.29 (월)
1969년 8월 15일, 아이치 외무상이 한국 광복절을 축하하듯 기자회견을 통해 외무성 대장성 통산성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합동회의를 한 결과 대일청구권자금 전용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가 이루어졌고 22일 일..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8)]
박태준 "일본을 이기려면..."2014.12.26 (금)
8월의 도쿄는 서울보다 뜨거웠다. 박태준은 맨 먼저 야스오카를 찾아간다. 포철에 대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언약도 해주고 서신도 보내준 이나야마를 또다시 찾아가는 이번 길에도 박철언, 야기 노부오와 함께 야스오카의..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7)]
박태준이 3선 개헌 서명을 거부하자 박정희는...2014.12.22 (월)
한국 정부가 KISA에 휘둘리고 있어서 포스코는 착공 시기조차 예측할 수 없었던 1969년 4월, 국내 정치적 상황은 갈등과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해 1월 여당(공화당)이 박정희의 3선을 허용하는 개헌을 검토한..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6)]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 박정희2014.12.16 (화)
1969년 4월의 IECOK 파리 총회가 포항종합제철 건설 차관 제공에 대해 ‘불가’를 결정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경제성이 결여되었다, 둘째는 한국의 외채 증가로 상환 능력이 없다. 박태준은 첫째 이유에 분..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5)]
박정희와 대화를 끝까지 발설않고 지킨 박태준2014.12.11 (목)
대일청구권자금의 포철 전용에 대한 오원철의 회고도 짚어봐야 한다.1928년에 태어난 오원철은 1957년 시발자동차 공장장을 지낸 경력이 보여주듯 엔지니어 출신으로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을 ..이대환
폭설에도 비행기 타고 협상하러 미국간 박태준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4)]
폭설에도 비행기 타고 협상하러 미국간 박태준2014.12.05 (금)
1969년 2월 박태준이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자금 여분을 포항제철 1기 건설비로 전용하자는 아이디어에 착안했고, 박정희가 그것을 재가했다. 이를 포스코는 ‘하와이 구상의 실현’이라고 한다. ‘하와이 구상’이라는 명명..이대환
박정희가 대일청구권 자금의 포철 전용 구상을 비밀에 붙인 이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3)]
박정희가 대일청구권 자금의 포철 전용 구상을 비밀에 붙인 이유2014.12.03 (수)
대일청구권자금의 포항종합제철 건설비 전용, 1969년 2월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구원의 밧줄처럼 거머쥔 박태준의 착안에 대한 박정희의 승인과 재가. 뒷날에 포스코 사람들은 ‘하와이 구상’이라 명명한다. 그것은 한..이대환
미국 자금줄이 막힌 박태준에게 번뜩 떠오른 기발한 생각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2)]
미국 자금줄이 막힌 박태준에게 번뜩 떠오른 기발한 생각2014.12.01 (월)
박태준은 포이에게 심야 결례의 이해부터 구했다. 포이는 기분이 상한 표정은 아니었다. 한국어 바이블에 등장하는 단어를 빌리자면 ‘젊고 가난한’ 한국인 사장을 ‘긍휼히’ 여기는 것 같았다. “박 사장님, 하고 싶은 ..이대환
일본 정부 "포철 건설 말고 일본 제품 사가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1)]
일본 정부 "포철 건설 말고 일본 제품 사가라"2014.11.28 (금)
박태준은 미국 피츠버그로 가기 위해 서울을 출발했다. 그날은 1969년 1월 31일이었다. 폭설에 덮인 김포공항. 간신히 확보한 활주로가 있어 대한항공은 뜬다고 했다. 경제팀 관료로는 정문도 경제기획원 차관보, 포스..이대환
건설차관 조달 위해 미국으로 가기전 박태준이 내린 엄청난 결정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0)]
건설차관 조달 위해 미국으로 가기전 박태준이 내린 엄청난 결정2014.11.26 (수)
해가 바뀌었다. 1969년 새해. ‘해를 맞이하는 만’이라는 뜻의 영일만(迎日灣), 그 수평선 위로 쇳물 빛깔의 붉은 해가 힘차게 솟아올랐다. 포항종합제철 고로에서 그 태양 빛깔의 쇳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 쇳물이 한..이대환
포철 건설현장을 첫 방문한 박정희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거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9)]
포철 건설현장을 첫 방문한 박정희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거야?"2014.11.24 (월)
1968년 11월 5일 박태준은 모처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 31일 KISA에 제안했던 GEP 수정 협상안이 지루한 협의를 거쳐 일괄 타결되었다는 것. 공장 일반배치의 변경에 소요되는 비용 88만5000..이대환
공장 건설에 앞서 은행 빚내서 좋은 사원주택부터 짓다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8)]
공장 건설에 앞서 은행 빚내서 좋은 사원주택부터 짓다2014.11.20 (목)
철거민의 이주 행렬, 수녀원과 고아원의 폭파를 지켜보는 포항시민이 포항종합제철 건설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1968년 여름, 실상 포스코의 미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KISA와 일반기술계획(GEP)의 문제점들에 ..이대환
육영수, 포스코에 밀려나는 고아원의 이주비를 지원하다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7)]
육영수, 포스코에 밀려나는 고아원의 이주비를 지원하다2014.11.17 (월)
2005년 가을이었다. 아흔한 살의 김벨라뎃다 수녀는 사십대 중반의 작가(이대환) 앞에서 저 아득한 37년 전에 포항종합제철을 위해 터전을 내줘야 했던 그때 그 희붐해진 기억을 더듬다 말고 문득 소녀 같은 미소를 머..이대환
포스코 부지에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집이 들어선 사연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6)]
포스코 부지에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집이 들어선 사연2014.11.14 (금)
1967년 여름에 이미 KISA를 ‘어중이떠중이 장사치들의 집합’이라고 의심했던 박태준. 가난한 한국정부에 차관도입이나 공장설립을 주선해온 공로를 앞세우며 KISA의 거간꾼 노릇까지 하고 있는 아이젠버그. 1968년..이대환
구미 철강사들이 한국에 싸구려 시설을 떠넘기려 하자 박태준은 분노하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5)]
구미 철강사들이 한국에 싸구려 시설을 떠넘기려 하자 박태준은 분노하고2014.11.13 (목)
박태준은 진작부터 대한중석 인재들을 종합제철로 데려갈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불확실한 쪽을 택해야 하는 그들에게 그는 힘차게 말했다. “대한민국도 이제 밥 먹고 사는 것은 별 문제가..이대환
박정희도 꺽지 못한 박태준의 고집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4)]
박정희도 꺽지 못한 박태준의 고집2014.11.10 (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특공대가 청와대 턱밑까지 잠입했다가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이른바 1‧21사태가 발발했으나, 박정희는 흔들림 없이 국정을 챙기는 가운데 1월 25일 대통령령에 의거해 ‘종합..이대환
마침내 박태준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 박정희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3)]
마침내 박태준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 박정희2014.11.07 (금)
박정희는 장기영의 후임으로 상공부장관 박충훈을 경제기획원 부총리에 발탁했다. 박충훈은 그동안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에도 깊숙이 관여해온 관료였다. 1967년 10월 12일 박충훈의 경제팀(한국정부)이 KISA와 종합..이대환
이병철이 박태준에게 준 선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2)]
이병철이 박태준에게 준 선물2014.11.06 (목)
10월 3일 종합제철 기공식. 5·16 이후부터만 꼽아도 장장 6년 넘게 끌어온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이 마침내 출발의 팡파르만 남겨둔 것 같았다. KISA 계획안을 검토하느라 시일을 끌어온 데다 KISA마저 느긋하게..이대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1)]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2014.11.03 (월)
KISA가 다시 약속한 ‘기본협정 체결과 착공의 7월’을 맞았다. 그러나 7월이 다 지나도 한국정부와 KISA는 기본협정조차 체결하지 못했다. 초조한 쪽은 한국정부, 특히 대통령 박정희였다. KISA와 기본협정을 체..이대환
제철소 부지로 포항을 염두에 둔 박정희, 반대파를 꺾기 위해...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0)]
제철소 부지로 포항을 염두에 둔 박정희, 반대파를 꺾기 위해...2014.10.31 (금)
1967년 상반기 한국에는 ‘선거 바람’이 드세게 불었다. 5월 11일 대통령선거, 6월 8일 국회의원선거. 아직은 한국의 경제관료들과 KISA가 공식적 파트너로서 함께 끌어나가는 종합제철소 건설은 드세게 불어대는 ..이대환
미국 주도의 한국 제철사업을 못마땅해 했던 일본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9)]
미국 주도의 한국 제철사업을 못마땅해 했던 일본2014.10.29 (수)
1966년 1월 한국 대통령 박정희는 미국을 공식 방문한 기회에 다시 코퍼스사 회장 포이와 만났다. 국제차관단 구성에 속도를 내달라고 부탁하는 자리였다. 포이가 적극성을 보였다. 그래서 그해 2월 2일 한국 대통령과..이대환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내린 특명 "김기수의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8)]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내린 특명 "김기수의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라"2014.10.22 (수)
미국 코퍼스사(社) 대표 포이를 비롯한 서방 몇 개국의 철강업계 백인 기업가들과 한국정부의 경제부처 관료들이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한 문제를 놓고 기본적인 교감을 나누는 수준의 교섭을 벌이고 있던 1965년..이대환
이후락의 부탁으로 종합제철사업을 준비했던 신격호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7)]
이후락의 부탁으로 종합제철사업을 준비했던 신격호2014.10.20 (월)
1965년 가을부터 1966년 봄까지, 박태준이 박정희에게서 종합제철에 관한 특명을 받아 초보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그 언저리에는, 박태준 아닌 또 다른 한국인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해 도쿄의..이대환
가족 만나러 북한 갔다가 6년간 감옥생활했던 포스코 공신 김철우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6)]
가족 만나러 북한 갔다가 6년간 감옥생활했던 포스코 공신 김철우2014.10.16 (목)
1965년 여름, 뜨거운 서울거리를 한국사회의 격렬한 갈등이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6월 22일에 조인된 ‘한일조약’이 기폭제였다. 사정없고 거침없는 흑백논리가 세워졌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핵심으로 ..이대환
"나는 고속도로, 임자는 종합제철이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5)]
"나는 고속도로, 임자는 종합제철이야"2014.10.14 (화)
1965년 5월 초순, 박정희는 미국 존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방미 장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대한중석 경영 혁신에 몰두하고 있는 박태준이 박정희의 호출을 받았다. 대통령과 대한중석 사..이대환
박정희, 독일 제철소장에게 "저건 짓는데 얼마듭니까?" 꼼꼼히 물어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4)]
박정희, 독일 제철소장에게 "저건 짓는데 얼마듭니까?" 꼼꼼히 물어2014.10.13 (월)
철강은 ‘산업의 쌀’이며, 철강 없는 산업화는 없다. 이것은 대통령 이승만도 알고 있었다. 오랜 미국 망명생활에서 터득한 지식의 하나였다. 한국정부는 1955년부터 서서히 전후(戰後)의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면서 산업..이대환
박태준에게 대한중석 사장을 맡긴 박정희의 속내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3)]
박태준에게 대한중석 사장을 맡긴 박정희의 속내2014.10.10 (금)
박정희는 군대 시절부터 현장을 가장 중시했던 리더로 알려져 있다. 박태준도 현장제일주의 리더십을 철저히 실행한 최고경영자였다. 그러한 그의 특질은 대한중석 사장 시절부터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경영지표의 각종 수치가 ..이대환
김종필이 이후락 대신 박태준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앉히려 하자 이후락은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2)]
김종필이 이후락 대신 박태준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앉히려 하자 이후락은2014.10.06 (월)
1964년 12월 초, 서독(독일) 방문을 앞둔 박정희가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렀다.“대한중석을 맡아줘야겠어.”‘달러박스’ 대한중석. ‘정치’의 자리가 아니라 ‘경제’의 자리였다. 박태준은 마음을 열었다.“서독 갔다 ..이대환
일본 간 박태준, 6·25 덕에 사상 최고 호황 누리는 일본을 보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1)]
일본 간 박태준, 6·25 덕에 사상 최고 호황 누리는 일본을 보고2014.10.01 (수)
일본의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한국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그 천거의 무게와 명찰에 어울리는 인품과 언행을 보여야 하는 박태준은 1964년 1월 도쿄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오노가 일본 중의원 의장, 내각 ..이대환
매국노 역할을 맡긴 박정희, 떠맡은 박태준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0)]
매국노 역할을 맡긴 박정희, 떠맡은 박태준2014.09.26 (금)
“박태준이 왔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박태준이 한 번 더 고했다. 그래도 서재에 서 있는 박정희는 책을 찾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박태준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1964년 1월 1..이대환
박태준이 살아 이정현 당선을 봤다면?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9)]
박태준이 살아 이정현 당선을 봤다면?2014.09.24 (수)
1963년 9월 15일 대통령 후보 등록 마감, 법정 선거운동 기간은 한 달, 10월 15일 투표. ‘5‧16의 2년 6개월’에 대해 국민이 심판하는 선거는 예상대로 윤보선 후보와 박정희 후보의 치열한 각축전이었다...이대환
국회의원 출마 안하려고 박태준은 아내에게...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8)]
국회의원 출마 안하려고 박태준은 아내에게...2014.09.16 (화)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가 ‘내각제 폐지와 대통령중심제 채택’ 개헌안을 찬성했다. 1963년은 새해 벽두부터 ‘정치의 계절’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그해 8월 15일에 제3공화국 대통령 선거일을 10월 15..이대환
땔감 때문에 벌겋게 된 민둥산을 푸르게 만든 박태준의 묘안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7)]
땔감 때문에 벌겋게 된 민둥산을 푸르게 만든 박태준의 묘안2014.09.15 (월)
1960년대, 한국 야산들은 가난한 국민에게 땔감을 대는 고마운 창고였다. 겨울에는 더욱 그랬다. 삭정이도 솔방울도 낙엽도 귀중한 ‘가정 연료’였다. 농한기에 시골의 가장(家長)들은 장작을 패서 달구지에 싣고 장터로..이대환
박정희, 미국 차관 못얻어 울산제철 건설에 실패한 뒤 한이 맺히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6)]
박정희, 미국 차관 못얻어 울산제철 건설에 실패한 뒤 한이 맺히고2014.09.11 (목)
박태준은 1961년 세밑에 유럽으로 날아갔다. 구라파통상사절단 단장이었다. 최고위원은 혼자였다. 통상도 통상이거니와 선진국 산업현장을 견학할 좋은 기회였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을 진리로 신봉하는 그의 목적의식..이대환
경제개발 밑천이 없어 애가 탄 박정희, 미국-일본-서독으로...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5)]
경제개발 밑천이 없어 애가 탄 박정희, 미국-일본-서독으로...2014.09.02 (화)
1961년 11월 11일,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빼빼로 데이’라 부르는 그날, 박정희가 통치자로서 최초 해외 순방에 나선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러 일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와 만..이대환
박정희와 박태준, "아들 6명이 6-25 때 전사했다"는 사기꾼에 속아...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4)]
박정희와 박태준, "아들 6명이 6-25 때 전사했다"는 사기꾼에 속아...2014.08.28 (목)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엔간히 안정 기반을 다진 1961년 7월, 서울은 무더위에 갇혀 있었다. 그 여름의 어느 날, 비서실장 박태준은 가슴 아픈 사연을 들어야 했다. 함경북도 출신의 김 아무개 노인이 국군에 들어간 아들..이대환
한심했던 한국경제…박정희, 박태준을 경제 분야에 전진배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3)]
한심했던 한국경제…박정희, 박태준을 경제 분야에 전진배치2014.08.25 (월)
박정희는 호랑이 등에 완전히 올라탔다. 박태준도 그 뒤에 앉았다. 전진을 멈출 수도 스스로 내릴 수도 없는, 험난한 앞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실력이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이대환
박정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 자네에게..."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2)]
박정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 자네에게..."2014.08.21 (목)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태준은 전투복 차림으로 군화 끈을 졸라맸다. 그리고 대문까지 배웅을 나온 아내에게 묵직하게 말했다.“지금 나가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소. 그럴 때는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이대환
박정희 따라 대구 간 박태준, 신성일 집에서 하숙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1)]
박정희 따라 대구 간 박태준, 신성일 집에서 하숙2014.08.20 (수)
이철승은 유효한 줄이었다. 박정희는 ‘군복을 벗어야 하는 위기’를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곧 서울을 떠나야 했다. 그것은 거사의 공간에서 멀리 벗어나야 하는 괴로운 노릇이었다. 1961년 1월 박태준은 귀국..이대환
강제전역 위기에 몰린 박정희가 붙잡은 구명줄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0)]
강제전역 위기에 몰린 박정희가 붙잡은 구명줄2014.08.18 (월)
“광주로 같이 가자. 참모장을 맡아줘.”대취에서 깨어난 박정희의 제안에 담긴 의미를 박태준은 금세 알아차렸다. 최소한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을 깊이 신뢰하고 있다는 것, 또 하나는 좌천당한 울분과 과음의 후유증 ..이대환
박정희, 송요찬 계엄사령관에게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시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9)]
박정희, 송요찬 계엄사령관에게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시라"2014.08.14 (목)
4·19의 신선한 기풍이 군부에도 쇄신 바람을 일으켰다. 군부는 변해야 했다. 박정희는 박태준을 비롯한 핵심참모와 숙의하고 드디어 과감한 행동에 나선다. 그것은 1960년 5월 2일 송요찬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에..이대환
박정희와 박태준이 부산 동백섬에서 한 사나이간 맹세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8)]
박정희와 박태준이 부산 동백섬에서 한 사나이간 맹세2014.08.11 (월)
부산군수기지사령부 관사는 동래 온천장 동네였다. 이른 봄날에 박정희는 술집의 일차를 마치면 얼큰한 술기운 속에서 곧잘 자기 관사로 참모들을 몰고 갔다. 대화도 노래도 참으로 편한 장소였다. 관사로 가자, 나를 따르라..이대환
박정희, 참모들에게 "박태준을 술로 뻗게 하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7)]
박정희, 참모들에게 "박태준을 술로 뻗게 하라"2014.08.06 (수)
1958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시가행진 부대를 지휘하여 25사단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박태준은 1959년 3월 육군본부 인사처리과장으로 부임하여 그해 8월 미국 연수를 다녀온다. 9월 17일 귀국. 자리는 그대로..이대환
박태준, 가짜 고추가루 납품업자 얼굴에 권총을 겨누다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6)]
박태준, 가짜 고추가루 납품업자 얼굴에 권총을 겨누다2014.08.05 (화)
단 한 번, 박정희는 군대경력에서 박태준의 후배라는 기록을 남겼다. 육군대학이 그것이다. 1953년 11월 준장 진급 후 미국 육군 포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유학하고 광주포병학교 교장을 거쳐 5사단장으로 있던 박정희가 ..이대환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2014.07.29 (화)
“……견딜 수 없는 바를 견디고 참을 수 없는 바를 참아갑시다.” 일본 왕 히로히토의 저 목소리가 라디오 전파에 실린 것은 1945년 8월 15일 정오였다. 이른바 ‘무조건 항복’ 선언. 이것을 박태준은 일본 산골의..이대환
박정희가 재임 내내 박태준에게만은 독대 특혜를 준 사연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
박정희가 재임 내내 박태준에게만은 독대 특혜를 준 사연2014.07.25 (금)
1968년 4월 1일. 이 만우절에는 한국 현대사가 기록할 두 가지 ‘특별한 기념식’이 열렸다. 장소는 대전과 서울. 대전의 것은 거창하고, 서울의 것은 조촐했다. 다만 시작이 조촐하다 해서 미래도 그래야 한다는 ..이대환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마패를 준 까닭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마패를 준 까닭2014.07.21 (월)
<프롤로그> 왜 위대한 만남인가?(下) 1917년에 태어나 1979년에 생을 마친 박정희, 1927년에 태어나 2011년에 생을 마친 박태준. 십 년 차이로 이 험난한 땅에 태어나 공동의 운명을 짊어지고 ..이대환
박정희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라", 박태준은...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
박정희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라", 박태준은...2014.07.15 (화)
<프롤로그> 왜 위대한 만남인가?(中) 정치냐 경제냐, 이 갈림길이 박태준의 눈앞에 나타난 때는 1963년 9월이었다.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강의실에서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난 박정희..이대환
박정희의 과(過)에 박태준이 연루되지 않는 이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
박정희의 과(過)에 박태준이 연루되지 않는 이유2014.07.08 (화)
진정한 신뢰로 위대한 일을 창조한 ‘롤 모델’이 우리 권력동네엔 없는가? ‘박정희와 박태준’이 답할 것이다. 한국산업화의 강건한 견인차였던 포항종합제철, 지난 3일로 준공 41주년을 맞았다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5)]
박태준의 철판과 정주영의 배가 만나는 순간2015.01.19 (월)
1970년 4월 1일 오후 3시. 영일만 모래벌판에서 천둥 같은 폭발음과 함께 오색찬란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지반을 다지기 위해 항타기로 파일을 두들겨 박는 굉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1961년부터 박정희가 꿈꿔..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4)]
박태준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죽어야 합니다"2015.01.16 (금)
1970년과 1970년대의 개막을 한꺼번에 알리는 붉은 햇덩이가 영일만 수평선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쇳물, 바로 그 빛깔이었다. 한국 산업화 역사에서 1970년 새해에 기록할 쾌거는 마침내 종합제철 건설의 막을 올..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3)]
박태준에게 "뭐든 배워오면 국가를 위해 쓰일 날이 온다"고 했던 박정희2015.01.12 (월)
아카자와 쇼이치가 인솔한 일본조사단이 포항을 다녀간 1969년 9월 중순, 박태준은 포스코 내에 ‘건설기획조정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조직은 설계 및 공정 기획, 시공업체와 계약업무 조정, 예산 통제, 설비구매 기획..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1)]
박태준의 발품에 감동한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2015.01.02 (금)
박태준은 도리없이 또다시 김포공항으로 달려갔다. 오직 ‘일응’이라는 두 글자의 일본어(한자)를 빼기 위하여. 그러나 그것이 ‘마라톤 같은 장정’이 될 것이라는 예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태준은 도쿄에 닿기 바..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0)]
기술협약서 한장 위해 일본 철강업계에 3번이나 머리를 조아린 박태준2014.12.31 (수)
8월 22일 일본철강연맹은 이나야마 회장의 주선으로 ‘한국제철소건설협력위원회’를 구성했다. 일본 철강회사들과 종합상사들로 구성한 이 위원회는 설계‧건설의 기술지원과 기자재 선정의 협력을 위한 조직이었다. 이날 일본정..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9)]
종합제철소 자금조달의 마지막 난관을 넘다2014.12.29 (월)
1969년 8월 15일, 아이치 외무상이 한국 광복절을 축하하듯 기자회견을 통해 외무성 대장성 통산성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합동회의를 한 결과 대일청구권자금 전용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가 이루어졌고 22일 일..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8)]
박태준 "일본을 이기려면..."2014.12.26 (금)
8월의 도쿄는 서울보다 뜨거웠다. 박태준은 맨 먼저 야스오카를 찾아간다. 포철에 대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언약도 해주고 서신도 보내준 이나야마를 또다시 찾아가는 이번 길에도 박철언, 야기 노부오와 함께 야스오카의..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7)]
박태준이 3선 개헌 서명을 거부하자 박정희는...2014.12.22 (월)
한국 정부가 KISA에 휘둘리고 있어서 포스코는 착공 시기조차 예측할 수 없었던 1969년 4월, 국내 정치적 상황은 갈등과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해 1월 여당(공화당)이 박정희의 3선을 허용하는 개헌을 검토한..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6)]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 박정희2014.12.16 (화)
1969년 4월의 IECOK 파리 총회가 포항종합제철 건설 차관 제공에 대해 ‘불가’를 결정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경제성이 결여되었다, 둘째는 한국의 외채 증가로 상환 능력이 없다. 박태준은 첫째 이유에 분..이대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5)]
박정희와 대화를 끝까지 발설않고 지킨 박태준2014.12.11 (목)
대일청구권자금의 포철 전용에 대한 오원철의 회고도 짚어봐야 한다.1928년에 태어난 오원철은 1957년 시발자동차 공장장을 지낸 경력이 보여주듯 엔지니어 출신으로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을 ..이대환
폭설에도 비행기 타고 협상하러 미국간 박태준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4)]
폭설에도 비행기 타고 협상하러 미국간 박태준2014.12.05 (금)
1969년 2월 박태준이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자금 여분을 포항제철 1기 건설비로 전용하자는 아이디어에 착안했고, 박정희가 그것을 재가했다. 이를 포스코는 ‘하와이 구상의 실현’이라고 한다. ‘하와이 구상’이라는 명명..이대환
박정희가 대일청구권 자금의 포철 전용 구상을 비밀에 붙인 이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3)]
박정희가 대일청구권 자금의 포철 전용 구상을 비밀에 붙인 이유2014.12.03 (수)
대일청구권자금의 포항종합제철 건설비 전용, 1969년 2월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구원의 밧줄처럼 거머쥔 박태준의 착안에 대한 박정희의 승인과 재가. 뒷날에 포스코 사람들은 ‘하와이 구상’이라 명명한다. 그것은 한..이대환
미국 자금줄이 막힌 박태준에게 번뜩 떠오른 기발한 생각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2)]
미국 자금줄이 막힌 박태준에게 번뜩 떠오른 기발한 생각2014.12.01 (월)
박태준은 포이에게 심야 결례의 이해부터 구했다. 포이는 기분이 상한 표정은 아니었다. 한국어 바이블에 등장하는 단어를 빌리자면 ‘젊고 가난한’ 한국인 사장을 ‘긍휼히’ 여기는 것 같았다. “박 사장님, 하고 싶은 ..이대환
일본 정부 "포철 건설 말고 일본 제품 사가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1)]
일본 정부 "포철 건설 말고 일본 제품 사가라"2014.11.28 (금)
박태준은 미국 피츠버그로 가기 위해 서울을 출발했다. 그날은 1969년 1월 31일이었다. 폭설에 덮인 김포공항. 간신히 확보한 활주로가 있어 대한항공은 뜬다고 했다. 경제팀 관료로는 정문도 경제기획원 차관보, 포스..이대환
건설차관 조달 위해 미국으로 가기전 박태준이 내린 엄청난 결정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0)]
건설차관 조달 위해 미국으로 가기전 박태준이 내린 엄청난 결정2014.11.26 (수)
해가 바뀌었다. 1969년 새해. ‘해를 맞이하는 만’이라는 뜻의 영일만(迎日灣), 그 수평선 위로 쇳물 빛깔의 붉은 해가 힘차게 솟아올랐다. 포항종합제철 고로에서 그 태양 빛깔의 쇳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 쇳물이 한..이대환
포철 건설현장을 첫 방문한 박정희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거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9)]
포철 건설현장을 첫 방문한 박정희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거야?"2014.11.24 (월)
1968년 11월 5일 박태준은 모처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 31일 KISA에 제안했던 GEP 수정 협상안이 지루한 협의를 거쳐 일괄 타결되었다는 것. 공장 일반배치의 변경에 소요되는 비용 88만5000..이대환
공장 건설에 앞서 은행 빚내서 좋은 사원주택부터 짓다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8)]
공장 건설에 앞서 은행 빚내서 좋은 사원주택부터 짓다2014.11.20 (목)
철거민의 이주 행렬, 수녀원과 고아원의 폭파를 지켜보는 포항시민이 포항종합제철 건설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1968년 여름, 실상 포스코의 미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KISA와 일반기술계획(GEP)의 문제점들에 ..이대환
육영수, 포스코에 밀려나는 고아원의 이주비를 지원하다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7)]
육영수, 포스코에 밀려나는 고아원의 이주비를 지원하다2014.11.17 (월)
2005년 가을이었다. 아흔한 살의 김벨라뎃다 수녀는 사십대 중반의 작가(이대환) 앞에서 저 아득한 37년 전에 포항종합제철을 위해 터전을 내줘야 했던 그때 그 희붐해진 기억을 더듬다 말고 문득 소녀 같은 미소를 머..이대환
포스코 부지에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집이 들어선 사연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6)]
포스코 부지에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집이 들어선 사연2014.11.14 (금)
1967년 여름에 이미 KISA를 ‘어중이떠중이 장사치들의 집합’이라고 의심했던 박태준. 가난한 한국정부에 차관도입이나 공장설립을 주선해온 공로를 앞세우며 KISA의 거간꾼 노릇까지 하고 있는 아이젠버그. 1968년..이대환
구미 철강사들이 한국에 싸구려 시설을 떠넘기려 하자 박태준은 분노하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5)]
구미 철강사들이 한국에 싸구려 시설을 떠넘기려 하자 박태준은 분노하고2014.11.13 (목)
박태준은 진작부터 대한중석 인재들을 종합제철로 데려갈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불확실한 쪽을 택해야 하는 그들에게 그는 힘차게 말했다. “대한민국도 이제 밥 먹고 사는 것은 별 문제가..이대환
박정희도 꺽지 못한 박태준의 고집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4)]
박정희도 꺽지 못한 박태준의 고집2014.11.10 (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특공대가 청와대 턱밑까지 잠입했다가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이른바 1‧21사태가 발발했으나, 박정희는 흔들림 없이 국정을 챙기는 가운데 1월 25일 대통령령에 의거해 ‘종합..이대환
마침내 박태준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 박정희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3)]
마침내 박태준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 박정희2014.11.07 (금)
박정희는 장기영의 후임으로 상공부장관 박충훈을 경제기획원 부총리에 발탁했다. 박충훈은 그동안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에도 깊숙이 관여해온 관료였다. 1967년 10월 12일 박충훈의 경제팀(한국정부)이 KISA와 종합..이대환
이병철이 박태준에게 준 선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2)]
이병철이 박태준에게 준 선물2014.11.06 (목)
10월 3일 종합제철 기공식. 5·16 이후부터만 꼽아도 장장 6년 넘게 끌어온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이 마침내 출발의 팡파르만 남겨둔 것 같았다. KISA 계획안을 검토하느라 시일을 끌어온 데다 KISA마저 느긋하게..이대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1)]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2014.11.03 (월)
KISA가 다시 약속한 ‘기본협정 체결과 착공의 7월’을 맞았다. 그러나 7월이 다 지나도 한국정부와 KISA는 기본협정조차 체결하지 못했다. 초조한 쪽은 한국정부, 특히 대통령 박정희였다. KISA와 기본협정을 체..이대환
제철소 부지로 포항을 염두에 둔 박정희, 반대파를 꺾기 위해...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0)]
제철소 부지로 포항을 염두에 둔 박정희, 반대파를 꺾기 위해...2014.10.31 (금)
1967년 상반기 한국에는 ‘선거 바람’이 드세게 불었다. 5월 11일 대통령선거, 6월 8일 국회의원선거. 아직은 한국의 경제관료들과 KISA가 공식적 파트너로서 함께 끌어나가는 종합제철소 건설은 드세게 불어대는 ..이대환
미국 주도의 한국 제철사업을 못마땅해 했던 일본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9)]
미국 주도의 한국 제철사업을 못마땅해 했던 일본2014.10.29 (수)
1966년 1월 한국 대통령 박정희는 미국을 공식 방문한 기회에 다시 코퍼스사 회장 포이와 만났다. 국제차관단 구성에 속도를 내달라고 부탁하는 자리였다. 포이가 적극성을 보였다. 그래서 그해 2월 2일 한국 대통령과..이대환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내린 특명 "김기수의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8)]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내린 특명 "김기수의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라"2014.10.22 (수)
미국 코퍼스사(社) 대표 포이를 비롯한 서방 몇 개국의 철강업계 백인 기업가들과 한국정부의 경제부처 관료들이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한 문제를 놓고 기본적인 교감을 나누는 수준의 교섭을 벌이고 있던 1965년..이대환
이후락의 부탁으로 종합제철사업을 준비했던 신격호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7)]
이후락의 부탁으로 종합제철사업을 준비했던 신격호2014.10.20 (월)
1965년 가을부터 1966년 봄까지, 박태준이 박정희에게서 종합제철에 관한 특명을 받아 초보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그 언저리에는, 박태준 아닌 또 다른 한국인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해 도쿄의..이대환
가족 만나러 북한 갔다가 6년간 감옥생활했던 포스코 공신 김철우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6)]
가족 만나러 북한 갔다가 6년간 감옥생활했던 포스코 공신 김철우2014.10.16 (목)
1965년 여름, 뜨거운 서울거리를 한국사회의 격렬한 갈등이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6월 22일에 조인된 ‘한일조약’이 기폭제였다. 사정없고 거침없는 흑백논리가 세워졌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핵심으로 ..이대환
"나는 고속도로, 임자는 종합제철이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5)]
"나는 고속도로, 임자는 종합제철이야"2014.10.14 (화)
1965년 5월 초순, 박정희는 미국 존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방미 장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대한중석 경영 혁신에 몰두하고 있는 박태준이 박정희의 호출을 받았다. 대통령과 대한중석 사..이대환
박정희, 독일 제철소장에게 "저건 짓는데 얼마듭니까?" 꼼꼼히 물어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4)]
박정희, 독일 제철소장에게 "저건 짓는데 얼마듭니까?" 꼼꼼히 물어2014.10.13 (월)
철강은 ‘산업의 쌀’이며, 철강 없는 산업화는 없다. 이것은 대통령 이승만도 알고 있었다. 오랜 미국 망명생활에서 터득한 지식의 하나였다. 한국정부는 1955년부터 서서히 전후(戰後)의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면서 산업..이대환
박태준에게 대한중석 사장을 맡긴 박정희의 속내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3)]
박태준에게 대한중석 사장을 맡긴 박정희의 속내2014.10.10 (금)
박정희는 군대 시절부터 현장을 가장 중시했던 리더로 알려져 있다. 박태준도 현장제일주의 리더십을 철저히 실행한 최고경영자였다. 그러한 그의 특질은 대한중석 사장 시절부터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경영지표의 각종 수치가 ..이대환
김종필이 이후락 대신 박태준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앉히려 하자 이후락은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2)]
김종필이 이후락 대신 박태준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앉히려 하자 이후락은2014.10.06 (월)
1964년 12월 초, 서독(독일) 방문을 앞둔 박정희가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렀다.“대한중석을 맡아줘야겠어.”‘달러박스’ 대한중석. ‘정치’의 자리가 아니라 ‘경제’의 자리였다. 박태준은 마음을 열었다.“서독 갔다 ..이대환
일본 간 박태준, 6·25 덕에 사상 최고 호황 누리는 일본을 보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1)]
일본 간 박태준, 6·25 덕에 사상 최고 호황 누리는 일본을 보고2014.10.01 (수)
일본의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한국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그 천거의 무게와 명찰에 어울리는 인품과 언행을 보여야 하는 박태준은 1964년 1월 도쿄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오노가 일본 중의원 의장, 내각 ..이대환
매국노 역할을 맡긴 박정희, 떠맡은 박태준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0)]
매국노 역할을 맡긴 박정희, 떠맡은 박태준2014.09.26 (금)
“박태준이 왔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박태준이 한 번 더 고했다. 그래도 서재에 서 있는 박정희는 책을 찾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박태준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1964년 1월 1..이대환
박태준이 살아 이정현 당선을 봤다면?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9)]
박태준이 살아 이정현 당선을 봤다면?2014.09.24 (수)
1963년 9월 15일 대통령 후보 등록 마감, 법정 선거운동 기간은 한 달, 10월 15일 투표. ‘5‧16의 2년 6개월’에 대해 국민이 심판하는 선거는 예상대로 윤보선 후보와 박정희 후보의 치열한 각축전이었다...이대환
국회의원 출마 안하려고 박태준은 아내에게...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8)]
국회의원 출마 안하려고 박태준은 아내에게...2014.09.16 (화)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가 ‘내각제 폐지와 대통령중심제 채택’ 개헌안을 찬성했다. 1963년은 새해 벽두부터 ‘정치의 계절’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그해 8월 15일에 제3공화국 대통령 선거일을 10월 15..이대환
땔감 때문에 벌겋게 된 민둥산을 푸르게 만든 박태준의 묘안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7)]
땔감 때문에 벌겋게 된 민둥산을 푸르게 만든 박태준의 묘안2014.09.15 (월)
1960년대, 한국 야산들은 가난한 국민에게 땔감을 대는 고마운 창고였다. 겨울에는 더욱 그랬다. 삭정이도 솔방울도 낙엽도 귀중한 ‘가정 연료’였다. 농한기에 시골의 가장(家長)들은 장작을 패서 달구지에 싣고 장터로..이대환
박정희, 미국 차관 못얻어 울산제철 건설에 실패한 뒤 한이 맺히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6)]
박정희, 미국 차관 못얻어 울산제철 건설에 실패한 뒤 한이 맺히고2014.09.11 (목)
박태준은 1961년 세밑에 유럽으로 날아갔다. 구라파통상사절단 단장이었다. 최고위원은 혼자였다. 통상도 통상이거니와 선진국 산업현장을 견학할 좋은 기회였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을 진리로 신봉하는 그의 목적의식..이대환
경제개발 밑천이 없어 애가 탄 박정희, 미국-일본-서독으로...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5)]
경제개발 밑천이 없어 애가 탄 박정희, 미국-일본-서독으로...2014.09.02 (화)
1961년 11월 11일,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빼빼로 데이’라 부르는 그날, 박정희가 통치자로서 최초 해외 순방에 나선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러 일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와 만..이대환
박정희와 박태준, "아들 6명이 6-25 때 전사했다"는 사기꾼에 속아...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4)]
박정희와 박태준, "아들 6명이 6-25 때 전사했다"는 사기꾼에 속아...2014.08.28 (목)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엔간히 안정 기반을 다진 1961년 7월, 서울은 무더위에 갇혀 있었다. 그 여름의 어느 날, 비서실장 박태준은 가슴 아픈 사연을 들어야 했다. 함경북도 출신의 김 아무개 노인이 국군에 들어간 아들..이대환
한심했던 한국경제…박정희, 박태준을 경제 분야에 전진배치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3)]
한심했던 한국경제…박정희, 박태준을 경제 분야에 전진배치2014.08.25 (월)
박정희는 호랑이 등에 완전히 올라탔다. 박태준도 그 뒤에 앉았다. 전진을 멈출 수도 스스로 내릴 수도 없는, 험난한 앞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실력이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이대환
박정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 자네에게..."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2)]
박정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 자네에게..."2014.08.21 (목)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태준은 전투복 차림으로 군화 끈을 졸라맸다. 그리고 대문까지 배웅을 나온 아내에게 묵직하게 말했다.“지금 나가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소. 그럴 때는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이대환
박정희 따라 대구 간 박태준, 신성일 집에서 하숙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1)]
박정희 따라 대구 간 박태준, 신성일 집에서 하숙2014.08.20 (수)
이철승은 유효한 줄이었다. 박정희는 ‘군복을 벗어야 하는 위기’를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곧 서울을 떠나야 했다. 그것은 거사의 공간에서 멀리 벗어나야 하는 괴로운 노릇이었다. 1961년 1월 박태준은 귀국..이대환
강제전역 위기에 몰린 박정희가 붙잡은 구명줄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0)]
강제전역 위기에 몰린 박정희가 붙잡은 구명줄2014.08.18 (월)
“광주로 같이 가자. 참모장을 맡아줘.”대취에서 깨어난 박정희의 제안에 담긴 의미를 박태준은 금세 알아차렸다. 최소한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을 깊이 신뢰하고 있다는 것, 또 하나는 좌천당한 울분과 과음의 후유증 ..이대환
박정희, 송요찬 계엄사령관에게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시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9)]
박정희, 송요찬 계엄사령관에게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시라"2014.08.14 (목)
4·19의 신선한 기풍이 군부에도 쇄신 바람을 일으켰다. 군부는 변해야 했다. 박정희는 박태준을 비롯한 핵심참모와 숙의하고 드디어 과감한 행동에 나선다. 그것은 1960년 5월 2일 송요찬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에..이대환
박정희와 박태준이 부산 동백섬에서 한 사나이간 맹세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8)]
박정희와 박태준이 부산 동백섬에서 한 사나이간 맹세2014.08.11 (월)
부산군수기지사령부 관사는 동래 온천장 동네였다. 이른 봄날에 박정희는 술집의 일차를 마치면 얼큰한 술기운 속에서 곧잘 자기 관사로 참모들을 몰고 갔다. 대화도 노래도 참으로 편한 장소였다. 관사로 가자, 나를 따르라..이대환
박정희, 참모들에게 "박태준을 술로 뻗게 하라"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7)]
박정희, 참모들에게 "박태준을 술로 뻗게 하라"2014.08.06 (수)
1958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시가행진 부대를 지휘하여 25사단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박태준은 1959년 3월 육군본부 인사처리과장으로 부임하여 그해 8월 미국 연수를 다녀온다. 9월 17일 귀국. 자리는 그대로..이대환
박태준, 가짜 고추가루 납품업자 얼굴에 권총을 겨누다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6)]
박태준, 가짜 고추가루 납품업자 얼굴에 권총을 겨누다2014.08.05 (화)
단 한 번, 박정희는 군대경력에서 박태준의 후배라는 기록을 남겼다. 육군대학이 그것이다. 1953년 11월 준장 진급 후 미국 육군 포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유학하고 광주포병학교 교장을 거쳐 5사단장으로 있던 박정희가 ..이대환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2014.07.29 (화)
“……견딜 수 없는 바를 견디고 참을 수 없는 바를 참아갑시다.” 일본 왕 히로히토의 저 목소리가 라디오 전파에 실린 것은 1945년 8월 15일 정오였다. 이른바 ‘무조건 항복’ 선언. 이것을 박태준은 일본 산골의..이대환
박정희가 재임 내내 박태준에게만은 독대 특혜를 준 사연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4)]
박정희가 재임 내내 박태준에게만은 독대 특혜를 준 사연2014.07.25 (금)
1968년 4월 1일. 이 만우절에는 한국 현대사가 기록할 두 가지 ‘특별한 기념식’이 열렸다. 장소는 대전과 서울. 대전의 것은 거창하고, 서울의 것은 조촐했다. 다만 시작이 조촐하다 해서 미래도 그래야 한다는 ..이대환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마패를 준 까닭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3)]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마패를 준 까닭2014.07.21 (월)
<프롤로그> 왜 위대한 만남인가?(下) 1917년에 태어나 1979년에 생을 마친 박정희, 1927년에 태어나 2011년에 생을 마친 박태준. 십 년 차이로 이 험난한 땅에 태어나 공동의 운명을 짊어지고 ..이대환
박정희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라", 박태준은...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2)]
박정희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라", 박태준은...2014.07.15 (화)
<프롤로그> 왜 위대한 만남인가?(中) 정치냐 경제냐, 이 갈림길이 박태준의 눈앞에 나타난 때는 1963년 9월이었다.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강의실에서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난 박정희..이대환
박정희의 과(過)에 박태준이 연루되지 않는 이유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1)]
박정희의 과(過)에 박태준이 연루되지 않는 이유2014.07.08 (화)
진정한 신뢰로 위대한 일을 창조한 ‘롤 모델’이 우리 권력동네엔 없는가? ‘박정희와 박태준’이 답할 것이다. 한국산업화의 강건한 견인차였던 포항종합제철, 지난 3일로 준공 41주년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