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바’(양아버지의 중국어), 가난한 저에게 기회를 줘서 정말 감사해요.”
오는 2월 6일 결혼을 앞둔 중국 상하이가정법원 후치앙웨이(27) 판사에게는 아빠가 둘이다. 인구 3000명이 사는 호남성의 작은 농촌마을에 사는 농부와 광주문화재단 박강배(52) 실장이 그녀를 키운 아빠다.
판사와 변호사는 중국에서 인기 직종이다. 한 해 35만명이 시험을 봐 3만여명만이 변호사 자격을 딸 수 있고, 이중 소수만이 판사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눈을 뜨면 먹을 것부터 걱정해야 했던 가난한 시골 소녀가 어엿한 판사가 되고, 중국 유명 대학 교수와 결혼하게 된 과정에는 한국인 ‘깐바’가 전해준 기적이 있었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박 실장은 12년 전 상하이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중국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중국어 과외를 해주던 중국 유학생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중국의 가난한 아이를 입양해 키워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아이가 없었던 박 실장은 아내와 상의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후치앙웨이를 만나게 됐다. 그의 눈에 비친 후치앙웨이는 공부는 못하지만 선생님 말은 잘 듣는 순박한 소녀였다. 후치앙웨이가 사는 마을의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배우지 못해 직장도 잡지 못하고 농사를 거들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가난했지만 후치앙웨이는 당돌했다. 당시 그녀는 “낳아 준 부모를 버릴 수 없으니, 당신의 호적에는 입적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때부터 박 실장의 조건없는 지원이 시작됐다. 중국 아이를 한국에 데려와 키우는 일반적인 입양이 아니라, 딸의 요구에 따라 중국의 친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한국의 박 실장이 지원만 해주는 식의 입양이 이뤄졌다.
친부모를 버릴 수 없다고 떼를 쓰는 아이를 탓할 수 없었던 박 실장은 “네가 사람이 되게 하는 프로그램을 줄 테니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직업을 가져라”고 말한 뒤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해 주기 시작했다.
박 실장이 내건 조건은 이랬다. 자신이 짜준 학습 프로그램에 따라 공부할 것, 정기적으로 성적표 등 공부 실적을 보내 줄 것이었다.
말에 그치지 않고, 박 실장은 인터넷 등을 뒤져 중국 입시와 교과 과정을 직접 연구하기 시작했고 딸 후치앙웨이의 실력에 맞는 교육 과정을 공부할 것을 조언했다. 딸이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이메일을 통해 점검했고, 상황에 맞는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부족한 교과 과정은 현지 과외 선생을 물색해 보충해주기까지 했다. 박 실장은 딸의 대학 합격을 위해 상하이에서 진행된 대학입시설명회를 찾아가는 열정을 보였다.
박 실장은 “공부가 힘들었던지 어느 날 딸이 ‘아빠 맞아요? 왜 이렇게 저를 힘들게 해요?”라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면서 “매일 만날 수가 없어서 독한 아빠가 될 수밖에는 없었다”고 말했다.
박 실장의 딸 사랑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호남성 호남대 대학원에 진학한 딸을 묵묵히 후원했고, 나중에 대도시에서 변호사를 개업해 외국계 기업을 상대할 때를 대비해 딸의 해외 어학 연수까지 지원했다.
한 해 1000만원이 넘는 돈을 중국으로 보내야 했지만 감동도 컸다. 어느 날 딸을 만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회를 줘서 너무 고맙다”는 딸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박 실장은 벅찬 감동을 느꼈다.
또 대학 졸업식 때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야”라고 소개하는 딸의 환한 얼굴은 그동안의 고생을 잊기에 충분했다.
판사가 된 딸은 첫 월급을 받아 아빠의 관심 분야인 중국건축사 책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박 실장은 “딸에게 아직 말은 못했지만 나중에 성공한 뒤 저처럼 가난한 나라의 아이를 입양해 그 아이가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착한 딸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오광록기자 kroh@kwangju.co.kr
오는 2월 6일 결혼을 앞둔 중국 상하이가정법원 후치앙웨이(27) 판사에게는 아빠가 둘이다. 인구 3000명이 사는 호남성의 작은 농촌마을에 사는 농부와 광주문화재단 박강배(52) 실장이 그녀를 키운 아빠다.
판사와 변호사는 중국에서 인기 직종이다. 한 해 35만명이 시험을 봐 3만여명만이 변호사 자격을 딸 수 있고, 이중 소수만이 판사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눈을 뜨면 먹을 것부터 걱정해야 했던 가난한 시골 소녀가 어엿한 판사가 되고, 중국 유명 대학 교수와 결혼하게 된 과정에는 한국인 ‘깐바’가 전해준 기적이 있었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박 실장은 12년 전 상하이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중국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중국어 과외를 해주던 중국 유학생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중국의 가난한 아이를 입양해 키워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아이가 없었던 박 실장은 아내와 상의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후치앙웨이를 만나게 됐다. 그의 눈에 비친 후치앙웨이는 공부는 못하지만 선생님 말은 잘 듣는 순박한 소녀였다. 후치앙웨이가 사는 마을의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배우지 못해 직장도 잡지 못하고 농사를 거들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가난했지만 후치앙웨이는 당돌했다. 당시 그녀는 “낳아 준 부모를 버릴 수 없으니, 당신의 호적에는 입적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때부터 박 실장의 조건없는 지원이 시작됐다. 중국 아이를 한국에 데려와 키우는 일반적인 입양이 아니라, 딸의 요구에 따라 중국의 친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한국의 박 실장이 지원만 해주는 식의 입양이 이뤄졌다.
친부모를 버릴 수 없다고 떼를 쓰는 아이를 탓할 수 없었던 박 실장은 “네가 사람이 되게 하는 프로그램을 줄 테니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직업을 가져라”고 말한 뒤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해 주기 시작했다.
박 실장이 내건 조건은 이랬다. 자신이 짜준 학습 프로그램에 따라 공부할 것, 정기적으로 성적표 등 공부 실적을 보내 줄 것이었다.
말에 그치지 않고, 박 실장은 인터넷 등을 뒤져 중국 입시와 교과 과정을 직접 연구하기 시작했고 딸 후치앙웨이의 실력에 맞는 교육 과정을 공부할 것을 조언했다. 딸이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이메일을 통해 점검했고, 상황에 맞는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부족한 교과 과정은 현지 과외 선생을 물색해 보충해주기까지 했다. 박 실장은 딸의 대학 합격을 위해 상하이에서 진행된 대학입시설명회를 찾아가는 열정을 보였다.
박 실장은 “공부가 힘들었던지 어느 날 딸이 ‘아빠 맞아요? 왜 이렇게 저를 힘들게 해요?”라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면서 “매일 만날 수가 없어서 독한 아빠가 될 수밖에는 없었다”고 말했다.
박 실장의 딸 사랑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호남성 호남대 대학원에 진학한 딸을 묵묵히 후원했고, 나중에 대도시에서 변호사를 개업해 외국계 기업을 상대할 때를 대비해 딸의 해외 어학 연수까지 지원했다.
한 해 1000만원이 넘는 돈을 중국으로 보내야 했지만 감동도 컸다. 어느 날 딸을 만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회를 줘서 너무 고맙다”는 딸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박 실장은 벅찬 감동을 느꼈다.
또 대학 졸업식 때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야”라고 소개하는 딸의 환한 얼굴은 그동안의 고생을 잊기에 충분했다.
판사가 된 딸은 첫 월급을 받아 아빠의 관심 분야인 중국건축사 책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박 실장은 “딸에게 아직 말은 못했지만 나중에 성공한 뒤 저처럼 가난한 나라의 아이를 입양해 그 아이가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착한 딸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오광록기자 kro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