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 새해를 맞아 파주 월롱산성(月籠山城)에 올라갔다. 해발 246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성이지만 주변 일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 요충지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항상 수불석권(手不釋卷·손에서 책을 놓지 않음)의 풍모를 지니고 있는 묵개(默介) 선생이 한번 올라가 보기를 권유했기 때문이다.
월롱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인 홍타이지가 서울 입성을 앞에 두고 3일간 머물며 제단을 쌓고 제사를 올렸던 터이다. 왜 서울을 코앞에 두고 한가하게 3일간이나 머물렀을까? 홍타이지는 월롱산성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다가 죽은 아버지인 누르하치의 모습을 보았다. 북한산 모습이 아버지 문수보살(文殊菩薩)로 보였던 것이다. 아! 문수보살이 여기에 계시는구나! 누르하치는 생전에 자신을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을 치러 왔다가 전혀 생각지도 않게 월롱산성에서 죽은 아버지 얼굴을 발견하고 '문수' 개념을 체득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왜 문수보살을 강조했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여진족은 건주, 해서, 야인으로 분열돼 있었다. 민족을 통합하자면 문수보살이 필요하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한다. 문수는 화엄사상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화엄(華嚴)은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 핵심이다. 문수는 통합을 상징하는 인격이다. 여진족 발음으로 '만주(滿洲)'는 '문수(文殊)'라는 뜻이라고 한다. 백두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산이라고 여겼다.
당시 30만 인구에 불과했던 여진족이 1억이 넘는 명나라를 먹기 위해서는 인력 보충과 함께 조선·몽골과 연대하는 일이 당면 과제였던 것이다. 전쟁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항복만 하면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것이 문수보살의 지혜로운 무력행사 방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여진은 몽골도 통합했다.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인조가 큰절 몇 번 했다고 해서 목을 치지 않고 살려준 것도 이런 맥락이다. 당시 조선은 주자 성리학의 화이관(華夷觀)에 사로잡혀 있었다. 화이관에 따르면 여진족은 천박한 오랑캐였다. 병자호란은 '문수 화엄'과 '주자 성리학'의 대결이기도 하였다. 월롱산성에 올라가 '만주'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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