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터는 풍수상 길지인가, 흉지인가? 최근 청와대 터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대개 흉지라는 답변을 듣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대통령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 것과 연관돼 있는 것 같다.
흉지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광복 이후 대통령의 말로가 대부분 좋지 않았음을 근거로 든다. 과연 그러한가?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것과 한류 문화 대국이 된 것은 우리 민족이 흘린 피와 땀의 결과물이지만 대통령들의 통치력 또한 큰 역할을 했다.
청와대 터는 경복궁의 일부였으므로 경복궁 터를 풍수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흉지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광복 이후 대통령의 말로가 대부분 좋지 않았음을 근거로 든다. 과연 그러한가?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것과 한류 문화 대국이 된 것은 우리 민족이 흘린 피와 땀의 결과물이지만 대통령들의 통치력 또한 큰 역할을 했다.
청와대 터는 경복궁의 일부였으므로 경복궁 터를 풍수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 북악산을 중심축으로 한 청와대 본관과 약간 동쪽으로 비켜 중심축을 잡은 경복궁. / 김두규 교수 제공
최양선의 주장에 대해 세종은 영의정 황희 등 대신들과 풍수 학인들로 하여금 남산과 북악산을 직접 올라가 살피게 한다. 의견은 경복궁 터가 길지라는 다수파와 흉지라는 소수파로 나뉜다. 그런데 소수파가 승복하지 않자 며칠 후 세종이 직접 북악산을 올라가 살핀다. 세종은 "오래 살피고, 찬반양론을 듣고, 또 반복해서 살핀 결과 지금의 경복궁이 제대로 된 명당이다"라고 결론짓는다.
이렇듯 경복궁 명당론이 '확정'되었음에도 흉지론이 떠도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풍수학자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의 발언을 오해한 데서 비롯했다. 최 교수는 경복궁의 후원에 해당하는 청와대 터가 '신들의 거처'라고 평한 적이 있다. 단지 큰 교회·사찰·성당이 들어서면 더 좋았을 곳이란 뜻이었는데 이를 사람 살기 적합지 않은 곳이라고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다.
'호지무전미(好地無全美)'라는 풍수 격언이 있다. 제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최양선이 말한 대로 경복궁 터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조선 초 이곳에 궁궐을 짓던 건축가들(정도전·김사행 등)은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를 풍수적으로 보완했다.
우선, 경복궁 중심축을 북악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금 비켜 잡았다. 왜냐하면 북악산이 동쪽으로 약간 고개를 돌린 데다 험석(險石)이 많아 그 바로 아래 건물을 세우면 위압적이고 권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몇백 년 후 서울을 찾은 서양 건축학자도 같은 의견이었다. 1986년 경복궁을 찾은 독일 하노버대학교 건축학과 란트체텔(Landzettel) 교수는 북악산과 경복궁의 입지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악산은 궁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에게 불운이었을 것이다. 뾰족한 산 모양이면서도 동시에 좌우 반듯한 대칭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험한 산 아래 궁궐을 지은 조선 건축가의 위대함을 보았다. "뾰족한 북악산과 동쪽으로 길게 흐르는 능선을 감안해 궁궐 터를 (약간 틀어) 잡은 것은 탁견이었다"고 평한다.
또 다른 풍수적 보완책도 있다. 북악산처럼 험한 바위가 많은 곳은 소나무를 심어 그 강기(剛氣)를 완화한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이 송악산에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동시에 왕기를 키웠다는 건국 설화와 맥을 같이한다. 되도록 많은 소나무를 심는 게 좋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훗날 청와대 본관을 증·개축(또는 신축)하는 날이 온다면 풍수적 지혜를 활용해 콘크리트 건물을 소나무를 활용한 한옥으로 바꾸는 것을 권하고 싶다. 그러면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의 마음도 편해질 수 있다.
건물에 따라 사람 마음이 바뀔까?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말했다. "우리가 건물을 짓지만 건물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 '집이 길하면 사람이 영예롭다(宅吉卽人榮)'는 풍수서 '삼원경(三元經)'과 같은 말이다. 청와대가 한옥으로 지어지면 거침없이 확산하는 한류 수출 품목에 한옥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