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최혁 주필의 남도의 동학유적지>

화이트보스 2015. 1. 19. 11:14

최혁 주필의 남도의 동학유적지>밝은 세상위해 끝까지 목숨바친 남도 땅의 농민들
(4).광주·전남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의의

최혁  |  hchoi@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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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1.18  16:4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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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과 전북중심의 기념·평가로 민족적 투쟁 성격 결여
전남지역 갑오항쟁 재평가는 동학농민혁명 전국화와 직결
농민·수성군 개혁정신·충절 함께 기리고 민족자산 삼아야


 

   
전남지역 동학농민군들은 전봉준의 무장기포 이후 관군과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를 설치해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으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후 9월에 다시 기포한다.동학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뒤 전남 장흥으로 대거집결,석대들에서 일본군·관군과 최후의 일전을 겨룬다.석대들 전투에는 3만여명의 농민군이 전투에 참가 이중 1천5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무장창의 포고문에 새겨진 동학농민군의 모습.

대부분의 국민들은 동학농민혁명이 1894년 1월 고부봉기에서 시작돼 그해 11월 초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일단락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전남지역 농민군과 전북에서 패주해와 합류한 농민군들이 모두 모여 장흥에서 마지막 혈전을 벌인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무장기포 이후 광주와 전남지역 곳곳에서는 농민군과 관군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전주화약 이후 잠시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됐으나 동학농민군이 9월에 재기포를 하면서 대규모 전투가 12월까지 이어졌다.

   
▲동학농민군 1차 기포 후 진격상황

동학농민혁명은 전북 고부에서 시작해 전남 장흥에서 마무리된다. 그러나 장흥 석대들 전투는 역사의 뒤안길에 자리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석대들 전투의 내용에 대해 아는 국민들은 드물다. 그러기에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등 동학농민군의 지도부가 와해됐음에도 뜻을 꺽지 않고 분연히 싸웠던 그 기개와 불굴의 투지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석대들 전투는 우금치 전투를 제외하고는 동학농민혁명에 있어서 가장 큰 전투였다. 농민군은 동학농민혁명 전개 초반, 황토현 전투와 황룡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대한 농민군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때였고 위세가 급격히 커지고 있었던 시점이다.

그러나 석대들 전투 당시의 상황은 다르다. 농민군주력부대가 일본의 신식무기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거나 처형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군이 힘을 모아 벽사역과 장녕성, 강진성, 병영성을 차례로 점령한 것은 전남지역 농민군의 위상과 동학혁명의 성격을 재규정해야할 부분이다.

다시 말해 전봉준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없었음에도 이방언을 중심으로 해서 전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이 더 가열차게 진행된 것은 그만큼 전남지역 농민군들의 역할과 비중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남의 동학농민혁명을 부분이 아닌 전체의 측면에서 바라봐야할 필요가 크다.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다. 전봉준 등  동학군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거나  처형됐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장흥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들은 끝까지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장흥 석대들에 세워져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탑.

동학농민운동은 전북과 전남, 충청지역에 국한된 농민운동이 아니라 경상도와 평안·황해·강원도 등 전국에서 펼쳐진 개혁·외세배격 운동이었다. 그런데도 그 무대가 전북과 충청지역으로 한정돼 있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적 왜곡과 편견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세월이 더 흘러야 장흥 동학농민혁명이 제대로 평가될 것이라고 말한다. 전북지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도 100여년이 지난 뒤에서야 대강의 윤곽을 잡았다는 점을 들면서 그 외연이 확장되기 까지는 또 다른 세월이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평가와 역사제자리 찾기를 세월의 지나침에만 맡긴다는 것은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제대로 밝혀야 하고, 제대로 알려야 하고, 현 시대에서 동학혁명의 의미를 되새김질 해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 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능동적으로 동학혁명의 정신을 살리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 해야할 일다.

동학농민혁명군들은 그 기세가 꺽인 뒤 모두 반란군으로 몰렸다. 역적집안으로 몰려 가족들도 핍박을 받았다. 후손들은 살아남기 위해 가문에 드리워졌던 동학의 흔적을 샅샅이 없앴다. 할아버지, 아버지, 형, 동생이 죽은 날짜를 바꿔가면서까지 자신의 집안이 농민군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만들어갔다.

그런 탓에 전남지역 동학농민혁명연구는 제한적인 자료만 가지고 진행되고 있다. 농민군들이 남긴 자료는 극히 드물고 관련 증언들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러함에도 뜻있는 학계 인사와 향토사학자들의 노력으로 전체적인 윤곽은 잡혀져 있는 상태다.

   
무장창의 포고문

광주·전남지역의 동학혁명 연구는 관군기록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농민군의 시각에서 정리된 자료가 거의 없어서이다. 관군기록을 통해 시군별로 동학유적지들이 정리는 돼 있으나 이들 유적지들은 사실상 거의 방치된 상태다.

어떤 이는 120년 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의 사실관계를 이제야 규명하고 또 유적지를 보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 또 시·군 단위별로 동학혁명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다하더라도 그 역사에 대해 주민들이 얼마나 흥미를 갖겠느냐고도 반문한다.

바로 이런 시각 때문에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와 동학혁명정신 선양사업이 제자리를 맴돌았다고 생각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결코 과거의 역사가 아니다. 관리가 건강해야 나라가 건강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으며, 나라가 튼튼해야 주권을 지켜갈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남겨주고 있다.

전남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는 광주의 손화중, 장흥의 이방언, 무안의 배상옥이라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해 재정리돼야할 필요가 크다. 이와 함께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 장렬하게 순국했던 박헌양부사와 병영성 김두흡 감군들의 충정도 국가적 차원에서 기려야할 필요가 크다.

또 20대 여인으로 장흥지역 전투에 참가해 농민군들을 위무했던 이소사와 소년 동학대장 최동린에 대한 기념사업도 이뤄져야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지역사회를 정의롭게 하는 공동의 가치로 삼고, 더 나아가 나라사랑정신으로 승화시켜 한반도 주변강국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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