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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때 회사 일로 7억 빚진 임원… 모두가 그의 빚을 대신 갚으려 했다

화이트보스 2015. 3. 9. 11:05

IMF 때 회사 일로 7억 빚진 임원… 모두가 그의 빚을 대신 갚으려 했다

  • 윤주헌 기자
  • 입력 : 2015.03.09 03:04

    - 후배·동료들이 청원서까지
    재취업후 월급 은행에 보내며 군소리 없이 빚 갚아나가
    보다 못한 동료·후배들 모금 "일부 갚을테니 빚 면제를"

    - 사망 후에도 빚 갚겠다 나서
    "아버지 명예 되찾겠다" 자식들, 채무상속 움직임
    "영정 앞에 바치고 싶다" 후배가 채권 무상양도 받아

    기사 관련 일러스트
    한 채무자와 그의 가족, 주변 사람들이 만들어낸 동화 같은 이야기가 은행가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주인공인 A씨는 한 대기업의 임원이었다. A씨가 다니던 D사는 1998년 8월 상업은행(현 우리은행)에서 2억9000만달러를 대출받았지만, 대부분 갚지 못했다. 외환 위기에 휩쓸린 데다 애당초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에 제출한 자료들이 분식회계로 실적을 부풀린 것들이었다. 은행은 A씨 등 임원 10여명을 상대로 "분식회계가 벌어지기까지 관리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지난 2008년 대법원은 A씨에게 은행에 3억원을 배상하라는 확정판결을 내렸다. A씨는 이자까지 약 7억원을 갚아야 했다. 은행은 이 판결을 근거로 추심에 나섰다. 소송을 당한 임원 대부분이 납부에 소극적이었지만, 혼자만 대법원 상고(上告)를 할 정도로 강하게 결백을 주장했던 A씨만 유독 군소리없이 은행 빚을 갚기 시작했다. 재취업한 회사에서 받는 월급까지 꼬박꼬박 은행으로 보냈다.

    그러길 2년, 2010년 겨울쯤 은행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A씨의 회사 동료와 후배 30여명이 보내온 청원서였다. 청원서에서 후배들은 "70대가 넘어서 경제력이 없고, 남아 있는 재산도 없어서 우리가 십시일반 모금을 해서 빚을 일부 갚을 테니 나머지를 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편지와 함께 보내온 통장 사본에는 4000만원이 들어 있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은행은 채무는 본인이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 이 돈을 받지 않았다. 당시 청원서에 서명했던 한 전직 임원은 "직원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어깨동무를 할 정도로 친근했던 분이다. 직장 상사가 아닌 큰형 같은 분이셨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2013년 5월, 이번엔 A씨의 딸이 은행을 찾아왔다. A씨가 노환으로 숨졌다고 했다. 그러곤 "배상금을 변제하지 못한 것이 고인 생전의 한으로 남아 자식들이 그 채무를 상속받아 조금이라도 변제해 명예회복을 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상속을 포기하면 자식들이 빚을 넘겨받아 갚지 않아도 될 텐데 유족들은 굳이 빚을 갚겠다고 했다.

    은행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채무가 발견돼 함께 상속될 수 있으니 조금 더 고려해보라"고 조언했고, 가족들은 이 말을 듣고 결정을 미뤘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말, 유명 사립대 교수 1명이 추심 업무를 담당하는 우리은행 본점 기업개선부를 찾아왔다. 그는 "A씨를 오랫동안 존경해왔다. 고인의 남은 빚을 내가 넘겨받고 싶다"고 했다. A씨는 1억원을 갚고 6억원을 더 갚아야 했지만 은행은 그가 숨진 뒤 받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대법원 판결문 등 관련 서류 등만 보관하고 있었다. 교수는 은행이 보관 중인 채권 서류라도 넘겨받고 싶어했다.

    우리은행은 결국 지난 1월 A씨에 대한 채권을 무상으로 교수에게 양도했다. 신진기 기업개선부 본부장은 "원래 무상으로 양도하지는 않지만 고인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소망이 원만히 마무리될 수 있도록 특별히 협조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인과의 인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게 그분께 실례인 것 같다"고 했다. 은행 관계자는 "그 교수가 '은행 빚을 다 해결한 뒤 A씨의 영정 앞에 바치고 싶다'고 했었다"고 말했다. A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은행 직원들은 "요즘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다"고 놀라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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