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3.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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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수 경제부 차장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경기가 살아나려면 근로자 실질임금이 올라야 한다"면서 기업에 임금 인상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른바 소득 주도 성장 카드를 꺼내든 셈이다. 소득 주도 성장론은 원래 '임금 주도 성장론'으로 불리던 것으로 좌파식 경제정책이다. 근로자 몫인 임금 분배율을 높여야 유효 수요가 늘어나고 경제도 성장한다는 논리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 우파의 경제철학은 "우선 파이를 키워야 나눠 먹을 게 생긴다"는 관점을 갖고 있어 '이윤 주도 성장론'으로 불린다.
이런 배경 탓에 기업인과 성장론자들은 소득 주도 성장론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등소평식 실용주의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천재 경제학자 케인스는 정부의 시장 개입을 강조한 탓에 '사회주의자'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결국 자본주의를 살린 영웅이 됐다.
최 부총리가 소득 주도 성장 카드를 꺼내든 이유는 뭘까. 지난해 경기 부양을 위해 30조원이 넘는 재정을 쏟아붓고, 금리도 어지간히 내렸지만 내수가 도무지 살아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궁여지책으로 기업이 투자·배당·임금 인상 등으로 이윤을 분배하지 않으면 벌칙성 세금을 부과하는 기업소득환류세제까지 도입했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최근 삼성전자의 선택에서 보듯 기업들은 소낙비를 피할 우산으로 임금 인상 대신 배당 카드를 쓰려고 한다. 기업 입장에선 한번 올려놓으면 다시 내리기 힘든 임금에 손을 대기보다 일회성 지출 성격이 강한 배당 카드가 싸게 때우는 해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당은 대부분 자산가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소비 진작 효과가 임금 인상보다 훨씬 못하다. 소득 양극화가 유효수요 부족을 낳고 이것이 저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세계 공통의 현상이다. 최근 미국·일본 정부가 임금 인상을 강력히 유도하고 있는 건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소득 주도 성장을 추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제조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경제모델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을 추진할 때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은 적자 면하기도 어려운데 웬 임금 인상이냐고 벌써부터 울상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임금 인상으로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면 성장 엔진 자체가 꺼질 수 있다.
수출경쟁력과 기업 수익에 악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소득 주도 성장 패러다임을 적용할 순 없을까. 방법은 있다. 소득 양극화의 최대 피해자인 비정규직 근로자에게 임금 인상 효과를 몰아주는 방법이다. 임금 인상 재원을 정규직 근로자의 양보로 이끌어내면 기업 부담을 크게 늘리지 않고도 이들의 실질임금을 끌어올릴 수 있다.
고액 연봉을 받는 경영자들이 자기 몫을 희생하는 솔선수범을 보이며 정규직의 임금 동결을 호소하면 어떨까. 철학자 존 롤스의 사회정의론에 따르면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은 사회의 최약자들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할 때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한계소비 성향이 큰 비정규직과 청년층(대졸 취업자의 40%가 비정규직)의 소득을 높여주면 내수 살리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의 타깃을 비정규직으로 좁힐 필요가 있다. 노동개혁의 해법을 찾고 있는 노사정위원회가 이런 문제도 심도 있게 논의해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