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은 의자에 앉기도 전에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2003년 10월 2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8000개의 폐연료봉을 추출했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 열린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장관 회의에서다. 회의 안건은 정부가 진행하던 대북 지원을 계속할지, 중단할지였다. 두 달 전 6자회담에서 곧 핵문제 해결에 나설 듯하던 북한의 예기치 못한 도발에 노 대통령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정세현 당시 통일부 장관은 준비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골자는 “그래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 장관은 “대북 지원이 끊기면 6자회담에서 우리의 입지가 없어진다. 북을 끌어안고 있어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 몸값을 높일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노 대통령은 “통일부 장관 말대로 하시죠”라고 말한 뒤 일어섰다.
주무부처 장관의 판단이 대통령의 생각을 바꾼 예다. 정 전 장관은 11일 “노 전 대통령은 대북정책에서 나름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때론 흔들렸다”며 “참모들이 소신을 가지고 설득하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참모들이 소신과 전략적 이해 득실을 가지고 설명하면 대부분 대통령은 말귀를 알아듣는다”며 “대통령이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얘기를 안 하는 게 문제다. 자기 판단을 얘기하지 않으려면 왜 월급을 받고 있나”라고 했다.

이명박 정부 때도 마찬가지다. 당시 청와대 대외전략 기획관을 지낸 김태효(정치외교) 성균관대 교수는 “200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때 (이) 대통령은 사람(병력)은 보내지 않고 재정 등 경제적 지원만 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으나 참모들과 토론을 거치면서 파병을 결정했다”며 “미국과의 미사일 가이드라인(사거리 규정) 개정도 대통령은 처음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참모들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고해 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과 대치하고, 주변국들에 둘러싸인 한국의 외교·안보 정책은 결단의 연속이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일방통행식 결정보다는 머리를 맞대고 짜낸 혜안이 필요하다. 그런 만큼 치열한 논쟁과 설득, 대화를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국정 경험자들은 조언했다.
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대통령은 전지전능한 인물이 아니다”며 “대통령은 전문성을 갖춘 참모들의 머리와 생각을 빌려야 하고, 참모들은 소신과 책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보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의 입맛에만 맞추려는 참모들의 무소신이 ‘박제 대통령’을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교안보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인 한 대학교수는 “현 외교안보라인은 대통령이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경향이 있다”며 “대통령의 지시만 기다리며 ‘실행’에만 능한 인물이 자리를 채우면 대통령이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는 구조가 돼버린다”고 말했다. 청와대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본인들의 생각에만 갇히는 ‘청와대 병’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정세현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는 원칙, 원칙 하는데 원칙이라는 것은 사물의 원리에 입각해 세워야지, 자기의 생각을 원칙으로 삼으면 안 된다”며 “청와대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대통령도 참모도 더 적극적인 토론을 통해 올바른 정책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용수·전수진 기자 jeong.yongs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