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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정말 제대로 된 나라 만들자

화이트보스 2015. 6. 21. 11:06

이번에 정말 제대로 된 나라 만들자

  • 강천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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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6.19 22:19 | 수정 : 2015.06.19 23:17

    조지아 동물원 맹수 탈출 사건과 한국의 메르스 불안
    무엇이 실패 키웠나되 돌아보고 다시 뚫리는 일 없게 해야

    
	강천석 논설고문 사진
    강천석 논설고문

    엿새 전 유럽의 작은 나라 조지아 공화국 수도 트빌리시에서 첫 뉴스가 들어왔다.

    "홍수와 거센 바람으로 동물원 맹수 우리 울타리가 무너져 맹수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트빌리시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시 당국은 중심가에서 하마 한 마리를 발견해 마취총으로 제압하고 늑대 6마리, 곰과 하이에나 각 1마리를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시 당국은 탈출한 맹수 숫자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탈출한 맹수들의 소재(所在)도 파악하지 못해 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조지아 총리는 긴급 브리핑을 갖고 '외출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인구 110만명이 사는 트빌리시는 헬리콥터를 띄워 맹수 행방을 쫓고 있다."

    사흘 후 두 번째 소식이 들어왔다. "동물원을 탈출한 호랑이 한 마리가 시내 중앙 광장에서 행인을 공격해 남성 1명이 사망하고 다른 한 사람은 크게 다쳤다. 출동한 경찰은 근처 창고에 웅크리고 있던 호랑이를 찾아내 사살했다. 전날 동물원 측은 탈출 동물들이 대부분 죽은 채 발견됐거나 우리로 돌아왔다고 발표했다. 트빌리시에선 1967년 홍수 때도 맹수들이 우리를 탈출해 소동이 난 적이 있다."

    조지아 동물원 맹수 탈출 사건과 한국의 메르스 공포 확산 과정은 놀랄 만치 닮았다. 방역 당국의 통제를 벗어난 바이러스는 우리를 부수고 나온 맹수와 같다. 어디서 마주칠지 모를 호랑이는 '무서운 호랑이'가 아니라 '불안한 호랑이'다. 불안은 마스크나 손 씻기만으론 막을 수 없다.

    트빌리시 당국이 탈출한 맹수 숫자와 맹수 추적 작업을 실황(實況)대로 공개했더라면 불안의 파급(波及)은 동물원 일대에 그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은 탓에 불안은 일거에 도시 전체로 퍼졌다. 다급한 상황에 쫓기기도 했겠지만 그 바닥에는 시민의 판단 능력에 대한 불신(不信)이 깔려 있다. 정치인과 관리는 중요 정보를 다룰 줄 알지만 무지(無知)한 시민들에게 정보를 공개하면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서울 시민들은 인터넷과 소문으로 평택성모병원과 서울삼성병원을 거치며 메르스 2차 감염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바람에 불안이 가중(加重)됐다.

    탈출한 맹수 소재 파악은 시민 신고에 의해 이뤄졌다. 시(市)가 띄운 헬리콥터는 휘발유만 잡아먹었다. 정보는 시민들이 쥐고 있다. 정부가 시민과의 공유(共有)재산인 정보를 투명하게 관리하지 않고 멋대로 써먹으면 시민도 정보 제공에 협조하지 않는다.

    캄캄한 세상에선 서로 돕고 의지하는 사회적 유대감(紐帶感)이 사라진다. 그 자리에 혼자 살아남겠다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이기주의가 대신 들어선다. 수많은 의사·간호사·병리검사 직원들이 자신의 안위(安危)를 뒤로 밀어놓고 메르스와 격투를 벌이고 있다. 감사 인사를 받아도 모자랄 이들의 자녀들이 메르스 전파 위험자로 따돌림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국민의 도덕 수준이 이 정도냐는 개탄도 나오지만 캄캄한 세상을 만든 정부의 정보 독점 탓이 크다.

    동물원 당국자가 사실상 상황 종료를 선언한 다음 날 호랑이가 트빌리시 복판에 나타나 행인을 물어 죽였다. 재난이나 긴급 상황에선 사실과 어긋난 비관적 예측과 낙관적 예측이 똑같이 위험하다. 정부 고위 당국자와 전문가들이 위험 관련 통계나 확률을 자기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은 금물(禁物)이다. 권위 있는 당국자는 최초 예측이나 판단에 특히 신중해야 한다. 과장된 비관적 예측은 불안을 키우고, 낙관적 예측이 빗나가면 신뢰가 무너진다. 신뢰가 무너지면 소통(疏通)의 통로가 막혀 사태 관리가 불가능해진다.

    메르스 확진자 사망률은 10%에 불과하고 90%는 건강을 회복한다는 당국자 설명은 양날의 칼이었다. 인간은 얻을 이익에 마음이 부풀기보다 잃을지 모를 손실을 더 두려워한다. 나와 내 가족이 메르스에 걸려도 10명 중 9명은 안전하다고 안심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가족 가운데 1명이 목숨을 잃을 확률을 훨씬 심각하게 느낀다.

    권위 있는 전문가의 최초 발언은 닻내림 효과(anchoring effect)를 발휘한다. 다른 견해가 계속 쌓여가도 권위자의 최초 발언은 영향력이 쉽게 줄지 않는다. 방역 당국은 메르스 사태 초기 메르스는 작은 침방울을 통해 전파되기 때문에 환자와 2m 이상 거리를 두면 안전하다고 했다. 몇 번 수그러들 듯하다가 다시 고개를 쳐든 메르스의 진행에서 닻내림 효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자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메르스에 맞서는 사람들 모습은 재난을 견뎌낼 희망을 품게 한다. 의병(義兵)의 기개(氣槪)가 아무리 장(壯)하고 활약이 눈부시다 해도 그것만으론 나라를 지키기 어렵다. 전쟁의 승패를 결판내는 건 정규군(正規軍)이다. 정규군이 결정적 전장(戰場)에서 승리를 거둬야 한다. 메르스 전쟁도 마찬가지다. 정규군 최고사령관은 대통령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중간보고가 아니라 '이번에야말로 정말 달라져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