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구례 지리산 자락에 천하 명당(明堂)이 있습니다. 지리산 형제봉이 주산(主山)으로 버티고 서 있으며 그 앞의 병풍산이 북풍(北風)을 막아줍니다. 옆으로는 촛대봉이 촛불처럼 집을 밝히고 정남향 맞은편 오봉산이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안산(案山)인 오봉산(五峯山)은 1만원권에 등장하는 산이라는 말도 있지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오봉산이 있는 마을 이름이 용정(龍井)마을입니다. 샘이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지요. 생김새는 닮은듯한데 마을이장은 “그럴리가…”하며 껄껄대더군요. 그런가 하면 오봉산 앞으로 섬진강이 흐르니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라 하겠습니다. 특이하게도 섬진강은 이 부분에서만 역류하지요. 서울에서는 동부이촌동이 한강이 역류하는 지점인데, 이것은 돈이 밀려온다는 지세라고 합니다. 지금 이곳의 행정명이 오미동(五美洞)입니다.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는 뜻이지요. 오죽했으면 일본강점기 풍수가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쓴 ‘한국의 풍수’라는 책에도 등장할 정도니 구례(求禮)는 과연 ‘예를 찾는 고향’이라고 하겠습니다.
풍수지리가들은 이곳에 명당 셋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선녀가 놀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낙지(金環落地), 금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금구몰니(金龜沒泥), 다섯 보석이 모인 형상인 오보교취(五寶交聚)를 찾아 사람들이 몰리며 마을을 이뤘습니다. 그중 한 명당에 우리나라의 3대 개인 가옥이라는 운조루(雲鳥樓)가 있습니다. 구름 운, 새 조자를 쓰는 이곳을 금환낙지 터라고 하는데 운조루 주인은 금구몰니 터에 더 가깝다고 합니다. 집 지을 때 돌거북이 출토된 것이 그 이유입니다.
1776년, 즉 조선 영조 52년 누군가 이 터에 집을 지었습니다. 낙안군수를 지내던 유이주(柳爾胄)였습니다. 총 78칸의 저택이 완성되자 유이주는 ‘운조루(雲鳥樓)’라는 현판을 겁니다. ‘구름 속에 숨은 새’처럼 낙향해 살겠다는 선비의 뜻을 밝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이주는 어떤 분이었을까.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스물여덟살에 무과에 급제해 벼슬에 나가 1771년 낙안군수가 됐지만 조세를 운반하던 배를 파손시킨 혐의로 귀양을 갔습니다. 삼수갑산에 나오는 그 삼수로 험하기 짝없는 함경도 땅이었지요. 그런데 영조가 죽고 이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사면이 돼 유이주는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팔자가 바뀐 그때부터 이곳이 명당이란 찬사를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싶습니다. 그는 1797년 세상을 떠났는데 이력을 보면 성곽의 건축을 많이 한 것이 눈에 띕니다.
예를 들면 1767년에는 영조의 명을 받아 남한산성을 쌓는 일에 종사했고 정조가 즉위하면서는 함흥성을 쌓았는데 그때의 경험이 99칸이나 되는 운조루를 설계한 바탕이 됐을 겁니다. 운조루 공사는 조카인 유덕호가 삼촌의 설계를 받아 직접 했다고 합니다. 운조라는 글자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원문은 ‘운무심이출수(雲無心以出岫) 조권비이지환(鳥倦飛而知還)’, 즉 ‘구름은 무심하게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새는 날다 지쳐 둥지로 돌아온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집이 유명해진 것은 한옥의 멋있는 자태나 도연명의 시구에서 따온 당호(堂號) 때문이 아니라 조선 선비 집의 전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 사례로 꼽히기 때문입니다. ‘타인능해(他人能解)’ 네자에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中편에 계속>
<上편에서 계속>
‘타인능해’라는 글자는 원통형 뒤주 아랫부분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타인능해라고 쓰여진 사각형 나무토막을 빼내면 자그마한 구멍이 보입니다. 바로 뒤주에 저장된 쌀이 빠져나오는 구명입니다. 뒤주의 용량은 쌀 세 가마니 분량이라고 합니다. 원통형 뒤주 뒤에는 더 큰 사각형 뒤주가 있습니다. 여기 평상시 쌀을 재워놨다가 뒤주가 빌 때면 채워넣는, 일종의 저수지 역할이지요.
중요한 것은 유이주가 뒤주를 놓아둔 위치입니다. 뒤주는 정문에서 볼 때 잘 안 보이는 오른편 헛간 안에 있습니다. 헛간은 운조루, 즉 정문에서 볼 때 왼편에 있는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길목에 있습니다. 먹을 게 없어 쌀을 구걸하려 왔지만 얼마나 주인 눈치가 보이겠습니까? 주인과 마주치기 제일 곤란해하는 불편한 마음을 헤아리는 주인의 배려가 돋보입니다.
운조루의 주인들은 평시 이백여석의 쌀을 생산했는데 그 가운데 연간 30여 가마니가 양식이 없어 고생하는 이웃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저는 이 뒤주를 처음 봤을 때 “이웃들이 왜 다 가져가지 않고 30가마니만 가져갔을까”하고 궁금해했습니다. 이웃들은 궁해도 운조루의 타인능해, 즉 아무나 이 뒤주를 열 수 있다는 나무토막을 가능하면 이용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먹을 만큼만 가져가고 양보하고 일해 어려움을 헤쳐간다는 다짐을 타인능해를 보면서 했다는 겁니다.
운조루의 굴뚝은 야트막합니다. 높이가 채 1m가 되지 않는데 그렇게 만든 것도 밥 짓는 냄새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입니다. 배고픈 이웃들이 많은데 밥 냄새가 나면 그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굴뚝 하나에도 세심함이 담겨 있지요. 그뿐 아니라 운조루에서 거저 내준 전답에서 나온 수입은 지금도 동네 노인들의 여행경비 등으로 쓴다고 합니다.
별 수입이 없는 것처럼 보여 수입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운조루 사람들은 “우리는 마음이 좁아 조상같이 못한다”며 오히려 부끄러워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웃을 보살피니 운조루는 동학난, 여순(麗順)반란사건, 6ㆍ25 때도 무사했다고 합니다. 지리산이 빨치산의 터전이었으니 해코지 당했을 법 하지만 이웃이 운조루에 사는 이들을 보호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일례로 6ㆍ25때 있었던 사례입니다.
인민군이 진주해 이 집을 불태우려 했으나 마을 사람들이 앞장서 “이 집만은 불태워선 안 된다”고 집을 지켰다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빨치산이 먹을 것을 구하려고 마을로 내려올 때면 주민들이 미리 운조루 사람들에게 알려 피신하도록 했습니다. 그야말로 경주 최부잣집과 맞먹는 전라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 사례라 하겠습니다. 운조루 내부로 들어가 볼까요. 운조루에 들어가기 전 대문은 홍살문입니다. 예로부터 나라에서 충절 있는 집안에 하사한다는 것이지요. 홍살문엔 호랑이뼈가 걸려 있습니다. 그 옆으론 행랑채입니다. 지금은 17채가 남아있는데 원래 좌우로 열두칸씩 24채였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행랑채가 이렇게 잘 보존된 것은 이곳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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