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1636년 병자호란

교과서엔 실리지 않은 치욕, 병자호란 쌍령 전투

화이트보스 2015. 6. 24. 10:35
교과서엔 실리지 않은 치욕, 병자호란 쌍령 전투

전사를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서 한번에 크게 패배하기도 사실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크게 패배하는 경우는 대게 상대방을 근거없이 얓잡아 보다가 털털 털리게됩니다 조선시대 우리조상들에게 잊을수 없는 큰 상처를 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쪽 왜놈과 북쪽 오랑캐 상것들이라고 비하하며 인간취급도 안하고 무시하다 나라가 거의 망할뻔했던것이지요

임진왜란은 이순신장군과 의병등 수많은 백성들의 피로 어렵게 나라를 구했지만 결국 이씨조선의 명만 연결해준것에 불과해습니다

 

여기서 나라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교훈을 또 잊고 왕족과 기득권층은 당파싸움과 형식적인 성리학 껍데기만 붙잡고 늘어지다 결국 정묘호란을 겪고 그래도 정신 못차리고 양반타령하고있다 십년도안되 병자호란을 당했습니다

십대때 임진왜란을 겪은사람이 나이들어 정묘호란, 병자호란까지 겪었던건데 병자호란의 끔찍함에 비하면 임진왜란은 그래도 나았던거라고 할정도로 병자호란은 조선백성들에게 엄청난 큰 피해를 입혔다고합니다

 

일제시대때 수많은 처녀들과 장정들이 끌려가 성노예로, 광산 노예로 착취당한것처럼 그때도 똑같았다고합니다 화냥년의 어원도 그때부터 생겨났다죠 조상들은 자기들이 잘못해서 백성과 여자들이 끌려가 그런 치욕을 당하게 햇으면서도 갖은 고생끝에 겨우 탈출해 돌아온 여자들을 화냥년이라 모욕하고 더럽다 내팽겨쳤습니다

 

몽골의 징기스칸은 힘없을때 자기부족이 습격당하여 혼자 도망쳤지만 이후 돌아와 적장의 아이를 밴 아내를 용서하고 심지어 내가 나약해서 그렇던거라고 아무 문제삼지 않았다죠 또한 그렇게 태어난 아이에게도 정식 아들로 인정을해주고 이후 같이 전장을 누볐습니다 누가더 현명했는지를 떠나 기득권층이라면 혹은 남자라면 응당 어떻게해야하는지를 보여줬다고봅니다

 

우리 조상들이라고 다 우대하고 떠받을게 아니라 잘한것 잘못한것을 밝히고 교육해야한다봅니다 교훈을 얻어야 뒤이어 또 그런 참상을 막을수 있고 발전할수 있는것이죠

교과서엔 실리지 않을정도의 어리석고 치욕적인 전투가 종종있었는데 병자호란 쌍령 전투가 유명하다고합니다   4만에 달하는 조선군이 고작 300기의 청나라 기병에게 패퇴했다 

 

 

 

교과서엔 실리지 않은 치욕, 쌍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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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령 전투라는 거 들어 봤느냐? 아마 못 들어 봤을 거다. 네가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해도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으니 알 턱이 없을 거야. 1637년 음력 1월 3일 벌어진 우리나라 전쟁 역사상 최악에 가까운 참패다. 워낙 전쟁이 잦았고, 이기고 지는 일이 흔했던 우리 역사지만 쌍령 전투만큼 참담하게 진 전투도 드물어. 언젠가 얘기해 준 용인 광교산 전투는 일본군의 기습에 5만 대군이 무너져 내리기는 했지만, 그 군대가 몰살당한 건 아니었어. 일본군 기록에도 "쫓아서 흩어 버렸다."고 나올 정도로 줄행랑을 쳤다는 편이 맞을 거야. 하지만 쌍령 전투는 전멸에 가까워. 그런데 그들은 적군에 의해 죽은 게 아니야. 병자호란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조정은 팔도에 영을 내려 근왕병을 이끌고 집결하도록 하지. 근왕병이라야 농민들에게 창이나 활 들려준 엉성한 부대였지만 어쨌건 팔도 감사와 병마 절도사들은 부랴부랴 관내의 장정들을 긁어모아 임금이 피신해 있는 남한산성을 향해 행군했어.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병력이라면 역시 땅 넓고 인구도 많았던 경상도 병력이었지.


경상도는 병영만 좌병영, 우병영 두 곳이 있었고 기록마다 많이 엇갈리긴 해도 최고 4만(연려실기술 기록), 못해도 2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걸로 추정돼. 전사한 지휘관들을 봐도 경주 출신에 백의종군한 무관 손종로, 남해안의 창원 부사 백선남, 안동 출신 선약해 등등 다양한 지역이 망라돼 있으니 거의 경상도 전 지역에서 총출동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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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입에 단내나는 강행군을 거쳐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를 거쳐 경기도에 진입한다. 경상 좌 병사는 허완, 우 병사는 민영. 머릿수는 그런대로 채웠으니 나름의 자신감도 있었겠지. 그런데 이 시기도 그렇지만 요즘도 쪽수는 전쟁의 기본이지 전부가 아니야. 임진왜란 이래 조선군 장수들이 가장 취약한 부분 중 하나는 정보전이었어. 척후병만 제대로 내보냈어도 범하지 않을 실수를 무시로 한 건 그 대표적인 예지. 여기서도 그랬어. 경상도 군은 척후 한 번 내보내지 않고 쌍령에 이른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는 이미 조선군의 근왕병이 사방에서 몰려 온다는 것을 알았고 대책을 세워 두고 있었지. 남한산성을 포위한 ·10만 청군 가운데 일부가 쌍령으로 남하한다. 그런데 경상 좌 병사 허완은 다음과 같은 인물이었어.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 사람들을 보면 질질 짜기부터 했다."


-연려실기술-



그는 부대 배치를 이상하게 해. 진 외곽에 훈련이 덜 된 조총부대를 배치하고 그 다음에 정예 사수를, 그리고 창검으로 돌격해서 싸우는 살수 부대를 맨 후방에 배치한 거야. 이건 허완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심사였다고 봐야 할 것 같아. 이에 까무러치게 놀란 부하 장수들이 항의하자 허완은 이렇게 대답한다. 


"안돼. 정예 사수들이 얼마 없지 않나." 


그럼 맨 앞의 초보 사수들은 뭐 화살받이 칼받이란 말인가.


쌍령 앞을 흐르는 개천을 해자 삼아 목책을 둘렀는데 문제는 청나라 군대가 낮은 곳으로 돌격해 들어오지 않고 산등성이를 타고 남하해서 고지대로부터 짓쳐들어왔다는 거. 상식적으로 낮은 곳 목책은 신경 써서 높게 쳤겠지만, 높은 지역의 목책은 허술했겠지? 북한산성 성벽이 그렇듯 말이야. 청나라군은 조선군의 허를 찔러서 고지대에서 조선군을 내리 몰았어. 많은 수도 아니었어. 수백 명의 기병이었고 그 중에도 수십 명이 앞으로 나선 것이었지만 전방의 초보 사수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총을 난사해서 적에게 제대로 된 피해도 주지 못한 채 화약이 떨어져 버리고 말아. 애초에 화약 아낀다고 열 발 정도 쏠 화약만 지급했었거든. 옛날 가투할 때로 빗대면 1학년들이 화염병을 엉뚱한 데다 던져 버린 통에 정작 백골단 쳐들어올 때 빈손이었던 꼴을 상상하면 되겠다.


몇몇 용감한 사람들이 앞에 나가서 활을 쏘며 독전했지만 이미 총알 사라진 쇠막대기의 무용함을 아는 군중은 격하게 흔들리지. 그들의 머리 위로 청나라군의 돌격이 시작된다. 경상 좌 병사 휘하의 군대는 완전히 무너져 내려. 기록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최악의 모습은 이랬어.


조선군은 높은 데서부터 밀고 내려오는 청나라군에 쫓기면서 서로서로를 밟아 죽이게 돼. 목책을 넘어야 살 길이 보였으니 일시에 낮은 지대의 목책으로 몰렸고 그중 힘없는 자들은 넘어지고 힘 있는 자들은 그걸 짓밟고 목책에 매달렸지.


낮은 쪽 목책은 당연히 높게 지어져 있었고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기어올랐어. 그런데 막상 올라서고 보니 목책 바깥쪽은 또 까마득했어. 하지만 뒤돌아설 수도 없었던 게 꾸역꾸역 뒷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올라오고 있었거든. 에라 내사 모르겠다. 병사들은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리지만, 태반이 추락사하고 말아. 목책에 오르다가 밟혀 죽고 목책에서 뛰어내려 머리 깨지고 허리 부러져 죽은 시신들이 목책 안팎에 산처럼 쌓이고서야 살아남은 병사들이 그들을 디딤돌 삼고 계단 삼아 목책 넘어 도망갈 수 있었다니 참사도 이만하면 세계사적 참사야. "골짜기가 구릉이 되도록 시체가 쌓였다."는 기록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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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군도 내리몰다가 내리몰다가 기가 막혀 웃었을 것 같다. 까오리팡즈들 뭐냐 깔깔깔. 가장 볼썽사나운 건 경상도 좌 병사 허완도 도망가다가 밟혀 죽었어. 어떻게 이런 인간이 병마절도사까지 됐을까. 이유는 인조반정 때문이었어. 별 볼 일 없던 사람이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줄을 잡아 반짝 출세를 했던 거지.


그 뒤를 이어 경상도 우 병사 민영의 진영으로 청군이 달려들었어. 민영의 부대는 그래도 허완의 부대보다는 나아서 정예 포수들이 일제 사격을 가해 청나라 군대를 움찔하게 했는데 여기서도 화약을 아낀다고 정예 포수들에게 딱 두 냥씩 (열 발 정도 쏠 수 있는)만 지급한 게 문제였지. 처처에서 "화약 도고! 돌아 삐겠다." 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수령들이 나서서 다시 화약을 분배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그 화약 더미에 불꽃이 튀고 폭발을 일으켜 수십 명이 몰살하고 화약도 날아가고 말아. 그리고는 또다시 시작된 도망과 압사의 연속. 경상도 해안가부터 태백산맥 줄기까지 경상도 방방 골골에서 박박 긁어온 수만 명은 증발하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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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일기에 기록된 병사들에게 화약을 2냥씩 지급했다는 대목



척후병 하나 제대로 내보내지 않음으로써 적의 위치와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실패한 정보력의 부재, 훈련 안된 군중을 머릿수 하나만 믿고 정예병 앞에 들이미는 우매함. (집회할 때도 가끔 보이지. 느닷없는 '청와대로 갑시다’'부류) 그나마 있는 전력을 '지도부' 사수를 위해 써 버리는 비겁한 아둔함, 지휘관 스스로 통제력을 상실하고 도망치다가 밟혀 죽는 참담함. 그리고 청나라군이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수를 스스로 밟아 죽인 조선 병사들의 얼굴에 가득했던 비루함. 역사 교과서에 싣기도 싫을 만큼 황당한 참패를 그려낸 요소들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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