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역사에서 배운다/1636년 병자호란

영화 속 남한산성, 역사 속 병자호란

화이트보스 2017. 10. 15. 11:07


영화 속 남한산성, 역사 속 병자호란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황동혁 감독)의 한 장면. [사진 CJ E&M]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황동혁 감독)의 한 장면. [사진 CJ E&M]

영화 ‘남한산성’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을 맞아 청군에게 포위된 산성 안에서 조선 사람들이 마주해야 했던 고통과 갈등, 울분과 냉소를 실감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고립된 채 춥고 배고팠던 산성의 47일을 응시하는 관객들은 문득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며 전율한다. ‘북핵’으로 비롯된 일촉즉발의 위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중국의 사드 보복, ‘혐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본의 무시,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트럼프의 강공까지. 나라 안팎이 온통 지뢰밭인 ‘현실’ 말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본 정치인들은 영화 속 장면을 저마다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하여 상대 정파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데 열을 올린다.
 

17세기 명ㆍ청나라 패권 교체기
강대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조선
명분에 사로잡혀 냉정한 현실 못 봐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의 한계
내부 반란 겹치며 군사력 고갈
청군 기마대 닷새 만에 서울 점령

주화파 주장, 다수 척사파에 밀려
조선 머물던 명나라 고관 황손무
“청과의 맹약 지켜라” 충고도 무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한반도는 주변에서 힘의 교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조짐이 나타날 경우 어김없이 위기를 맞았던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병자호란은 그 중에서도 전형적인 사례였다. 17세기 초 조선이 ‘천자국’으로 섬기던 패권국 명이 쇠퇴하고, ‘오랑캐’로 깔보던 신흥강국 청이 떠오르는 격변 속에서 일어난 전란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의 결과는 처참했다. 국왕 인조는 청 황제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고, 십만 이상의 백성들이 청으로 끌려갔다. 추위 속에 2천리 가까운 길을 걸어야 했던 포로들은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었다.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 포로들 중에는 발꿈치를 도끼로 잘린 사람도 있었다.  
 
침략전쟁을 일으켜 참혹한 살상과 납치를 자행한 청의 죄악은 역사적으로 결코 망각될 수 없다. 하지만 조선의 문제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명과 청, 두 강대국의 패권 교체기를 맞아 국가와 백성을 지켜내는 데 실패했던 조선 지배층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근거 없는 자신감과 허풍  

인조정권은 1623년 ‘인조반정’이란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 광해군은 명을 받들면서도 후금(後金-청의 전신)을 포용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내정의 실패 때문에 무너졌다. 궁궐 건설 등 토목공사에 골몰하다가 재정을 망치고 민심을 잃은 것이 몰락의 결정타였다.  
 
집권 직후 인조정권은 광해군이 후금을 포용하려 한 것을 ‘패륜행위’로 성토하고 ‘명을 도와 오랑캐 후금을 토벌하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은 평안도 철산 부근 가도(島)에 주둔하던 명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적극 지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군량 등 군수물자를 대주고, 모문룡의 병력들이 평안도 지역을 활보하도록 방임했다. 그 비용이 국가 예산의 3분의 1을 넘어설 정도였다. 모문룡은 조선의 지원을 믿고 “후금을 쳐서 조선을 지켜주겠다”고 허풍을 친다.

인조반정 직후 조선의 재정과 군사력은 극히 열악했다. 더욱이 1624년 이괄(李适)의 반란까지 겪으면서 재정과 군사력은 사실상 고갈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인조정권이 ‘후금 토벌’을 다짐하고 모문룡에 대한 과도한 ‘퍼주기’를 멈추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인가? 우선 집권 직후 갖게 된 근거 없는 자신감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반정’으로 잡은 권력을 ‘반란’ 때문에 잃을 뻔 했던 위기를 겪으면서 명으로부터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다짐’과 모문룡의 ‘허풍’에 격앙된 후금은 1627년 조선을 침략했다. 정묘호란이었다. 후금군을 감당할 수 없던 조선은 강화도로 파천했다가 후금과 맹약을 맺는다. 조선이 ‘아우’가 되어 후금을 ‘형’으로 섬기겠다는 맹약이었다. 광해군이 후금을 포용하려 한 것을 ‘패륜’이라 매도했던 인조정권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고정관념에 매몰된 경직성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임금’ 명을 잘 섬기고 ‘형’ 후금과도 잘 지내려고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끼여 있는 약소국이 두 강대국 모두와 잘 지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강대국끼리 서로 계속 다투거나 싸울 경우, 약소국은 결국 선택의 기로로 몰리게 된다. 실제로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명과의 대결에서 연전연승했다. 자신감이 넘친 후금은 조선으로부터 명과 동등한 대접을 받으려고 덤볐고, 위기에 처한 명은 조선을 이용하여 후금을 견제하려고 획책했다. 그 와중에 조선은 ‘샌드위치’의 처지로 내몰렸다.
 
급기야 1636년, 후금의 추장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치고 제위에 오른다. 같은 해 2월, 칭제(稱帝) 사실을 알리려 청나라 사신 용골대 일행이 입국했을 때 김상헌과 삼학사(三學士)로 대표되는 다수의 척화파는 ‘정묘년의 맹약을 끊고 용골대의 목을 벤 뒤 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최명길로 대표되는 소수의 주화파는 ‘일단 정묘년의 형제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전쟁을 피하자’고 호소했다. 주화파는 척화파에 중과부적이었다.
 
척화파는 나라가 망하더라도 청과 싸워야 하는 명분으로 명에 대한 조선의 의리를 강조했다. 그런데 척화, 주화의 논쟁이 한창이던 1636년 9월, 명에서 황손무(黃孫茂)란 고관이 입국한다. 그가 온 것은 조선을 설득해서 청과 싸움을 붙이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던 황손무는 귀국하면서 조선 조정에 ‘청과의 관계를 끊지 말고 정묘년의 맹약을 지켜 국가를 보전하라’고 촉구한다. 입국 당시와는 백팔십도로 달라진 태도였다. 조선의 현실을 냉철하게 살폈던 그는 조선이 명을 도와 청을 공격하기는커녕 스스로를 지키기에도 벅찬 상황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황손무는 조선이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워 청과 모험을 벌이다가 망할 경우 명이 더 위태로워진다고 보았다. 그나마 조선이 망해 버리면 청은 더욱 자유롭게 명을 공략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이 미약하나마 살아남아 청의 배후에서 꿋꿋이 버텨주는 것이야말로 명에 대해 의리를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했던 셈이다.
 
하지만 조선의 척화파들은 강경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청은 ‘오랑캐이므로 무조건 물리쳐야 한다’ ‘오랑캐를 포용하려 했으므로 광해군을 몰아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그들은 황손무의 충고에도 귀를 닫는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나사 풀린 국정, 실종된 책임의식  

자신들의 목을 치라는 주장까지 터져 나오는 조선의 살벌한 분위기에 놀란 용골대 일행은 청으로 도주한다. 청 사신들이 도주하자 조선 조정은 곧 전쟁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1636년 3월, 인조는 척화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묘년에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오랑캐’ 청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내용으로 교서를 반포한다.      
 
그런데 같은 해 3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다. 청과 단교하겠다는 결정과 청군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담은 인조의 교서를 평양으로 가져가던 경호원들이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히는 사태가 빚어진다. 국왕의 명령을 전하는 전령이 자국 영토 안에서, 그것도 허겁지겁 도망치던 적국 사신에게 붙잡혀 교서를 탈취당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오랑캐와 결전’을 부르짖는 나라의 국정 전반에서 나사가 풀려 있다는 반증이었다.
 
조선의 ‘본심’을 확인한 청은 1636년 12월 9일, 침략을 개시했다. 청군 기마대는 압록강부터 서울까지 500㎞를 닷새 만에 주파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당시 황해도에 있던 조선군 최고사령관 김자점은 청군의 침략 소식을 제때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또 변변히 싸워보지도 않고 후퇴를 거듭했다. 김자점, 심기원 등 인조가 총애했던 공신들은 막상 전쟁이 터지자 결전은커녕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데 골몰하는 무책임한 본심을 드러낸다.  
 
청군이 무인지경을 내달리듯 돌격해 오면서 인조는 애초 강화도로 파천하려던 계획을 접어야 했다. 수많은 척화파 신하가 청과 결전을 벌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결정적인 순간 조선은 화살 한 발 변변히 쏘아보지도 못한 채 남한산성으로 내몰렸던 것이다.     
 
17세기 초, 조선은 명청 패권 교체의 흐름을 저지하거나 거스를 수 있는 역량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명과 청,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약소국이자 종속변수였다. 그런 조선이 살아남으려면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극히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던 결과의 처참함은 영화 ‘남한산성’을 통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병자호란 무렵이 떠오를 만큼 안팎의 상황이 엄중한 오늘, 여전히 ‘끼여 있는’ 우리의 생존 조건은 무엇일까? 예민하게 주변을 살펴 타자의 동향을 파악하고, 과거를 성찰하여 내부를 추스르고, 주도면밀하고 전략적인 외교를 펼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역사평설 병자호란』 저자

DA 300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조선시대 정치사와 국제관계사를 전공했다.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광해군』『임진왜란과 한중관계』 등 국제관계를 다룬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