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가운데 조선왕릉이 있습니다. 세계에 현존(現存)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벽한 형태를 보존하고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습니다. 그런데 이 왕릉을 자세히 보면 특이한 점을 한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펴볼까요?
맨 먼저 경기도 구리시에 동구릉(東九陵)이 있습니다. 동구릉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문종-선조-현종-영조-헌종 등 6명의 왕이 잠들어있지요. 인근 홍유릉(洪裕陵)에는 비운의 왕이라 할 고종과 순종이 있고 사릉(思陵)에는 광해군, 광릉(光陵)에는 세조가 묻혀 있습니다. 태강릉(泰康陵)에 명종, 의릉(懿陵)에는 경종, 헌인릉에 태종과 순조, 선정릉에 성종과 중종, 서오릉(西五陵)에 예종-숙종, 서삼릉(西三陵)에 인종-철종, 경기도 파주 장릉에는 인조가 묻혀 있습니다. 경기도 여주에는 세종과 효종이 묻힌 영릉, 강원도 영월에는 단종이 묻힌 장릉이 있지요.
이밖에 왕비들이 있는 김포 장릉과 파주 삼릉과 온릉 및 연산군 묘가 있습니다. 황해도 개성에는 정종이 묻힌 후릉이 있고요. 이 왕릉들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왕릉들이 대부분 서울과 서울을 주변으로 한 경기도 북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릉이 수도 한양을 경계로 ‘백리 이내’여야 한다는 불문율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숨진 단종의 강원도 영월의 장릉을 예외로 하면 특이하게도 특이하게도 사도(思悼) 세자의 융릉(隆陵)과 그 아들 정조의 건릉(健陵)만은 수원 남부 화성에 있습니다.
맨 먼저 경기도 구리시에 동구릉(東九陵)이 있습니다. 동구릉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문종-선조-현종-영조-헌종 등 6명의 왕이 잠들어있지요. 인근 홍유릉(洪裕陵)에는 비운의 왕이라 할 고종과 순종이 있고 사릉(思陵)에는 광해군, 광릉(光陵)에는 세조가 묻혀 있습니다. 태강릉(泰康陵)에 명종, 의릉(懿陵)에는 경종, 헌인릉에 태종과 순조, 선정릉에 성종과 중종, 서오릉(西五陵)에 예종-숙종, 서삼릉(西三陵)에 인종-철종, 경기도 파주 장릉에는 인조가 묻혀 있습니다. 경기도 여주에는 세종과 효종이 묻힌 영릉, 강원도 영월에는 단종이 묻힌 장릉이 있지요.
이밖에 왕비들이 있는 김포 장릉과 파주 삼릉과 온릉 및 연산군 묘가 있습니다. 황해도 개성에는 정종이 묻힌 후릉이 있고요. 이 왕릉들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왕릉들이 대부분 서울과 서울을 주변으로 한 경기도 북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릉이 수도 한양을 경계로 ‘백리 이내’여야 한다는 불문율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숨진 단종의 강원도 영월의 장릉을 예외로 하면 특이하게도 특이하게도 사도(思悼) 세자의 융릉(隆陵)과 그 아들 정조의 건릉(健陵)만은 수원 남부 화성에 있습니다.
- 정조와 아버지 사도세자가 나란히 잠들어있는 건릉(왼쪽)과 융릉(오른쪽)이다.
- 융릉은 조선의 왕릉가운데 4대 명당에 속한다.
- 건릉의 전경이다. 융릉이 비해 뭔가 답답한 느낌이 든다.
- 건릉과 비교하면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은 사방이 툭트인데다 뒷편의 산세가 예사롭지않다.
그분이 말한 바로는 융릉은 능을 감싸는 청룡과 백호가 겹친 곳이며 천하 명당이라는 겁니다. 또 능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이 능이 용(龍)이 여의주를 물고 희롱하는 격의 형세라는 겁니다. 용은 원래 승천(昇天)해야 하는데 하도 여의주가 예뻐서 하늘로 가지 않고 희롱하느라 소일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왜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세상을 뜬 그가 이렇게 좋은 곳에 묻힌 걸까요? 관리인은 “아들 정조께서 전국의 풍수사를 총동원해 찾았다”고 합니다.
- 정조의 초상화 뒤로 펼쳐진 십장생 병풍. 하지만 정조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조선은 급격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삼촌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사방이 물길로 막힌 영월로 보내진 뒤 곧 살해당했습니다. 17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 것이지요.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왕의 시신이 강에 둥둥 떠다니는데도 아무도 거두지 않았지요. 이것을 보다 못한 영월호장 엄흥도라는 분이 삼족(三族)이 멸할 각오로 몰래 시신을 거둔 뒤 도을지산에 매장했는데 원래 이곳은 자기 가족묘를 쓰려고 준비해둔 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엄흥도 일가의 가족묘가 천하의 명당이라는 것입니다.
- 장안문은 오래도록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뜻이다. 정조는 이곳에서 왕조의 새로운 도약을 꿈꿨을 것이다.
- 장안문안에서 한 외국인이 사진을 찍고있다. 수원화성은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 비각은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순조 33년(1833)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런 걸 보면 몇 가지 느낌이 듭니다. 첫째 일개 호장 엄흥도는 의로운 일을 해 사후(死後)이긴 하지만 판서로 추증됐다는 점, 둘째는 엄흥도의 충절을 기린 영조가 정작 제 아들을 죽이고 그 손자 정조가 천하명당 융릉을 세웠다는 게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사실 제가 융건릉을 가게 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최근 수원 화성(華城)에 흠뻑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십 대 중반에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은 그곳을 처음 가본 게 부끄럽지만, 주말마다 성곽을 한 발씩 힘주어 밟으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中편에 계속>
- 수원 화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화홍문이다. 홍은 무지개를 뜻하는데 밑으로 쏟아져내린 물결에서 무지개가 피었을 것이다.
-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일대는 화성 관광의 백미다.
-
정조의 역작, 화성이 세워진 이유
-
- 문갑식
- 편집국 선임기자
- E-mail : gsmoon@chosun.com
-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언론정보학 석사. 1988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편집부-스포츠부-사회부-정치부를 거쳐 논설위원-기획취재부장-스포츠부장을 거쳐 현재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사회부기자 당시 중국민항기 김해공항 추락-삼풍백화점 참사-씨랜드 화재-대구지하철화재 등 대형사건의 현장을 누볐다. 이라크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을 취재했으며 동일본 대지진때 한국기자로선 처음 현장에서 들어가기도 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문갑식의 세상읽기’ ‘문갑식이 간다’같은 고정코너를 맡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 미타(三田)캠퍼스 초빙교수, 미국 하와이대학 마노아 캠퍼스 미래학과정(삼성언론재단)에 이어 영국 옥스포드대학 울프슨칼리지 방문교수로 연수중이다. 공교롭게도 섬나라에서만 수학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
-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수료
<上편에서 계속>
영국-프랑스에서 본 고성(古城) 못지않게 화성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행궁(行宮)에서 시작해 창룡문(蒼龍門)-방화수류정(訪花随柳亭)-화홍문(華虹門)까지 두 번째는 팔달문(八達門)-장안문(長安門)-화홍문까지 답사했지요.
영국-프랑스에서 본 고성(古城) 못지않게 화성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행궁(行宮)에서 시작해 창룡문(蒼龍門)-방화수류정(訪花随柳亭)-화홍문(華虹門)까지 두 번째는 팔달문(八達門)-장안문(長安門)-화홍문까지 답사했지요.
- 방화수류정에서 한 선생님이 초등학생들을 놓고 정조의 암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 재미있는 설명에 빠져들었다.
- 방화수류정은 지붕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옛 건물 뒤로 현대도시의 스카이라인이 교차한다.
- 화성행궁의 좌익문 앞에 서면 중양문-봉수전이 정확히 일치한다.
- 화홍문 밑의 수로는 지금 시민들의 산책로가 됐다.
다른 설에 따르면 12살 때 인현왕후를 따라 들어왔다는 것인데 변치않는 사실은 그의 신분이 ‘무수리’였다는 것입니다. 무수리는 한자로 ‘수사(水賜)’라고도 하는데 어원은 몽골어입니다. ‘소녀’라는 뜻이라는데 고려말 공주의 여종을 뜻했습니다. 훗날 숙빈 최씨가 되는 최 무수리는 매우 예뻤는지 숙종의 총애를 받았기에 장희빈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 난관에서도 1693년 첫아들 영수(永壽)를 출산해 숙원(淑媛)이 되지만 영수는 두 달 만에 숨집니다. 둘째 아들인 영조는 이듬해 태어났습니다.
최 무수리가 숙종의 눈에 든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야밤에 숙종이 궁을 거니는데 불켜진 방을 발견했습니다. 들어가 보니 무수리가 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지요. ‘무슨 일이냐’는 숙종의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지요.
- 이 독특한 건물을 공심돈이라고 한다. 적의 동태를 살피는 역할이다.
이유는 인현왕후가 1701년 죽은 뒤 숙종이 ‘제2의 장희빈’을 겁내 궁녀가 왕비가 되는 걸 막았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무수리 어머니를 둔 영조는 즉위한 이후에도 숱한 구설수에 시달렸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스스로 더 완벽해지려고 노력했겠지요. 사도세자는 영조의 아내 가운데 정성왕후 서씨-정순왕후 김씨-정빈 이씨 소생이 아닌 영빈 이씨 소생입니다. 영조는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사도세자, 화평옹주-화협옹주-화완옹주 등 1남3녀를 낳았지요. 그밖에 숙의 문씨는 두 딸을 낳았습니다.
원래 영조는 맏아들 이행을 세자로 삼았지만 이행은 10살 때 죽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7년을 기다린 끝에 사도를 낳았으니 얼마나 귀여워했겠습니까?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자가 된 사도의 본명은 선(愃), 자는 윤관이며 호는 의재(毅齋)였습니다. 어릴 적 사도는 무척 똑똑했다고 합니다. 행동거지도 의젓했고 3살 때 아버지 영조와 대신들 앞에서 효경(孝經)을 읽고 ‘천지왕춘(天地王春)’이란 글을 썼는데 무척 힘있는 필체였다고 합니다. 이걸 본 대신들이 서로 그 글을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 연무대에서 바라본 창룡문. 드넓은 풀밭사이로 대중교통수단이 오가는 모습이 이채롭다.
체인의 공부라는 것은 사도가 저녁상을 받다 영조가 부르자 입안의 밥을 즉시 뱉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묻자 사도는 “소학(小學)에 이르기를 입에 밥을 물었으면 뱉어야 된다고 하였다”고 했는데 이걸 본 영조가 ‘체인’이란 말을 꺼낸 거지요. 무수리에게서 태어난 콤플렉스를 느끼던 영조는 스스로 엄격하려했고 역시 왕비가 아닌 궁인에게서, 즉 서자(庶子) 격으로 태어난 사도에게도 자신과 같은 길을 걷도록 했지만,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예술과 무술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 수원 화성의 남대문격인 팔달문이다. 서울의 숭례문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다.
즉 영조가 사도를 선의왕후를 모시던 궁인들로 하여금 보살피게 했는데 여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집권 내내 받았는데 그런 의혹을 떨쳐내려 선의왕후 측 여인에게 자기 아들을 맡기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 달리 선의왕후 측 궁인 가운데 최상궁과 한상궁이라는 여인은 사도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를 업신여기고 모자(母子)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이런 내용은 정조가 쓴 ‘현륭원 행장’에도 나타납니다.
- 연무대는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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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를 둘러싼 갑론을박 희생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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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갑식
- 편집국 선임기자
- E-mail : gsmoon@chosun.com
-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언론정보학 석사. 1988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편집부-스포츠부-사회부-정치부를 거쳐 논설위원-기획취재부장-스포츠부장을 거쳐 현재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사회부기자 당시 중국민항기 김해공항 추락-삼풍백화점 참사-씨랜드 화재-대구지하철화재 등 대형사건의 현장을 누볐다. 이라크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을 취재했으며 동일본 대지진때 한국기자로선 처음 현장에서 들어가기도 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문갑식의 세상읽기’ ‘문갑식이 간다’같은 고정코너를 맡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 미타(三田)캠퍼스 초빙교수, 미국 하와이대학 마노아 캠퍼스 미래학과정(삼성언론재단)에 이어 영국 옥스포드대학 울프슨칼리지 방문교수로 연수중이다. 공교롭게도 섬나라에서만 수학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
-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수료
<中편에서 계속>
마침내 1755년부터 사도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입니다. 그해 4월28일 사도를 진찰한 약방 도제조 이천보는 “동궁(사도)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는데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그렇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하지요. 증세는 점점 심해져 아버지 영조를 만나는걸 기피하고 옷을 입기 싫어하며 훗날엔 발작증세까지 보입니다. 1760년부터 사도는 나인들과 환관들을 죽이고 자살을 기도했으며 마침내 자기 아들인 은전군을 낳은 경빈 박씨를 때려죽이기에 이릅니다.
마침내 1755년부터 사도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입니다. 그해 4월28일 사도를 진찰한 약방 도제조 이천보는 “동궁(사도)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는데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그렇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하지요. 증세는 점점 심해져 아버지 영조를 만나는걸 기피하고 옷을 입기 싫어하며 훗날엔 발작증세까지 보입니다. 1760년부터 사도는 나인들과 환관들을 죽이고 자살을 기도했으며 마침내 자기 아들인 은전군을 낳은 경빈 박씨를 때려죽이기에 이릅니다.
- 성벽에 난 구멍으로 내다본 수원의 모습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영조는 매우 분개했는데 평소 성품이 강직한 경빈 박씨는 사도의 비행을 자주 시아버지에게 고해바친 것입니다. 이걸 안 사도는 화가 나 1761년 자기 아내를 살해하는데 이런 사실은 사도의 다른 잘못과 함께 1년 뒤 나경언(羅景彦)에 의해 영조에게 보고되지요. 이렇게 사도세자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자 집권 노론은 환희작약합니다. 사도가 소론을 중용해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도의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반격을 가할 기회를 맞게 됐다고 판단한 거지요. 나경언의 고발은 바로 이런 구도에서 나온 겁니다.
그렇다면 나경언의 고발은 무슨 내용일까요? 첫째 사도가 왕손의 어미, 즉 경빈 박씨를 죽였으며 둘째 여승(女僧)을 궁으로 불러들여 풍기를 어지럽게 했고 셋째 서로(西路)에 행역했으며 넷째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사도가 시전 상인들에게 돈까지 빌렸다는 내용은 훗날 영조가 대신 돈을 갚은 데서 밝혀지지요. 서로에 행역했다는 말은 관서(關西)지방을 관람했다는 뜻인데 이것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세자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예를 들면 기생파티 등)이나 반역을 꾀했다는 암시로 보면 무방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영조의 허락 없이 떠난 북성의 유람도 비슷한 맥락이겠습니다. 영조는 나경언의 고발이 있은지 얼마 안 돼 사도를 뒤주에 가둬 죽였으며 나경언 역시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하지요.
일각에선 사도세자가 노론과 소론의 권력 다툼에서 희생양이 됐다는 설도 있는데 여기서 제가 인용하고 싶은 것은 역사평론가 이덕일 선생이 쓴 ‘사도세자의 고백’이라는 책에 나오는 특이한 분석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는데 골자를 볼까요? 이씨는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가해자라고 주장합니다. 즉 혜경궁 홍씨는 풍산 홍씨 일파를 대변하는 여걸인데 자신의 가문과 노론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희생시켰다는 거지요. 사도세자는 사실 소론의 지지를 받았기에 이런 설이 나오겠지요.
- 화성행궁의 정전 봉수전. 효자였던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 화성행궁의 정전 봉수전의 내부 모습이다.
이런 파장만장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정조는 어릴 적부터 스트레스, 즉 울화병이 극심했다고 합니다. 철저한 할아버지의 눈에 들어야 하고 11살 때 아버지의 비극을 견뎌내야 했으니 왕이 되면서 비극으로 점철된 한양을 떠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정조가 이런 결심을 한 건 반대파가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 즉 죄인(사도)의 아들(정조)은 군왕이 될 수 없다며 나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조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이야말로 자기의 정통성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조는 1776년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설치했으며 13년 후 양주 배봉산의 사도세자 무덤이었던 영우원(永祐圓)을 앞서 말한 수원의 현륭원, 즉 지금의 융건릉으로 옮깁니다. 아버지의 능을 옮긴 지 5년 뒤 정조는 다시 화성건설에 나섭니다. 정치개혁을 위한 자신의 새로운 지역적 기반, 그것이 바로 화성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수원 화성을 눈여겨보게 된 것일까요? 거기엔 17세기 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혜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한양이 싫었던 정조는 신도시 화성으로의 천도를 꿈꿨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며 한양 방비도 생각했습니다. 즉 한양을 중심으로 북쪽의 북한산성과 개성의 대흥산성, 서쪽의 강화도성과 문수산성, 동쪽의 남한산성에 남쪽의 수원 화성을 더하면 한양의 외곽방비체제가 완벽하게 확립된다고 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정조는 중국 한당(漢唐)시대의 수도 장안(長安)을 모델로 삼았으며 몇몇 건물의 이름도 차용했습니다. 장안문-신풍루-장락당 등이 그것이지요. 수원 화성은 2년9개월이라는 초단기간에 완성됐는데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 수원화성의 정문인 장안문. 화성은 중국 장안을 본 딴 신도시였다.
정조 사후 조선은 어린 순조가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휘둘리면서 세계사에서 뒤처지게 됐고 정조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76년 만에 일본과 강화도 수호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다시 34년만에 일본에 병합되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우리의 멀지않은 역사였습니다.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