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3·1절에 돌아온 두 장의 사진

화이트보스 2016. 2. 29. 11:25



3·1절에 돌아온 두 장의 사진

심남일 의병장이 사용하던 ‘湖南義將’ 인장 인영

日軍이 남겨… 장흥 사학자 양기수씨 최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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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 섬에서 혹사당하던 정신대 여인 사진

남도일보 최혁 주필 발굴…관련자료 수집·정리 시급

일제의 만행 되새겨 나라바로세우는 교훈삼아야


남심일 의병장 인장 인영
‘湖南義將’(호남의장)이라고 새겨져 있는 인장의 인영. 심남일 의병장 체포나 처형에 관련됐던 일본군 대위가 호남의장 인장을 찍은 뒤 기념으로 누군가에 넘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장흥 향토사학자 양기수씨가 지난 1988년 외조부 유품에서 발견해 보관해 왔던 것이다.

1908~1909년 사이 전남의 3대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심남일(沈南一) 선생 인장(印章)의 인영(印影)이 최초로 공개됐다. 또 일제에 끌려가 남태평양 북마리아나 제도(諸島) 티니안(Tinian) 섬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던 조선여인들의 사진이 발굴됐다.

‘湖南義將’(호남의장)이라는 한자 네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 심남일 의병장 인장 인영은 전남 장흥의 향토사학자인 양기수(梁基洙)선생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정신대(挺身隊)로 추정되는 조선 여인 사진은 ‘일제 조선인 징용사’를 취재하기 위해 이달 초 사이판을 방문했던 남도일보 최혁 주필이 티니안 역사책에 수록돼 있는 것을 찾아낸 것이다.<관련 기사 7면>

심남일 의병장은 함평 출신 유생으로 호남창의회맹소의 기삼연 의병부대에서 활동했다. 기삼연 선생 등이 일본군에 체포당해 총살당하자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해 일제에 항거했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1908년 음력 3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능주 석정,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 1909년 음력 7월의 장흥 봉무동 전투 등 13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일본 군경 400여명을 사상시켰다.

심남일 인장(인영)은 심남일 의병장이 연합작전을 위해 전남 동부지역의 의병부대와 연락을 취할 때, 또 1909년 7월께 일제의 체포를 피해 의병부대를 소규모로 분산하고 활동을 잠시 중단하던 당시 사용한 신표(信標)로 추정된다. 심남일 인장이 찍힌 이 인영은 지난 1988년 양기수씨가 일제 초기 장흥재판소에 근무했던 외조부 박진옥(朴珍玉)씨의 집(장흥읍 남외리 16번지)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것으로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이 인영은 실제 인장을 찍은 것으로 인장의 크기는 5㎝×5㎝이다. 심남일 의병장의 인영이 찍혀진 종이에는 ‘韓國派遣步2. 12中隊 優竹 大尉之賜 全南暴徒首魁沈南一之使用 印影’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한국파병 2대대 12중대 유우다케 대위가 주다 전남폭도괴수심남일이 사용한 인영’이라는 내용이다. 일본군 보병 2대대 12중대장이던 유우다케가 준 인영이라는 것은 밝히고 있지만 수령자가 누구인지는 미상(未詳)이다.

티니안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TINIAN-A Brief Story’(저자 Don A, Farrell) 23쪽에 실려 있는 사진은 티니안에 도착한 ‘조선인 가족’의 모습을 찍은 것이다. 저자 돈 패럴은 일본인들의 티이안 섬 사탕수수 농장경영에 관한 글 가운데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가족에 관한 사진을 실었다. 돈 패럴은 이 사진을 설명하면서 ‘조선인 농부 가족이 티니안에 도착했다’(Some Korean farming families also arrived on Tinian.)라고만 적었다.

돈 패럴은 일본인의 기록을 토대로 해 ‘조선인 농부가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진속의 인물구성은 정상적인 가족사진과는 거리가 멀다. 10명의 여자 중 중앙 우측의 한 여자아이를 빼놓고는 모두 15세 안팎의 어린 소녀들로 보인다. 일제가 운영하던 사탕수수 농장에 10대 소녀들이 한데 모여 있다는 점에서 정신대 소녀였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 속에 보이는 남자 3명은 이들을 감시·감독하던 일본인들로 추정된다.


사진 속 여인들은 모두 지친 표정이다. 이역만리 먼 곳으로 끌려와 밤낮으로 중노동에 시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앙다물고 치켜뜬 눈에서 분노를 느낄 수 있다. 날카로운 사탕수수에 몸이 베이는 것을 막기 위해 긴 옷을 입고 있지만 남루하기 이를 데 없다. 발과 발목을 보호하기 위해 게다(일본인들이 사용했던 신)에 천을 둘러쳤지만 허름하다. 날카로운 수수에 많이 다쳤을 것으로 보인다. 맨발인 소녀의 모습이 딱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사진이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남성진 기자 nam@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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