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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군도(南洋群島)의 조선 여인들

화이트보스 2016. 3. 2. 10:59


남양군도(南洋群島)의 조선 여인들

최혁  |  hchoi@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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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3.01  11: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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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군도(南洋群島)의 조선 여인들

<최혁 주필>

지난달 사이판에 다녀왔다. 사이판에 10여일을 머물면서 기자는 조선인징용자들의 흔적을 찾아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사이판은 그리 크지 않은 섬이다. 공항이 위치한 남쪽 끝에서 자살절벽이 있는 마피 포인트 북쪽 끝까지 자동차로 40분이면 갈 수 있다. 섬 가운데 타포차우산이 자리하고 있어 동서쪽으로는 길이 끊긴 곳도 있지만 돌아가더라도 30분 안쪽이다. 그렇지만 기자에게 사이판은 넓고 넓었다. 선인들의 흔적을 찾아야할 곳이 너무도 많아서였다.

사이판에서 조선인 징용자들의 흔적이 공식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북쪽 해안도로 인근에 위치해 있는 ‘태평양 한국인 위령 평화탑’이다. 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와 사이판한인회가 1981년 세운 탑이다. 평화 탑 앞쪽에 놓인 비에는 평화탑 건립에 관한 취지와 추념사업 목적이 새겨져 있다. 독자들에게 현장감을 생생하게 전하려면 비에 새져진 건립취지와 추념사업 목적을 그대로 옮겨 싣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다.

< 건립취지: 1905년 한국의 주권을 일본제국에 빼앗기고 한국의 젊은 남녀들이 한민족을 대신하여 징병 징용 여자정신대라는 명목으로 200만명이 태평양 여러 곳으로 끌려가 처참하게 혹사당하다가 억울하게 희생된 한 맺힌 동포영령들을 위령하기 위해 1975년부터 추념 사업을 추진해오다가 역사의 자성 평화애호의 상징으로 건립한 것이다.

추념사업목적:일본 제국이 한국을 침략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저지른 피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해 과거사를 자성복원하고 민족 자존자주 자립을 다지고 지구촌화를 실천하는 범민족운동이자 범인류 평화애호운동이다.>

위령 평화탑 묘역은 전체적으로 잘 정돈돼 있다는 느낌이다. 두 개의 사자석상 앞 쪽으로 10여개의 작은 추모비들이 자리하고 있다. 사이판을 찾은 한국의 각종 단체, 혹인 개인들이 세운 것들이다. 대구걸스카우트 연맹, 공군사관 62기 사관생도, 한국빅토리연예인축구단, 구리시 리틀야구단 등이 세운 것들이다. 평화탑에 담긴 사연들을 알고 너무도 마음이 아파 귀국한 뒤 뜻을 모아 추모비를 제작, 한국에서 보내온 것들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광주·전남지역의 단체나 기관장들이 세운 비는 보이지 않는다. 광주·전남지역에서도 많은 이들이 왔다 갔으련만…앞으로는 이 지역의 많은 분들이 자그마한 비라도 보탰으면 하는 마음이다. 정치인들이 비싼 혈세 들여 유럽으로 미국으로 관광이나 다름없는 해외연수를 가는 대신 역사의 해외현장을 찾아 민족정신을 높이는데 노력했으면 싶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여러 비문들을 읽다가 문득 동부화재 직원들이 세운 추모비의 비문에 시선이 멈춰진다.

< 남의 것 빼앗은 적 없는 어진 민족의 영혼들이/원치 않는 전쟁에 떠밀려/ 돌아오지 못할 땅에 뿌려지다// 응어리 진 한은 켜켜이 산호로 쌓이고/서러운 넋은 순백 포말로 남아…아! SAIPAN!//여섯 순년의 세월이 지나/ 칠천 오백 리 어머니 땅에서 온 후예들이/추념의 뜻을 모아 돌을 세우다. 2005년 3월 18일 동부화재 2004 연도상 참가단 일동>

연도상 참가자들이란 보험회사 설계사 중 실적이 높아 상을 받은 이들이다. 살림이 넉넉지 않은 ‘아줌마’들도 십시일반 뜻을 모아 비를 세우고 있는데 허구 헌 날 해외나들이를 다니는 정치인과 지역자치단체장들은 도대체 뭐하는지를 모르겠다. 평화탑에서 북쪽 해안도로로 조금 더 올라가니, 일본군 최후사령부 유적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녹이 슬대로 슨 전차와 야포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굴 속의 참호 터도 스산하다. 동굴이 있는 벼랑은 자살절벽이다.

1945년 7월 미군이 사이판을 거의 점령하자 일본군은 군인과 민간인들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미군들에게 붙잡히면 겁탈을 당한 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에 여자들을 포함한 1천여명의 민간인들이 최후사령부 절벽과 해안의 만세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아마도 그중에는 사이판으로 끌려와 일본군 복장을 입고 원치 않는 싸움에 휘말려 들어갔던 조선인 청년들도 있었을 게다. 어쩌면 위안부로 잔인한 세월을 살았던 조선인 처녀도 일본군의 창칼에 떠밀려 시퍼런 바다로 몸을 던졌을 지도 모른다.

사이판 취재도중 사진 1장을 발견했다. 사이판 근처 티니안섬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던 조선여자들의 사진을 우연히 찾아낸 것이다. 사진속의 조선여자들은 15세 안팎이다. 모두 지치고 그늘진 얼굴이다. 더운 날씨임에도 사탕수수의 날카로운 잎에 몸을 보호하기 위해 소매까지 내려오는 긴 작업복을 입고 있다. 남루하다. 또 발목을 가리기위해 일본 신발 게다에 천을 칭칭 감았지만 허술하기만 하다. 조상들이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에 먼 곳까지 끌려온 여인들이다. 사이판의 징용·정신근로대 현장을 돌아본 뒤에 맞는 3·1절의 감회가 새삼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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