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 / 논설실장 독일 유학 중이던 청년 김종인은 ‘라인강의 기적’을 이끌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파독 광부·간호사 앞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눈물의 애국가를 부른 것도 이 시절이었다. 경제학 교수 출신으로 장관을 거쳐 총리에 오른 그를 지금도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다. 자신도 그렇게 해보려고 나름의 프로그램까지 준비했다고 한다. 실제로 귀국 뒤 교수·장관을 거쳐 정권과 정파를 넘나들며 ‘그 구상’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 이후에는 ‘낭인 무사’처럼 떠돌았다. 2012년엔 박근혜 대통령을 돕더니 이제는 반대편에 가담했다.
그런데 현 야권에 특별한 연고도, 지분도, 기여한 바는 더더욱 없는 그가 야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한 달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될 때만 해도 ‘대주주’ 문재인 전 대표의 ‘
바지사장’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대표’ 직함에 선거대책위원장을 겸하고, 총선까지 한시적이긴 하지만 ‘비상대권’으로 공천권까지 장악하더니 통합 제안으로 국민의당까지 흔들고 있다. 햇볕정책 등 당 정체성까지 바꾸자고 한다. 그런데도 100명이 넘는 더민주 의원이 고양이 앞에 쥐처럼 절절매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좋든 싫든 김 대표가 외치는 ‘야당 개조론’에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민심을 정확히 읽고 특유의 고집과 노회함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친노·친문(親盧·親文)의 ‘소나기 피하기’ 전술 때문이다. 어려운 시기에는 대리인을 내세우고, 결정적 시기가 오면 실권(實權)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이 대표적이다. 외형상 양측의 지향이 같으니 가속도가 붙고 있지만 언젠가는 등을 돌려야 한다. 따라서 그 귀결이 야당 개조일지, 친노당의 ‘친문당’ 변색에 그칠지, 제3의 길이 될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현란해 보이는 김 대표의 정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에르하르트와 함께 조부인 가인(街人)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법조인이자 정치지도자였던 가인의 차남인 김 대표 부친은 1944년 변호사 개업을 앞두고 요절했다. 김 대표가 4세 때였다. 당연히 할아버지의 절대적 영향 아래서
성장했다. 가인은 나라 잃고 길거리를 헤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지어 사용했다고 한다. 건국 이후 대법원장으로 9년여 재임하는 동안 이승만 대통령과 갈등하면서 사법부 독립을 지켜냈지만, 안타깝게도 1950년 골수염으로 왼무릎 이하를 절단한 ‘척각(隻脚)의 대법원장’이었다.
4·19 이후 인현동 자택은 중요한 정치 협상이 벌어지는 정치의 중심이었다. 윤보선 장면 허정 이범석 박순천 등 정치지도자들은 물론 군부의 송요찬까지 찾아왔다. 가인은
건강과 고령을 이유로 자신을 낮추면서 오직 ‘건강한 야당’ 만들기에 매진했다. 그러나 5·16 이후엔 군정(軍政)에 맞선다는 의미의 ‘민정(民政)당’을 창당해 대표최고위원을 맡는다. 76세였다. 이합집산 끝에 통합 야당인 ‘국민의당’을 창당, 수석대표위원에 선임됐으나 대선 후보 단일화 실패로 분열되고 말았다. 당시 전당대회나 선거일 직전까지 벼랑 끝 협상이 벌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20대 초반의 김 대표는 이런 정치를 어깨너머로 배웠다.
우연이겠지만 김 대표도 76세에 제1야당의 회생 책임을 맡아 집권 가능한 야당을 만들고, ‘준비된 대통령’을 키우는 것이 목표임을 밝히고 있다. 가인은 실패했는데, 김 대표는 성공할 수 있을까. 그 첫걸음은 야당의 ‘2004년·2012년 체제’ 청산이다. 2004년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무더기로 진입한 운동권 출신들이 3선 의원이다. 2012년에는 종북세력과 연대했으나 아직 깨끗이 절연하지 못했다. 총선이 끝나면 김 대표 임기도 끝난다. 아무리 물갈이를 해도 친노·친문 의원들이 수십 명 살아남을 것이다. 곧바로 ‘김 대표 이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보궐선거를 통해 문 전 대표도 복귀할 것이다.
한국 야당은 중도로 움직일수록 집권에 가까웠고, 좌 편향될수록 집권에서 멀어졌다. 김 대표는 자신을 영입한 세력을 베어야 하는 힘든 ‘배신의 전투’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가인의 유업(遺業)이기도 한 ‘수권(受權) 야당’ 초석을 놓을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정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기는 셈이 된다. 반대로 ‘비례대표 5선’ 신기록의 정치 낭인으로 남을 수도 있다. 김 대표의 선택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