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3.15 08:56 | 수정 : 2016.03.15 09:00
일본 정부는 2006년 북한 1차 핵실험을 기점으로 조총련을 통해 일본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돈·사람·물자의 흐름을 제한하는 일련의 제재 조치를 취했다가, 2014년 5월 북한이 일본인 납치 문제를 재조사하겠다고 합의하자 제재 일부를 풀어줬다. 그러다가 이번에 북한이 또 핵실험을 하자 지난 2월 역대 최고 수준으로 다시 제재의 고삐를 죄었다. 조총련 관계자가 북한에 갔다 일본에 돌아오지 못하게 막고, 대북 송금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게 대표적이다. 인도적 목적의 10만엔 이하 송금만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법무성은 지난 11일 재일동포 가운데 '조선적(朝鮮籍)' 보유자 숫자가 작년 말 기준 3만4000명이라고 발표했다. 조선적이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일본에 살면서도 한국·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지금까지 1945년 일본 패망 당시 '조선 국적'을 가지고 버틴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3만4000명이라는 건, 현역 조총련 8만명도 절반 이상이 몸만 조총련에 있지 국적은 한국·일본으로 갈아탔다는 뜻이다.
조총련 선전간부를 지내다 돌아선 고충의(71)씨는 작년 10월 도쿄에서 열린 조총련 상공회(商工会) 70주년 기념행사 때 조총련을 호되게 꾸짖고 다섯 가지 변화를 요구하는 글을 실명으로 배포했다. '조총련 사무실에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화를 떼라. 북송선 타고 북한에 들어간 재일동포가 자유롭게 오가게 하라. 조총련 강령에 핵무기 금지 조항을 넣어라. 조총련계 금융기관에 맡긴 동포들의 막대한 재산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밝혀라. 조총련 간부들이 조선노동당을 탈당하거나, 당원 아닌 사람이 간부를 맡아라.'
조총련 측이 고씨가 돌린 종이를 서둘러 회수했지만, 파문이 컸다. 고씨는 "조총련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조총련이 나쁘다는 말을 못 하니까 내가 했다"며 "조총련은 한때 나의 전부를 바쳤던 조직이지만, 지금의 북한은 여중생이 TV 카메라 앞에서 '크면 수소폭탄 만드는 과학자가 되겠다'고 말하는 나라"라고 했다.

"지금까지 송금액 총 1조엔 추정"
조총련은 80년대 말~90년대 초반까지도 막강했다. 말 그대로 '평양행 현금 파이프'였다. 북송선을 타고 간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혈육을 위해 송금했다. 재일동포 상공인들이 조선노동당과 조총련에 헌금했다. 조총련 차원에서 수익사업도 했다. 오가타 시게타게(緖方重威·84) 전 일본 공안조사청장은 1994년 중의원에서 "조총련을 통해 북한에 들어가는 돈이 한 해 600억~800억엔"이라고 했다. 조총련계 조선대학 교수를 지낸 박두진(75) 코리아국제연구소장은 "수십년간 조총련을 통해 북에 흘러간 엔화가 누적으로 1조엔은 될 것"이라고 했다.
15년前부터 급격히 민심 잃어
한국의 경제 발전 알려진데다
北의 일본인 납치 인정으로 충격
하지만 1990년 중반 이후 조총련은 급격히 민심을 잃었다. 북한에선 수십만명이 굶어 죽는데, 한국에선 올림픽과 월드컵이 열렸다. 안 그래도 회의(懷疑)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2002년 '정신적인 폭탄'이 떨어졌다. 김정일이 제 입으로 일본인 납치를 인정한 것이다. 조총련을 깊이 아는 동포는 "모든 게 '일본 정부의 거짓말'이라더니….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당시 조총련은 되레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현금 조달에 매달렸다. 공산권 붕괴와 한국 발전에 초조해진 북한이 핵개발을 목표로 삼고, "개인 단위 송금으로 모자란다. 기업 단위 헌금을 받아오라"고 조총련을 쥐어짰기 때문이다. 조총련은 한편으로 동포들을 닦달하고, 다른 한편으론 자체 돈벌이에 나섰다. 파친코 점포 40여곳을 운영하고, 속칭 '알박기'라 불리는 부동산 투기도 했다. 하지만 거품 경제가 무너지고, 부패와 부실이 겹쳤다. 조총련 사업이 망하면서 조총련에 자금을 댄 '조긴(朝銀) 신용조합'까지 무너졌다. 조긴은 1952년 동포들이 차별을 이기고 살아남으려고 한푼 두푼 모아 세운 금융기관이다. 한때 예금 총액이 2조5000억엔에 육박하고 일본 전역에 38개 지역 조합을 뒀지만, 1997년 오사카 조긴을 시작으로 2001년까지 도미노처럼 파산했다. 조총련계 기관지 기자로 활동하다 환멸을 느끼고 돌아선 김찬정(79)씨는 "조총련은 재일동포의 권리를 지키는 단체로 출발했지만 이젠 동포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조직, 없어져야 할 조직"이라고 했다.
재일동포들 "우리말 가르치려면 조총련 조선학교 보낼 수 밖에…"
아이들은 밝았다. 모르는 어른이 지나가도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했다. 자기들끼리 대학 어디로 갈까 진로 얘기도 하고, 요즘 뜨는 한국 영화 '동주' 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교실마다 정면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화가 걸려 있고, 교장이 김일성 3대를 꼬박꼬박 "주석님, 장군님, 원수님"이라고 불렀다. '광명절'(김정일 생일) 기념 포스터와 '미국 제국 박살내자'는 구호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취재팀이 찾아간 도쿄 기타구 조선중·고급학교는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 일본 속의 '미니 북한' 같았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 10대들이 2016년 3월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로동당의 말단 기층조직은 당세포'라고 적힌 교과서를 배웠다. 여학생은 검정 치마저고리, 남학생은 일본식 검정 교복 차림이었다.
조총련 숫자가 53만명에서 8만명으로 쇠락하는 동안, 조총련계 조선학교도 같은 길을 걸었다. 1975년 일본 전역에 161곳이던 조선학교가 지금은 68곳 남았다. 학생 수도 4만6000명에서 6000명대로 쪼그라들었다.

조총련 숫자가 53만명에서 8만명으로 쇠락하는 동안, 조총련계 조선학교도 같은 길을 걸었다. 1975년 일본 전역에 161곳이던 조선학교가 지금은 68곳 남았다. 학생 수도 4만6000명에서 6000명대로 쪼그라들었다.
조선학교는 조총련 마지막 버팀목
그렇다고 조선학교를 얕보거나 불쌍하게 여기는 건 '오판(誤判)'이라고 복수의 한국 정부·민단 관계자와 재일동포 연구자들이 말했다. 조선학교 덕분에 조총련이 동포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고, 지금도 조선학교가 조총련의 마지막 버팀목이란 얘기였다. 재일동포치고 가족 중에 조선학교 졸업생 없는 사람은 없다. 한국 사람들이 동창회 하듯 재일동포도 '오사카 조선학교 ○기' '고베 조선학교 ○기'끼리 뭉친다. 조선학교 네트워크에서 왕따당하면 동포 사회에 발붙이기 힘들다.
조선학교 교실은 '미니 북한'
김일성·김정일 초상화 걸어놓고
"한국의 성장은 외부 덕분" 폄하
동포 사회가 아직도 조선학교를 완전히 외면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말 교육'이다. 민단계 학교는 일본 전역에 네 곳뿐이고, 동포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한국어 교육의 분량과 수준도 조선학교에 못 미친다. 재일동포 A(71)씨는 "조총련이 싫어서 딸들을 민단계 학교에 보냈더니 한국말을 못한다"며 "조총련은 싫지만 조선학교는 없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문제는 우리말 교육에 딸려오는 '북한 교육'이다. 올해 일본 모 조선학교 고급부 졸업생 B군의 교과서가 이 점을 한눈에 보여줬다. 가령 '현대조선력사' 과목은 1980년대 한국에 대해 군사독재,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 6월 항쟁만 크게 다루고, 그 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됐다는 건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한국이 이룬 압축 성장은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3저 현상으로 일시 경기가 회복됐다"고 깎아내렸다. 반면 김일성 사망에는 전체 145쪽 중 4쪽을 할애했다. "온 나라가 피눈물에 잠겼다" "유엔 사무총장이 '력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라고 성명을 냈다" "경애하는 장군님(김정일)께서 인민들의 심정을 헤아려 애도 기간을 연장했다"는 문장이 이어졌다.
조총련 관계자 집안에서 태어나 조선학교를 졸업한 30대 재일동포 C씨는 "쭉 그렇게 배우니까 어렸을 땐 산타 할아버지 보고 싶어 하듯 김일성 만나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환상이 깨진 건 고3 때다. C씨가 조총련계 조선대학 대신 일본 대학에 가겠다니까 교사가 "자네는 반역자다. 부모님 직장이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C씨는 "대학 하나로 '반역자' 소리까지 하는 교사들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했다. C씨는 일본 대학에 진학해 전문직으로 성공했고, 지난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조총련 전문가들은 "조선학교와 조총련은 별도 조직이 아니라, 조총련 지도부가 직·간접적으로 조선학교 교육과정과 교원 인사를 좌우하며 철저하게 지배한다"고 했다. 이런 구조가 일본 내 혐한(嫌韓) 세력에게 빌미를 준다. 산케이 신문은 지난 4일 "전국 지자체들이 올해 조선학교에 총 32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보도했다. 이틀 뒤 극우파 일본인 시위대 80여명이 "일본의 평화를 위협하는 조선학교를 해체하라"고 외치며 도쿄 도심 긴자를 행진했다. 표면적으론 보조금 시위지만 한국에 대한 온갖 막말이 쏟아졌다.
재일동포들 동창관계로 얽혀
시대착오 교육 알면서도 못 끊어
"한국이 우리말 교육 지원 시급"
북한은 1955년부터 최근까지 460억엔 넘는 돈을 조선학교에 지원했다. 취재 중 만난 여러 동포는 "조선학교에 문제가 많은 건 우리도 안다. 하지만 한국은 뭘 해줬냐"고 했다. 조총련계 조선대학 교수를 지낸 박두진(75) 코리아국제연구소장은 "정말 답답하다"고 했다. "최근 일부 한국 시민단체들이 수시로 조선학교 돕기 모금 행사를 벌입니다. 과거 정권 때는 심지어 한국 정부까지 국민 세금으로 지원금을 줬고요. 거기서 뭘 가르치는지 알고 하는 짓입니까." 동포 사회가 본국에 바라는건 조선학교 돕기가 아니라, 조선학교를 대체할 우리말 교육 시스템을 갖춰주는 일이란 얘기였다.

북송선 탔던 70代 "北의 환영인파, 추운날에도 양말 못신어… 속은줄 알았죠"
재일동포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73)씨는 17살이던 1960년 일본 니가타 항에서 청진행 북송선(北送船)에 올랐다. 1959~1984년까지 재일동포 9만3440명이 북송선을 탔다. 조총련 전문가 김찬정(79)씨는 "조총련의 가장 극악한 행위는 동포들을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속여 북한에 보낸 것과 그들을 '인질'로 한 대북 송금"이라고 했다.
"지상낙원에 간다고 생각했지만 배에서 내리기도 전에 잘못 온 걸 알았어요. 청진항은 추웠어요. 수천 명이 환영 나왔는데 양말 신은 사람이 없었어요." 한국보다 북한이 잘사는 시기였다. 동포 사회도 민단보다 조총련을 신뢰했다. 조총련과 일본 적십자가 공동으로 북송 사업을 했다. 일본 언론도 좌·우 모두 환영했다. 아사히신문은 "귀환 희망자가 늘어난 건 '완전 취업·생활 보장'이라고 알려진 북한의 매력 때문"이라고 했다. 산케이신문은 "1000명 가까운 귀환자를 따뜻한 방에 수용하는 모국의 경제력에 (북송된 사람들이) 안심했다"고 썼다.
가와사키씨는 부모에게 '따라오면 안 된다'는 말을 어떻게 전할지 고민했다. 다른 사람들은 출발 전에 미리 '연필로 편지를 쓰면 오지 말라는 뜻, 펜으로 쓰면 오라는 뜻'이라고 암호를 정해뒀다고 했다. 가와사키씨네는 그런 생각을 못 했다. 조총련을 믿었다. 빙빙 돌려쓴 편지를 가족이 용케 알아듣고 북한에 오지 않았다. ▷기사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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