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재
논설위원
‘노이즈 마케팅’의 증거는 여럿 있다. 이름부터 논쟁적이다. 왜 양적완화인가. 실체는 ‘한국은행을 통한 구조조정용 자금 동원령’에 가깝다. 강봉균과 팀을 이뤄 새누리당 경제 공약을 짜고 있는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어느 누가 선거 때 구조조정을 말할 수 있겠나. 하던 수술도 메스를 놓는 판이다. 하지만 구조조정이야말로 지금 한국 경제엔 절체절명의 과제다. 그런데 ‘한국은행 특별융자’ 식으로 발표하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양적완화라고 했다”고 말했다. 노림수는 적중했다. 양적완화는 선거판 최대 정책 이슈가 됐다. 그러자 새누리당은 7대 공약을 매일 하나씩 발표하기로 했던 시간표도 며칠 미뤘다. 논란이 더 부풀 수 있도록 시공간을 열어준 것이다.
배경은 그렇다 치고 중요한 건 본질이다. 양적완화란 ①금리가 너무 낮아 더 낮출 수 없을 때 ②중앙은행이 국채를 사서 돈을 푸는 것으로 ③비전통적 방법으로 불리지만 ④원조 일본에 이어 미국·유럽·중국까지 가세해 이젠 흔한 수법이 된 ‘무차별 돈풀기’다.
그런데 강봉균의 양적완화는 다르다. 에둘러 표현하자면 ‘늑대의 탈을 쓴 양’이다. 양적완화란 탈부터 안 맞는다. ①한국은행의 기준금리는 연 1.5%며 ②국채가 아닌 산업은행의 산업금융채권(산금채)을 사는 것으로 ③1997년 외환위기 때도 한은 특융이란 이름으로 구조조정 자금을 지원한 적이 있는 ‘전통적 방법’이며 ④기업·가계 구조조정에만 쓰는 ‘차별적 돈풀기’다. 구조조정엔 돈이 든다. 쏟아지는 실업과 과잉 설비를 처리해야 한다. 일시적으로 돈 흐름이 막히는 ‘경제의 동맥경화’가 올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게 구조조정용 실탄이다. 수술 때 쓰는 마취약과 같다.
‘양적완화’의 앞날은 어떨까.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침묵·신중 모드다. 애초 “강봉균 개인 생각”이라고 일축했던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공약은 존중한다”고 한발 물러섰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중앙은행이 특정 정당 공약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피해갔지만 “한국은 선진국과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청와대는 분명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야당은 “불법적 조치”라며 반대 수위를 높였다. 여당 안에도 우군이 없다. 이를테면 ‘지금은 득표에 도움이 되니 두고 보자’는 정도다. 강봉균은 선거가 끝나면 떠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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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양적완화는 결국 용도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 한국 경제는 10년째 소득 2만 달러, 중진국 함정에 빠져 있다. 저출산·고령화·저성장이 뉴노멀이 되고 있다. 수출·소비를 통한 성장 전략의 한계도 뚜렷하다. 그런데도 기껏 내놓는 수단이란 게 정부·여당은 수십 년째 기승전추경·돈풀기요, 야당은 닥치고 분배·경제민주화다. 우리 경제를 살릴 진짜 수단은 여야의 대척점 그 중간 어디쯤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구조조정을 통한 구조개혁이란 건 이제 삼척동자도 안다.
세계가 가지 않은 길로 가고 있다. 누군들 두렵지 않으랴. 가보지 않았으니 갈 수 없다는 건 이유가 될 수 없다. 늑대의 탈을 뒤집어 썼다지만 강봉균의 양적완화는 공이 크다. 선거판에 묻혀 장사 지낼 뻔했던 구조조정 이슈를 번듯하게 살려냈다. 양적완화 논쟁이 아니었다면 구조조정은 내년 대통령 선거까지 하염없이 미뤄지다 잊혀졌을 것이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