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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천년 후의 희망을 묻고 있는가

화이트보스 2016. 8. 12. 11:21



누가 천년 후의 희망을 묻고 있는가
매향의 기억
민물과 바닷물 개펄에
오랫동안 향나무 묻어
향중의 최고 침향제작

미륵불 하생할때 향 공양
민중들 소원 빌기도

매향비는 대부분
바닷물 있는곳 인근 세워져
입력시간 : 2016. 08.12. 00:00



문화재자료 제198호인 영암 채지리 선덕매향비와 안내문. 영암군 제공

그날따라 영산바다 황혼이 붉디붉었다. 보름사리인데도 잔물결이 일었다. 바람이 찼다. 다시 바람의 달 2월이 시작되고 있지 않은가. 잘게 부서지는 파도들 사이로 바삐 움직이는 일군의 그림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린내 나는 바람을 마주한 향도들이었다. 훗날 영산강으로 불리게 될 영산해변. 포구에서 갯고랑으로 열 몇 개의 사래 긴 전답을 따라 들어간 곳이었다. 향도들의 잔기침 소리가 간간이 들릴 뿐, 왁자지껄하거나 큰소리가 나지도 않았다. 인근 남녘의 향도들이 모두 운집했으리라. 그 수가 수백을 헤아리고도 남음직 했다. 경상 지역의 사천에서는 천명이 훨씬 넘는 향도들이 모였다더라. 향도의 우두머리와 강변 사찰 화주가 말없이 손짓으로 지휘를 했다. 나지막하게 지시하는 말들에 위엄이 묻어났다.

일군의 무리가 옮기는 것은 육중한 향나무 토막이었다. 대웅전의 샹량목으로 써도 충분할 크기였다. 황혼을 받아 붉은 땅이 된 개펄 위로 나지막한 노랫소리들이 내려앉았다. 부엉이 떼 우는 듯한 중음의 목도소리였다. 노랫소리는 크지 않았음에도 긴장감이 배어 나왔다. 아홉 가닥의 굵은 칡 줄로 세 번을 벼린 목도줄 껍질들이 힘에 부치는지 파르르 떨었다. 향도들의 맨발자국이 모래개펄에 얕은 웅덩이들을 만들 때마다 질펀거리거나 뻐럭거리는 소리들이 수선스러웠다. 아마도 생바지락 깨지는 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 화주가 어깨를 크게 저어 쉬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직 이르다. 들물을 기다려야 한다. 목도를 내려놓고 궐련 한 대 피울 참을 넘겼다. 왜 들물을 기다리느냐고 묻는 이들은 없었다. 시작이며 발기라는 들물의 의미를 모르는 자가 뉘 있겠나. 해발 몇 미터라고 하더라. 산자락을 따라 눈길을 옮기니 강변 사찰이 있는 산등성이 해송 숲 사이로 빛바랜 맹감 잎들이 즐비했다.

시선을 영산해로 돌렸다. 모래개펄로부터 세 발 남짓 갯골 안쪽으로 들어간 자리. 민물과 갱물(바닷물)이 만나는 바로 그 자리. 일군의 향도들이 이미 파놓은 개펄 웅덩이가 보였다. 사실 일 년 한 철을 통틀어 보면, 민물과 갱물이 어디 한 곳에서만 만날 것인가. 한 달로만 봐도 삭망의 사리 때면 갱물이 산자락을 밀고 오르고 초여드레, 스무사흘 조금이면 민물이 무인도를 향해 내달려오지 않던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곳을 합수개옹이라고 불렀다. 산골짝을 타고 내려온 청정수와 아마도 황해 어디 심해를 차고 오른 바닷물이 만나는 꼭지점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개옹(갯골) 한 질 넘어 돔 바위 주변으로 깨작깨작 물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들물이었다. 향도들이 다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개펄은 순식간에 바다로 바뀌기 때문이다. 길게 파놓은 개펄 구덩이에 향목을 내려놓자마자 이내 바닷물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향도들은 한 삽씩의 개펄 흙을 웅덩이에 던져넣었다. 물이 점점 차오고 있었지만 분주하거나 당황해하지 않았다. 물이 거의 차올라 향나무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우두머리와 화주가 마지막 한 삽을 떠넣었다. 충청도 지방에서는 수륙재를 더불어 크게 지냈다고 하더라만 돌담 다듬는 석공마저도 감지덕지 구해야 하는 이곳 처지로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그럼에도 진중한 한 삽 한 삽은 그 어느 지역에 못지않은 장엄한 의식이었다. 그렇다. 어디서 많이 봤던 익숙한 풍경, 그것은 위난의 시대를 살았던 향도들 스스로를, 혹은 그 어지럽혀진 마음들을 장사지내는 집단 매장의식이었던 것이다.



산천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땅, 그 자리에 묻은 마음



왜 향나무를 개펄에 묻었던 것일까? 우리는 통상 이 의식을 매향이라고 하고 이 전말을 비석이나 암석 위에 새겨둔 것을 매향비라고 한다. 이렇게 묻어두었던 향나무를 침향이라고 한다. 침향은 오랜 세월 개펄에 묻혀있었기 때문에 그 단단하기가 최고이며 향 또한 비교할 데 없이 좋다고 하더라. 그래서 사리함을 만들 때도 사용하고 목불을 만들 때도 사용해왔다고. 상고해보면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향을 피우기 시작하던 때로부터 연원된 것이다. 침향나무가 없는 우리로서는 교역상품이나 선물들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양나라 사신이 향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미 신라시대부터 침향나무와 백단나무를 수입했으며 왕실이나 귀족들에게 애호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매향의식도 우리에게 없던 침향을 만들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을 것이란 해석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매향과 관련해 세간에 알려져 있는 정보는 천년 후에 도래할 미륵세상을 염원하는 의례였다는 것으로 집중된다. 한국매향비의 내용을 분석했던 전 목포해양대 이준곤 교수에 따르면 미륵불이 하생할 때 향을 공양하기 위한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미륵하생신앙을 바탕으로 하면서 향도 등의 개별집단들의 소원을 비는 의례였다는 것. 물론 이 중에는 왕과 국가를 위한 매향의 성격도 나타난다. 주로 미륵신앙과 민간신앙의 교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국적으로는 현재 약 15곳 정도의 매향비가 발굴되어 있다. 이중에서 남도지역이 압도적이다. 충청, 강원, 경상의 소수를 빼면 거의가 남도지역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이렇다 할 해석을 한 사람들은 아직 없다. 전라도 사람들이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는 등으로 독해하는 것은 단편적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개펄에다 매장하는 방식과 침향으로 재생하는 맥락에서 찾고 있다. 구차한 설명들은 이 시리즈가 끝나갈 즈음 윤곽을 드러내지 않을까? 천년 후에 재림할 메시아는 미륵신앙 뿐만 아니라 기독교신앙으로도 견주어 해석해볼 수 있다. 문제는 지금 여기, 우리의 해석 아니겠는가. 그렇다. 다시 천년을 기다릴 마음들에 관한 것이다. 누가 다시 천년 후에 올 세상을 위하여 그 희망을 묻고 있는지, 지금은 닫힌 바다 영산강변에 앉아 바람을 맞는다. 천년이 지났으나 오신다던 미륵은 오지 아니하였다. 천년이 다시 지나면 또 어떤 미륵이 오실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예수라는 이름의 미륵일지 관음이라는 이름의 미륵일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바랄 뿐이다. 내 아이들의 아이들이 적어도 전쟁 없는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세상이 미륵 세상이지 않을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