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문화/정치, 외교.

김기춘이 기뻐한 단어, ‘건전’ [중앙일보] 입력 2017.0

화이트보스 2017. 2. 3. 14:54


김기춘이 기뻐한 단어, ‘건전’

PDF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
김승현 사회2부 부데스크

김승현
사회2부 부데스크

김기춘(78)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구치소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팔순을 앞둔 그가 가슴에 수인번호를 붙이고 특별검사 사무실에 나오는 모습은 도대체 무엇이 저 지경을 만들었나 생각하게 한다. 구속되기 직전까지도 그는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를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확신범’일 가능성이 높다. 특검팀이 작성한 공소장에 이런 추정을 가능케 하는 단서들이 보인다.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정부부처 인사에 불법 개입한 혐의(직권남용·강요)로 기소된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공소장에서 김 전 실장은 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한다. 공소장 내용은 재판에서 사실관계를 다시 검증받겠지만, 특검팀이 확인한 내용에는 그의 비서실장 재임 기간(2013년 8월~2015년 2월)에 벌어진 10여 개 장면이 나온다.

김 전 비서실장은 화가 난 듯 평소보다 거친 표현을 사용했다.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풍자한 연극 ‘개구리’에 대해 “용서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2013년 9월). 신동철 전 비서관에게는 “좌파 지원은 많은데 우파 지원이 너무 없다. 문화·예술계 지원 기금 운영 개선 방안을 빨리 마련하라”고 질책했고(2014년 4월), 김종덕 당시 문체부 장관에겐 “편향적인 것을 세금으로 지원한다”고 혼을 냈다(2014년 10월).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낸 ‘Mr. 법질서’의 목소리는 추상같았을 것이다.

DA 300


그런 그가 유일하게 기뻐한 장면은 김 전 장관의 대면보고 때다(2014년 10월 21일). 보고서 제목은 ‘건전 문화·예술 생태계 진흥 및 지원 방안’. 지원 심사와 재검증, 사후 통제, 심사위원 자격 기준 등을 강화하는 내용이었다. 김 전 실장은 기뻐하면서 “내용대로 추진하라”고 말했다. 김 전 실장과 박근혜 대통령을 화나게 한 문화계의 모든 독소가 ‘건전’이라는 해독제로 해결된다고 믿었을까.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선별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은 김 전 실장에게 편안한 웃음을 안겼다. 문체부엔 건전 콘텐트 활성화TF가 구성됐다.

말 그대로 건전한 뜻을 지녔지만 이 시대의 많은 시민은 ‘건전’이라는 단어에서 김 전 실장과는 다른 뉘앙스를 느낀다. ‘어허야 둥기둥기~우리 동네 꽃동네~’로 시작하는 1970~80년대 건전가요가 먼저 떠오른다. 가수들의 음반에 의무적으로 국가 번영 등을 주제로 한 노래를 넣게 한 이 제도는 대표적인 권위주의의 산물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대통령과 그 비서실장의 뜻에 따라 ‘건전한 일’을 해야 했던 문체부 공무원 중 일부는 “비겁한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차라리 좌천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1, 2인자는 단어 하나도 공유하기 힘든, 어쩌면 구치소 담벼락보다 더 높은 담을 쌓고 있었다.

김승현 사회2부 부데스크


[출처: 중앙일보] [노트북을 열며] 김기춘이 기뻐한 단어, ‘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