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재발견/민족사의 재발견

미당의 시 무등을 보며

화이트보스 2017. 3. 22. 15:42


물질적·정신적인 허기를 달래며 쓴 미당의 시

카테고리 : 생기발랄 한국말 | 작성자 : harrison

[ 생기발랄 한국말 54 ] 

 

< 무등을 보며 > 

 

- 서 정 주 시인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 * *

 

서정주(1915~2000) 시인은 자신이 쓴 950편의 시 중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시는 ‘무등을 보며’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고향 전북 고창에 있는 그의 묘소엔 미당의 자필로 새겨진 ‘무등을 보며’ 시비(詩碑)가 우뚝합니다. 

 

6.25 전쟁의 생채기가 생생하게 신음을 내던 1954년. 미당은 광주 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전쟁을 치르며 살아남은 한국인이 가장 가난했던 시절입니다. 당시 교수 봉급이 신통찮은 수준이란 점을 감안하면 미당 역시 삶이 꽤 고달팠을 겁니다. 조선대는 무등산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궁핍했던 미당이 웅대한 자태로 빛고을 광주를 내려다보는 무등산을 삶의 모형으로 삼아 이 시를 썼으리라 짐작됩니다. 

 

광주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어머니의 품속입니다. 전라도의 상징도시 광주에서의 삶은 무등산을 바라보고 무등산과 대화하는 여정입니다. 광주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무등산을 생각합니다. 압제의 시대에 피의 참극이 자행되고 모두가 침묵을 강요당할 때도 ‘무등산은 알고 있다’ 이 한 문장을 되뇌며 광주 시민들은 긴 세월을 견뎌냈습니다. 

 

남루(襤褸)는 누더기입니다. 미당은 가난이란 우리 몸에 걸친 헌 누더기 같은 것일 뿐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 다 가릴 수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현실적 궁핍이 몸과 마음의 근원적인 순수성까지를 덮어 가리지 못한다는 극단적 정신주의가 날카롭습니다. 인간의 본질이 물질적인 궁핍으로 인해 찌들기는커녕 오히려 그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해야 한다는 선비적 자존심이 번득입니다. 

 

시 속 무등산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청산. 갈매빛은 짙은 초록 빛깔 즉 무등산 수박색입니다. 시인은 푸른 무등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껴안고 살아남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향기 나는 난초)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고 설파합니다. 미당은 내면의 고백이나 관조가 아닌 생활인으로서 스스로에게 또 헐벗은 이웃에게 교훈적 잠언을 던진 것입니다. 

 

가난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난은 결코 낭만이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가난이 무능의 상징이자 수치가 되는 강퍅한 시대입니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궁핍했던 60여 년 전. 물질적·정신적인 허기를 달래며 쓴 미당의 시가 ‘오늘날의 가난’ 앞에서 휘청거리고 있는 우리에게 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