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사서[만주원류고]-신라 기원과 영토 |
- 만주원류고,고구려.백제.신라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어난 나라들 |
윤복현 객원논설위원, 2011-04-14 오후 04:3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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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과 한글보다는 기모노와 영어에 환장하겠다는 얼빠진 나라 각주1-고구려유민들이 신라로 귀속하였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후예 청나라인들이 고구려의 후예인 여진족의 나라가 되다보니 신라까지 고구려인들이 만들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사로의 변음이다.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부여공주(동명왕 고두막의 딸로 추정)로 이름은 파소다. 파소는 혼전임신을 하자, 혼전 남녀간의 간음행위는 처벌받는다는 부여법을 피하여 망명을 하게 되는데, 신라이전의 사로국은 부여에서 옥저를 거쳐 동해안을 타고 내려 온 부여세력이 경주지역의 진한6촌장들의 박혁거세을 왕으로 추대함으로 세운 나라이다. 그런데, 마한과 백제와 고구려의 제후국을 탈피하여 신라가 강성해진 배경은 고구려 무덤양식과 전혀 다른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이 증명하듯이 4세기 초원세력이 남하하여 신라의 권력을 바꾼데 있다. 따라서 1번 내용은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을 피하여 옥저로 이주한 고구려유민들이 남하하여 사로국으로 귀속하였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각주2-42년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의 후미를 치기위해 요동에서 서해를 건너 고구려에 망한 최씨 낙랑국 지역에 설치한 낙랑군을 의미한다. 평양지역에서 후한시대 인구조사 목간이 출토됨으로써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되었다. 요서지역에 설치된 전한의 한4군과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고구려에 멸망한 최씨 낙랑국 유민들은 신라와 가야로 망명하여 귀속되었다. 각주3-사로국 석탈해왕을 말하고 있다. [만주원류고]기록에 백제인으로 기록된 석탈해는 마한의 해상세력으로 남해를 지나 가야지역에 정착하려다가 가야와 충돌한 후에 경북지역 월성지역에 도착하여 박혁거세 세력과 정치연합을 이룬 후 석탈해 왕조를 형성한 세력이다. 지나 월주 신라방은 마한의 해상세력인 석탈해 왕조시기에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반도 신라인들의 대거 이주와 정착으로 신라방이 되었고, 지나지역의 백제담로를 차지한 고구려 문자명왕 때 월주지역의 신라인들이 천주지역으로 대거 이주당하였다. 각주4.5-신라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질문으로 신라의 권력교체와 관제개편을 의미한다. 이는 4세기 고구려와의 전쟁과정에서 동해안을 타고 남하한 모용선비족(전연)의 기마부대가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세우고 권력을 장악하고 모진에서 김원종으로 창씨개명한 법흥왕 때 법령공포.불교공인.군사개편 등 대대적인 개혁으로 국가재정과 농경지를 축내는 사치스러운 초원문화를 금지시키고 농경국가로 들어 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양서][만주원류고]기록 공히 법흥왕의 성씨가 모진에서 김원종으로 창씨 개명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울진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고 세운 울진의 공적비인 봉평비문에는 수 많은 모용씨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모용선비족의 권력찬탈에 사로국세력이 저항했으나 기마세력에게 진압당했다는 역사적 사료인 것이다. [사료]만주원류고 번역(부족, 신라-2회) : 당나라 제후국이 되어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다 隋(수나라 때)-隋書 新羅 或稱斯盧 其國傳祚 至 金真平 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髙祖拜 真平 為上開府 樂浪郡公 新羅王 大業以來 嵗遣朝貢 地多山險 雖與百濟搆隙 百濟亦 不能圖之隋東蕃風土記 新羅 金姓相承 三十餘葉 至今 亦姓金 『수서 隋書 』에는 “신라 또는 사로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 나라는 대를 전하여 김진평 金真平에 이르렀는 바, 개황開皇 14년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당나라)고조가 진평真平 에게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의 직함을 주었다. 대업大業 이래 매년 조공을 하였다. 지형은 산이 많고 험하다. 비록 백제와 사이가 나빴으나 백제 또한 이를 도모하지 못하였다.『수동번풍토기 隋東蕃風土記 』에는 “신라는 김씨가 서로 이어서 30여대인데 지금도 역시 성이 김이다”라고 되어 있다. 通考 隋文帝時 其王 姓金名真平 襲 加羅 任那 諸國滅之(並 三韓之地) 其西北界 犬牙出髙麗 百濟之間 地多山險 王姓金 貴人姓 朴 民無氏 有名 初百濟伐髙麗 來請救 悉兵往破之 自是相攻 不置 後獲百濟王殺之 結怨滋深 『통고通考』에는 “수문제 때에 성이 김씨이고 이름이 진평真平인 왕이 가라 임나 등 여러 나라를 쳐서 없앴다.(삼한의 땅도 함께였다). 그 서북경계는 개이빨과 같이 고려와 백제 사이로 튀어 나왔다. 땅은 산이 많고 험하다. 왕은 성이 김씨이고 귀인의 성은 박씨이다. 백성은 성이 없고 이름만 있다. 일찍이 백제가 고구려를 칠 때 와서 구원을 요청하자 도리어 군사를 보내 쳐 부쉈다. 이 때부터 서로 공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뒤에 백제왕을 붙잡아 죽이자 깊은 원수를 맺었다.”고 되어 있다. 唐(당나라 시대)-舊唐書 新羅 弁韓之苗裔也 在漢時樂浪之地 有城邑材落 王所居曰金城 周七八里 衞兵 三千人 設獅子隊 武徳四年 王金真平 遣使朝貢 髙祖親勞問之 遣通直散騎侍郎 庾文素 往使焉 賜以 璽 書 及 畫屏風 錦綵三百段 自此 朝貢不絶 『구당서舊唐書』에는 “신라는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한나라 때의 낙랑땅에 있다. 성읍 촌락이 있다. 왕이 있는 곳을 금성金城이라 부르며 둘레가 7,8리이다. 지키는 군사가 3천명이다. 사자대獅子隊를 두었다. 무덕武徳 4년 그 왕 김진평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는 친히 그 노고를 위로하였다. <통직산기시랑> 유문소庾文素를 사신으로 보내어 새서璽 書와 그림을 그린 병풍 그리고 비단 3백단을 주었다. 이로부터 조공이 끊어지지 않았다. 國人 多金朴兩姓 異姓不為婚 髙祖既聞 海東三國 舊多怨隙逓 相攻伐 乃問其使 為怨所由 對曰 先是 百濟往伐髙麗 詣新羅請救 新羅發兵 大破百濟國 因此為怨 每相攻伐 新羅得百濟王 殺之 怨由此始 七年 遣使册拜 金真平為 柱國 封樂浪郡王 新羅王 貞觀五年卒 無子 立其女 善徳為王 宗室大臣 乙祭(案 蒙古語 謂 全部之部 曰伊濟 與 乙祭音近) 總知國政 나라 사람들 중에는 김씨 박씨 2개 성이 많고 다른 성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 (당나라)고조는 이미 해동의 세 나라가 예로부터 원한이 많고 사이가 나빠서 서로 공격한다는 것을 듣고서, 사신에게 원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었다. 대답하길 “이전에 백제가 고구려를 칠 때에, 조칙을 내려 신라에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크게 쳐 부쉈는데 이것이 원한이 되어 매번 서로 공격하였습니다. 신라가 백제왕(성왕)을 사로 잡아 죽였는데 그 원한의 유래가 이때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7년 사신을 보내 김진평에게 주국柱國의 지위를 주고, <낙랑군왕 신라왕>의 직함도 주었다.정관 5년 죽었다. 아들이 없어 그 딸 선덕善徳을 왕으로 세웠다. 종실인 대신 을제乙祭(살피건대 몽골어로 전부의 부部를 이제 伊濟 라고 부르는데 을제乙祭와 발음이 가깝다)가 국정을 총괄하여 맡아 보았다. 詔贈 真平 左光祿大夫 九年 遣使冊命 善徳為王 十七年 遣使 上言 髙麗百濟 累相攻襲 亡失數十城 乞偏師救助 太宗 遣相里元奨齎 璽書賜 髙麗不聴 太宗 将親伐髙麗 詔 新羅纂集 士馬 應接 大軍 新羅遣大臣 領兵五萬人 入髙麗南界 攻水口城降之 (당나라는)조칙으로 진평 真平 에게 <좌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 9년 사신을 보내 선덕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17년 사신을 보내 말하길 “고구려와 백제가 여러차례 공격하여 수십성을 잃었으니 군대를 보내 구원해 주십시요”라고 하였다. (당나라)태종이 <상리원장相里元奨>을 통해 새서璽書를 보냈으나 고구려가 듣지 않았다.(당나라)태종이 장차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려고 조칙으로 신라는 군사와 말을 모집하여 대군을 응접하라고 하였다. 신라가 대신으로 하여금 5만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 남쪽 경계로 들어가 <수구성水口城>을 쳐서 항복받았다. 二十一年 善徳卒 贈光祿大夫 餘官封並如故 立其妹 真徳為王 二十二年 真徳 遣其弟國相 伊贊 子 金春秋 (按 唐會要 以春秋 為真徳子 誤) 及 其子 文正(按 新書 作文王)來朝 詔授春秋 為特進 文正為左武衛将軍 春秋請 詣國學觀釋奠 及 講論 太宗 因賜以 所制温湯 及 晉祠碑 并 新撰 晉書 将歸國 令三品以上 宴餞之 21년 선덕善徳이 죽었다. <광록대부>를 추증하였으니 충분한 관작을 주는 것이 이전과 같았다. 그 여동생 진덕真徳을 왕으로 세웠다. 22년 진덕이 그 동생 국상 이찬伊贊의 아들 김춘추金春秋 (살피건대 「당회요」에는 춘추를 진덕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와 그 아들 문정文正 (살피건대 신당서에는 문왕文王으로 되어 있다.)을 보내 수호하였다. 조칙으로 김춘추에게는 <특진特進>을, 문정에게는 <좌무위장군>의 직함을 주었다. 춘추의 요청으로 조칙을 내려 국학에서 석전과 강론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태종은 직접 지은 온탕温湯과 진사비晉祠碑 및 새로 쓴 진서晉書를 주었다. 돌아 가려고 할 때 3품 이상의 관리를 참석시키고 연회를 베풀었다. 永嶶 元年 真徳大破 百濟之衆 遣其弟 法敏以聞(按 下文云 春秋卒 以其子 法敏嗣 此處 弟字 當誤 新書云 遣春秋子 法敏是也) 帝嘉之拜 法敏為太府卿 五年 真徳卒 詔以 春秋嗣 立為王 加授 開府儀 同三司 樂浪郡王 六年 百濟 與髙麗 靺鞨率兵 侵其北界 攻陷 三十餘城 春秋 上表 求救 영휘永嶶 원년 진덕真徳이 백제의 무리를 크게 쳐부신 사실을 그 동생 법민法敏을 보내 알렸다. (살피건대 아래의 문장에서는 춘추가 죽자 그 아들 법민이 이었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弟자는 당연히 잘못이다. 신당서에 춘추의 아들 법민을 보냈다고 말한 것이 맞다) 황제가 이를 듣고 축하하고 법민에게 <태부경 太府卿 >의 직함을 주었다. 5년 진덕真徳이 죽었다. (당나라는)조칙으로 춘추가 왕위를 잇게하고, 더하여 <개부의 동삼사 낙랑군왕 開府儀 同三司 樂浪郡王 >의 직함을 주었다. 6년 백제가 고구려 말갈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그 북쪽 땅을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하였다. 춘추가 구원을 요청하는 글을 보냈다. 顯慶 五年 命蘇定方 為熊津道大總管 統 水陸十萬 仍令春秋 為嵎夷道行軍總管 與定方 討平 百濟 自是 新羅漸有 髙麗 百濟之地 其界益大 龍朔 元年 春秋卒 詔其子 太府卿 法敏 嗣位 為開府儀 同三司 上柱國 樂浪郡王 新羅王 (당나라는)현경 顯慶 5년 명을 내려 소정방蘇定方에게 <웅진도 대총관熊津道大總管>의 직함을 주어 육해군 10만을 거느리게 하였다. 또한 영을 내려 김춘추春秋에게 <우이도 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의 직함을 주어 정방定方과 함께 백제를 평정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신라는 점점 고구려와 백제의 땅을 차지하여 그 경계가 더욱 커졌다. 용삭龍朔 원년 춘추가 죽었다. 조칙으로 그 아들 <태부경> 법민法敏 이 뒤를 잇게 하고 <개부의 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 開府儀 同三司 上柱國 樂浪郡王 新羅王 >의 직함을 주었다. 三年 詔 以其國 為雞林州 都督府 (按 雞林 與 今 吉林 音譯 地里 俱符 是時 新羅 既兼有 百濟 髙麗之地里 與 靺鞨 故設 都督府 于此 俾王 領之 以重其鎮耳) 授法敏 為雞林州 都督 法敏 以 開耀 元年卒 其子 政明嗣位 垂拱 二年 遣使來朝 天授 三年(按 册府元龜 作長壽 二年) 政明卒 立其子 理洪為王 仍令 襲父 輔國大將軍 行豹韜衛大將軍 雞林州都督 理洪 以長安 二年卒 3년 조칙으로 그 나라를 <계림주 도독부 雞林州 都督府>로 삼고, (살피건대 <계림雞林> 과 지금의 <길림吉林> 은 발음과 지리가 함께 부합한다. 이때 신라는 이미 백제 고구려의 땅과 말갈을 함께 아울렀다. 그래서 도독부를 설치한 것이다. 여기에서 <비왕俾王>이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그 진鎮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법민法敏에게 <계림주도독雞林州都督>의 직함을 주었다. 김법민이 개요開耀 원년에 죽었다. 그 아들 정명政明이 왕위를 이었다. 수공垂拱 2년 사신을 보내 수호하였다. 천수天授 3년(살피건대 책부원구 册府元龜 에는 장수長壽 2년으로 되어 있다.) 정명政明이 죽었다. 그 아들 이홍理洪을 왕으로 세우고 영을 내려 아버지의 직함인 <보국대장군 행표도위 대장군 계림주 도독>을 잇게 하였다. 이홍理洪은 장안長安 2년에 죽었다. 輟朝二日 立其弟 興光為王 仍襲 兄 將軍都督之號 (按 遼宋 以後 每以 雞林 稱 髙麗 金 元時 亦以 雞林郡公 為髙麗封號 葢新羅嗣王 既世襲 都督 雞林 遂為新羅之 通稱 迨渤海盛而 新羅偏 安南境 又 為髙麗所併 故髙麗 亦襲是 稱號 雖地非其舊 而 名仍 沿之耳) 조회를 이틀간 열지 않았다. 그 동생 흥광興光을 왕으로 세웠다. 형의 직함인 <장군도독將軍都督>의 호칭을 이어 받았다. (살피건대 요나라 송나라 이후 매번 계림雞林은 고려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금나라 원나라때 또한 <계림군공 雞林郡公>은 고려왕의 봉호가 되었다. 신라가 왕위를 이을 때 <도독>을 세습하였는데, 드디어 계림雞林은 신라의 통칭이 되었다. 발해渤海가 흥성하자 신라는 남쪽경계로 밀려나 있다가 또 고려髙麗에 병합되었는데 그래서 고려 또한 이 호칭을 이어 받았다. 비록 차지하는 땅은 그 옛날과 같지 않으나 이름은 그대로였다.) 興光 本名 與太宗同 先天中 則天改焉而(按 唐會要 興光本名 崇基 是 與明皇同 非太宗也 又先天 為明皇初 即位 改元之號 其非 則天所改 益明葢 舊唐書記載 之 訛耳) 開元 二十一年 渤海 靺鞨 越海 入登州 時 興光 族人 金思蘭 先因 入朝 留京師 至是拜為 太僕員外卿 令歸國 發兵 以伐靺鞨 仍加授興光 寧海軍使 흥광興光의 본명이 태종太宗과 같아서 선천先天 중에 측천則天이 바꿨다. (살피건대 『당회요』에는 “흥광興光의 본명은 숭기崇基”로 되어 있는데 명황明皇과 같고 태종太宗이 아니다. 또한 선천先天은 명황이 초에 즉위하여 바꾼 연호이다. 그 이름을 바꾼 것이 측천則天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구당서』에 기재된 것은 잘못이다.) 개원開元 21년 발해 말갈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에 쳐들어 왔을 때 흥광興光 의 친척 김사란金思蘭이 일찍이 입조해 경사에 머물러 있었다. 이 때에 김사란에게 <태복원외경>의 직함을 주고 귀국하여 군사를 일으켜 말갈을 쳐 부수도록 하였다. 또한 흥광興光에게 <영해군사>의 직함을 더하여 주었다. [사료]'만주원류고'고 기록하고 있는 신라영토는 기존의 내용과는 다르다 [만주원류고]"신라의 영토는 동남으로 오늘의 조선 경상 강원 두를 포함하여 서북으로는 곧바로 오늘의 길림吉林 오라烏拉에 이르고 또한 서쪽으로는 개원開元 철령鐵嶺에 가까워서 고구려와 백제 사이로 튀어 나왔다. 그러므로 동남 동북으로 백제와 고구려와 모두 가까이 경계를 이루었다."(고구려.백제 멸망직전 신라영역) 신라의 영토확장은 4세기에 유입된 모용선비족이 세운 신라가 초원을 누비던 기마세력이였기 가능한 일이였다. 왜군의 침략으로 국가위기에 처한 신라를 5만의 군대로 지원한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에게 조공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고 태자들을 인질로 보내야 했던 100여년간의 고구려의 제후국에서 탈피하게 된 이후 강력한 개혁을 단행한 법흥왕은 군대도 중앙으로 단일화하여 외침을 방어하게 되었고 진흥왕 시기부터 영토확장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러한 지도는 화랑제도를 만든 진흥왕 시기로부터 출발한다 할 것이다. [만주원류고]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백제가 멸망한 "당(唐) 현경 건봉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땅이 많이 신라에 편입되었는데 동서로 9백리가 더하여 졌고 남북으로 1천여리가 더하여 졌다." (唐顯慶乾封以後 百濟髙麗之地 多入新羅 東西增九百里 南北增千餘里) ..(당나라는)현경 顯慶 5년 명을 내려 소정방蘇定方에게 <웅진도 대총관熊津道大總管>의 직함을 주어 육해군 10만을 거느리게 하였다. 또한 영을 내려 김춘추春秋에게 <우이도 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의 직함을 주어 정방定方과 함께 백제를 평정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신라는 점점 고구려와 백제의 땅을 차지하여 그 경계가 더욱 커졌다...3년 조칙으로 그 나라를 <계림주 도독부 雞林州 都督府>로 삼고, (살피건대 <계림雞林> 과 지금의 <길림吉林> 은 발음과 지리가 함께 부합한다. 이 때 신라는 이미 백제 고구려의 땅과 말갈을 함께 아울렀다. [만주 원류고]개원(開原)은 즉 한(漢)나라 때 부여국(夫餘國) 경계로 백제(百濟)의 옛 나라이다. 통고(通考)에서 말하는 ‘신라 서북 지경이 고려와 백제의 사이로 튀어 나왔다’고 한 것은 곧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 뒤 모두 발해(渤海)에 병합되었다. (開原 即漢時夫餘國界 百濟之舊國也 通考謂 新羅西北界 出髙麗 百濟之間者 應即指此 其後皆併于渤海) 『요사 遼史』 지리지 당唐 원화元和 연간에 발해왕 대인수 大仁秀 가 남쪽으로 신라를 정벌하여 군현을 개설하였는데 해주海州 암연현巖淵縣 동쪽 경계는 신라이다. 그런고로 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에 있다. (遼史 地理志 唐元和中 渤海王 大仁秀 南定新羅 開置郡縣 海州巖淵縣 東界新羅 故平壤城 在縣西南) 『요지遼志』에는 “해주海州 (현 해성, 처음에는 백제에 속하다가 뒤에 고구려에 의해 분할되었고 다시 발해에 합쳐졌다. 다시 요나라에 병합되었다.)의 동쪽경계는 신라이다” (遼志所云 海州 [即今海城 始屬百濟 後為髙麗所分 復入渤海 又歸于遼] 東界新羅是也) 서기 816년에 "굶주린 신라인 1백 70명이 절강동도(절강성 동부)로 몰려들었다."(『삼국사기』「신라본기」헌덕왕조) "신라산(新羅山)은 현 남쪽 2리에 있으며, 신라국 임금의 묘당이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有新羅國王廟焉故名).”―『절강통지』에 실린「평양현지(平陽縣志)」 월주지역의 신라방은 마한의 해상세력인 석탈해 왕조(사로국) 때 부터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 월주지역까지 해류는 봄과 가을을 주기로 교차하기 때문에 봄에 한반도에서 떠나고 가을에 한반도로 돌아 오는 항로를 택하였다. 월주지역에 고인돌들이 분포하는 건 고대부터 항로를 통하여 교류하였고 월주지역에 한반도인들이 정착했음을 의미한다. 동성왕이 시해당하고 무녕왕이 즉위하는 백제 혼란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문자명왕 때 지나지역의 백제담로을 차지하고 천주지역으로 신라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는 [환단고기-고구려본기]기록이 나오는데, 이 때 이주시킨 신라인들은 월주지역의 신라인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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