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明나라; ‘국가안보’마저 희생시킨 당쟁
▶ 시대 개요
명(明·1368~1644년)나라를 세운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철저한 황제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재상제도를 폐지하고 6부를 비롯한 행정 각 부서를 황제가 직할하도록 했다. 대신 ‘내각(內閣)’이라는 일종의 비서실을 설치하고 비서관 격인 대학사(大學士)들을 두어 황제를 보좌하게 했다.
황제 독재를 지탱하기 위해 황제들은 기무사령부 격인 금의위(錦衣衛)와 국가정보원 격인 동창(東廠)·서창(西廠)·내창(內廠) 등의 특무기관들을 설립했다. 동창·서창·내창의 장관은 황제가 신임하는 환관들이 맡았다.
명은 유독 정신이상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무능하고 기행을 일삼는 황제들이 많았다. 헌종과 효종, 신종 등은 수십 년간 신하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서류로만 국사(國事)를 처리했다. 그럴수록 황제 측근의 환관들이 발호했다.
여기에 더해 북에서는 몽골족, 남에서는 왜구가 창궐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비 지출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됐다.
1566년 신종(재위 1572~1620년)이 즉위했다. 수석 대학사인 장거정(張居正)은 행정기구를 간소화하고 재정을 정비하는 등 일련의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장거정의 독재에 반대하는 일단의 사대부들이 당파를 결성했다. 이를 동림당(東林黨)이라 한다. 환관들과 그 동조자들로 이루어진 엄당(閹黨)이 동림당과 맞섰다. 이들의 싸움은 명이 망하는 날까지 계속됐다.
장거정의 개혁
▶ 시대 개요
명(明·1368~1644년)나라를 세운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철저한 황제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재상제도를 폐지하고 6부를 비롯한 행정 각 부서를 황제가 직할하도록 했다. 대신 ‘내각(內閣)’이라는 일종의 비서실을 설치하고 비서관 격인 대학사(大學士)들을 두어 황제를 보좌하게 했다.
황제 독재를 지탱하기 위해 황제들은 기무사령부 격인 금의위(錦衣衛)와 국가정보원 격인 동창(東廠)·서창(西廠)·내창(內廠) 등의 특무기관들을 설립했다. 동창·서창·내창의 장관은 황제가 신임하는 환관들이 맡았다.
명은 유독 정신이상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무능하고 기행을 일삼는 황제들이 많았다. 헌종과 효종, 신종 등은 수십 년간 신하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서류로만 국사(國事)를 처리했다. 그럴수록 황제 측근의 환관들이 발호했다.
여기에 더해 북에서는 몽골족, 남에서는 왜구가 창궐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비 지출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됐다.
1566년 신종(재위 1572~1620년)이 즉위했다. 수석 대학사인 장거정(張居正)은 행정기구를 간소화하고 재정을 정비하는 등 일련의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장거정의 독재에 반대하는 일단의 사대부들이 당파를 결성했다. 이를 동림당(東林黨)이라 한다. 환관들과 그 동조자들로 이루어진 엄당(閹黨)이 동림당과 맞섰다. 이들의 싸움은 명이 망하는 날까지 계속됐다.
장거정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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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신종(만력제) 때의 개혁가 장거정. |
장거정은 명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유능하고 추진력 있는 정치가였다. 그는 앞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침체를 수술하려 했다. 신종의 스승이었던 그는 신종 즉위와 함께 수보(首輔), 즉 수석 대학사가 되었다. 재상(국무총리)제도가 없는 명에서는 재상이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장거정은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행정기구를 감축했으며 황실의 지출을 줄였다. 전국적으로 토지 측량을 다시 해서 조세를 받을 수 있는 경지면적을 30%나 늘렸다. 일조편법(一條鞭法) 제도를 시행해 조세제도를 간소화하고 조세의 금납화(金納化)를 추진했다.
빈민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탈세를 일삼아 온 향신(鄕紳·지방 유력자)들로부터는 세금을 철저히 징수했다. 후일 장거정이 사망했을 때 정부 창고에는 10년 치의 쌀이 쌓여 있었고 국고 잉여금도 400만 냥이 넘었다고 한다. 반계순이라는 수리 전문가를 기용해 황하와 대운하를 정비해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했다. 명장 척계광을 등용해 몽골과 왜구를 막게 한 것도 장거정이었다.
이렇게 볼 만한 업적들을 남겼지만 반발도 적지 않았다. 황족과 황실의 비빈(妃嬪), 환관들은 긴축재정에 반발했고 관료들은 행정기구 감축에 반대했다. 세금 부담을 지게 된 향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발이 나오자 장거정은 언관(言官)들의 간언(諫言)을 금지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환관 풍보와도 손을 잡았다.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삼년상을 지내야 했음에도 이를 지키지 않았다. 잠시라도 권력을 내려놓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이는 유가(儒家)의 관점에서 보면 씻을 수 없는 도덕적 흠결이었다. 자연히 장거정의 독재에 반대하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1582년 장거정이 사망했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들고일어나 죽은 장거정을 탄핵했다. 결국 장거정은 모든 벼슬과 명예를 빼앗기고 유족들은 가산을 몰수당한 후 변방으로 유배됐다.
동림당과 엄당
장거정은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행정기구를 감축했으며 황실의 지출을 줄였다. 전국적으로 토지 측량을 다시 해서 조세를 받을 수 있는 경지면적을 30%나 늘렸다. 일조편법(一條鞭法) 제도를 시행해 조세제도를 간소화하고 조세의 금납화(金納化)를 추진했다.
빈민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탈세를 일삼아 온 향신(鄕紳·지방 유력자)들로부터는 세금을 철저히 징수했다. 후일 장거정이 사망했을 때 정부 창고에는 10년 치의 쌀이 쌓여 있었고 국고 잉여금도 400만 냥이 넘었다고 한다. 반계순이라는 수리 전문가를 기용해 황하와 대운하를 정비해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했다. 명장 척계광을 등용해 몽골과 왜구를 막게 한 것도 장거정이었다.
이렇게 볼 만한 업적들을 남겼지만 반발도 적지 않았다. 황족과 황실의 비빈(妃嬪), 환관들은 긴축재정에 반발했고 관료들은 행정기구 감축에 반대했다. 세금 부담을 지게 된 향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발이 나오자 장거정은 언관(言官)들의 간언(諫言)을 금지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환관 풍보와도 손을 잡았다.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삼년상을 지내야 했음에도 이를 지키지 않았다. 잠시라도 권력을 내려놓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이는 유가(儒家)의 관점에서 보면 씻을 수 없는 도덕적 흠결이었다. 자연히 장거정의 독재에 반대하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1582년 장거정이 사망했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들고일어나 죽은 장거정을 탄핵했다. 결국 장거정은 모든 벼슬과 명예를 빼앗기고 유족들은 가산을 몰수당한 후 변방으로 유배됐다.
동림당과 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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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림당의 영수 고헌성. |
여기서 그치지 않고 보다 철저한 ‘적폐 청산’을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고헌성(顧憲成)을 필두로 하는 동림당(東林黨)이 그들이다. 고헌성은 이부(吏部) 낭중(국장급)으로 있다가 신종의 눈 밖에 나서 고향인 강소성 무석으로 낙향했다. 그는 송의 주자학자 양시가 세웠던 동림서원을 다시 세운 후, 동지와 제자들을 모아 학문과 시사(時事)를 논했다. 고헌성은 학문은 정치 비판의 수단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림서원 입구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바람 소리, 비 소리, 독서 소리, 소리마다 귀에 들린다.
집안일, 나랏일, 천하일, 일마다 관심을 갖는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비판적 지식인 그룹이 형성, 확산됐던 것처럼 동림당도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자신들의 정치적 역할을 의식하게 된 동림당은 적극적으로 당인(黨人)을 한림원(조선시대 홍문관과 유사한 학문연구기구)과 도찰원(조선시대 사헌부에 해당하는 감찰기관)으로 진출시키기 시작했다.
동림당은 주자학 원리주의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았다. ‘청의파(淸議派)’를 자처하면서 과격한 언사로 국정을 담당하는 내각의 신료(臣僚)들을 비판했다. 동림당의 주장은 세월이 흐를수록 ‘반대를 위한 반대’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동림당은 자기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적폐 세력’으로 모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황제의 측근으로 특무기관을 장악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환관들도 동림당의 비판 대상이었음은 물론이다. 자연스럽게 동림당에 반대하는 신료파와 환관들이 손을 잡게 됐다. 동림당은 이들을 ‘엄당(閹黨·환관당)’이라고 비아냥댔다. 마지막 20여 년간 명은 동림당과 엄당의 싸움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엄당의 우두머리인 위충현(魏忠賢)은 불학무식한 무뢰배 출신으로 스스로 남근(男根)을 자르고 환관이 된 자였다. 그는 자기가 모시던 희종(熹宗·재위 1620~1627년)이 즉위한 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게 됐다. 그는 환관들은 물론 내각과 각 부서의 요인들을 포섭해 거대한 정치 세력을 구축했다.
비밀경찰인 동창의 장관이 된 위충현은 1624년 동림당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했다. 좌도어사(감사원장) 양련, 도급사중(정책심의기구 주임위원) 위대중 등 중신들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처형됐다. 이런 상황에서 형부상서 설정은 사법정의를 실현하기는커녕 “이런 시대에 태어났으면 자신의 앞날을 위해 생각해야지 다른 사람의 생사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면서 위충현에게 아부했다.
1627년 희종이 죽고 의종(毅宗·재위 1628~1644년)이 즉위했다. 그가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이다. 의종은 위충현 일파를 숙청하고 황실의 낭비를 줄이며 밤낮없이 정무를 챙기면서 중흥을 이룩하려 노력했다. 의종에게는 단점도 있었다. 특히 성격이 과격하고 타협을 몰랐으며 의심이 많았다. 의종이 동림당을 중용하면서 엄당은 일시 위축됐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밖에서는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의 후금(後金)이, 안에서는 이자성(李自成) 등의 농민반란군이 북경을 향해 육박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영원성의 영웅 원숭환
“바람 소리, 비 소리, 독서 소리, 소리마다 귀에 들린다.
집안일, 나랏일, 천하일, 일마다 관심을 갖는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비판적 지식인 그룹이 형성, 확산됐던 것처럼 동림당도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자신들의 정치적 역할을 의식하게 된 동림당은 적극적으로 당인(黨人)을 한림원(조선시대 홍문관과 유사한 학문연구기구)과 도찰원(조선시대 사헌부에 해당하는 감찰기관)으로 진출시키기 시작했다.
동림당은 주자학 원리주의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았다. ‘청의파(淸議派)’를 자처하면서 과격한 언사로 국정을 담당하는 내각의 신료(臣僚)들을 비판했다. 동림당의 주장은 세월이 흐를수록 ‘반대를 위한 반대’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동림당은 자기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적폐 세력’으로 모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황제의 측근으로 특무기관을 장악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환관들도 동림당의 비판 대상이었음은 물론이다. 자연스럽게 동림당에 반대하는 신료파와 환관들이 손을 잡게 됐다. 동림당은 이들을 ‘엄당(閹黨·환관당)’이라고 비아냥댔다. 마지막 20여 년간 명은 동림당과 엄당의 싸움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엄당의 우두머리인 위충현(魏忠賢)은 불학무식한 무뢰배 출신으로 스스로 남근(男根)을 자르고 환관이 된 자였다. 그는 자기가 모시던 희종(熹宗·재위 1620~1627년)이 즉위한 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게 됐다. 그는 환관들은 물론 내각과 각 부서의 요인들을 포섭해 거대한 정치 세력을 구축했다.
비밀경찰인 동창의 장관이 된 위충현은 1624년 동림당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했다. 좌도어사(감사원장) 양련, 도급사중(정책심의기구 주임위원) 위대중 등 중신들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처형됐다. 이런 상황에서 형부상서 설정은 사법정의를 실현하기는커녕 “이런 시대에 태어났으면 자신의 앞날을 위해 생각해야지 다른 사람의 생사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면서 위충현에게 아부했다.
1627년 희종이 죽고 의종(毅宗·재위 1628~1644년)이 즉위했다. 그가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이다. 의종은 위충현 일파를 숙청하고 황실의 낭비를 줄이며 밤낮없이 정무를 챙기면서 중흥을 이룩하려 노력했다. 의종에게는 단점도 있었다. 특히 성격이 과격하고 타협을 몰랐으며 의심이 많았다. 의종이 동림당을 중용하면서 엄당은 일시 위축됐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밖에서는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의 후금(後金)이, 안에서는 이자성(李自成) 등의 농민반란군이 북경을 향해 육박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영원성의 영웅 원숭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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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를 격퇴한 명장 원숭환. |
요동(만주) 건주여진의 추장이었던 누르하치는 여진의 여러 부락을 통합한 후 1616년 후금을 세웠다. 1618년 누르하치는 명이 자신들에게 가한 잘못들을 지적하는 ‘7대한(七大恨)’을 하늘에 고하고 명에 대한 전쟁을 일으켰다. 1619년에는 사르흐에서 명과 조선의 연합군 9만명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1622년 누르하치는 무순·요양·심양을 탈취했다. 당시 이 지역의 명군 사령관은 요동경략 웅정필과 요동순무 왕화정 두 사람이었다. 지방군벌의 출현을 막기 위해 지휘권을 이원화해 놓았던 것이다. 명군이 패한 것은 왕화정이 웅정필의 신중론을 외면하고 섣불리 나가 싸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된 것은 웅정필이었다. 웅정필이 동림당 계열의 무장이었기 때문이다. 당쟁의 여파는 이런 식으로 국방 면에도 미치고 있었다.
1626년 1월 누르하치는 정예군 20만명을 거느리고 영원성을 공격했다. 영원성의 명군은 1만명에 불과했다. 여기서 누르하치는 생애 처음으로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 명군이 쏜 홍이포(紅夷砲) 포탄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누르하치는 그 후유증으로 그해 8월 사망했다.
영원성의 명군을 지휘한 원숭환(袁崇煥)은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됐다. 병부상서 겸 계요(薊遼)총독으로 승진한 그는 “5년 내에 전 요동을 회복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압록강 하구 가도에는 명의 장수 모문룡이 주둔하고 있었다. 모문룡은 후금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명목으로 명과 조선으로부터 군자금과 군량, 물자를 받아내 밀무역을 해 부(富)를 축적했다. 모문룡은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위충현 등 조정의 유력자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의종이 즉위한 후인 1629년 6월 원숭환은 모문룡을 체포해 처형했다. 모문룡 같은 부패하고 믿을 수 없는 자를 전선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인 것은 동림당 계열의 내각 대학사였던 전용석, 전용석의 고향 선배 진계유 등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의종 시절부터 모문룡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온 엄당 계열의 환관과 고관들은 원숭환에게 원한을 품게 됐다.
원숭환의 죽음
1629년 10월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는 내몽골로 우회해서 북경을 공략했다. 후금군은 북경 주변 도시들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북경의 조정과 주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영원성과 산해관을 지키던 원숭환은 수도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왔다. 원숭환의 부대는 11월 중순 북경 성 밖에서 사투 끝에 후금군을 물리쳤다.
원숭환에게 돌아온 것은 감사가 아니라 원망과 증오였다. 황제와 조정, 백성들은 후금군이 수도 주변까지 쳐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원숭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후금의 홍타이지는 포로가 됐던 환관 양춘과 왕성덕을 통해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하고 있다고 정보를 흘렸다. 안 그래도 의종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원숭환은 1629년 12월 체포됐다. 의종 즉위 후 동림당에 정국 주도권을 빼앗긴 엄당은 원숭환 사건을 계기로 동림당에 반격을 꾀했다. 원숭환이 동림당의 거두 전용석의 문인이라는 것이 빌미가 됐다. 엄당 계열의 재상 온체인은 다섯 차례나 원숭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들에게 ‘국가안보’는 안중에도 없었다. 물론 동림당 계열 신료들은 원숭환의 구명을 호소했다. 의종은 엄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1630년 9월 원숭환은 책형(磔刑)에 처해졌다. 기둥에 묶어 놓고 칼로 온몸의 살점을 발라낸 후 두개골을 부숴 죽이는 끔찍한 형벌이었다. 1년 전 자기들이 후금군에게 포위되어 고난을 겪은 것이 원숭환이 적과 내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백성들은 원숭환에게 달려들어 그의 살점을 뜯어 먹었다.
거짓 정보에 현혹된 우민(愚民)들의 광기(狂氣)였다. 자기들을 지켜준 은인을 몰라보는 배은망덕이었다. 사드문제 등을 가지고 미국과 주한미군에게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거는 오늘날의 일부 한국인과 비슷하다고 할까?
원숭환의 처형은 만주족을 중원으로 불러들이는 초대장이었다. 원숭환의 죽음에 절망한 부하 장수 조대수는 휘하 장병들을 거느리고 청(淸)에 투항했다. 원숭환이 영원성에서 누르하치를 격퇴할 때 사용했던 신식 서양식 화포 홍이포도 이때 청에 넘어갔다.
동림당의 추태
1622년 누르하치는 무순·요양·심양을 탈취했다. 당시 이 지역의 명군 사령관은 요동경략 웅정필과 요동순무 왕화정 두 사람이었다. 지방군벌의 출현을 막기 위해 지휘권을 이원화해 놓았던 것이다. 명군이 패한 것은 왕화정이 웅정필의 신중론을 외면하고 섣불리 나가 싸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된 것은 웅정필이었다. 웅정필이 동림당 계열의 무장이었기 때문이다. 당쟁의 여파는 이런 식으로 국방 면에도 미치고 있었다.
1626년 1월 누르하치는 정예군 20만명을 거느리고 영원성을 공격했다. 영원성의 명군은 1만명에 불과했다. 여기서 누르하치는 생애 처음으로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 명군이 쏜 홍이포(紅夷砲) 포탄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누르하치는 그 후유증으로 그해 8월 사망했다.
영원성의 명군을 지휘한 원숭환(袁崇煥)은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됐다. 병부상서 겸 계요(薊遼)총독으로 승진한 그는 “5년 내에 전 요동을 회복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압록강 하구 가도에는 명의 장수 모문룡이 주둔하고 있었다. 모문룡은 후금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명목으로 명과 조선으로부터 군자금과 군량, 물자를 받아내 밀무역을 해 부(富)를 축적했다. 모문룡은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위충현 등 조정의 유력자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의종이 즉위한 후인 1629년 6월 원숭환은 모문룡을 체포해 처형했다. 모문룡 같은 부패하고 믿을 수 없는 자를 전선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인 것은 동림당 계열의 내각 대학사였던 전용석, 전용석의 고향 선배 진계유 등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의종 시절부터 모문룡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온 엄당 계열의 환관과 고관들은 원숭환에게 원한을 품게 됐다.
원숭환의 죽음
1629년 10월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는 내몽골로 우회해서 북경을 공략했다. 후금군은 북경 주변 도시들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북경의 조정과 주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영원성과 산해관을 지키던 원숭환은 수도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왔다. 원숭환의 부대는 11월 중순 북경 성 밖에서 사투 끝에 후금군을 물리쳤다.
원숭환에게 돌아온 것은 감사가 아니라 원망과 증오였다. 황제와 조정, 백성들은 후금군이 수도 주변까지 쳐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원숭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후금의 홍타이지는 포로가 됐던 환관 양춘과 왕성덕을 통해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하고 있다고 정보를 흘렸다. 안 그래도 의종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원숭환은 1629년 12월 체포됐다. 의종 즉위 후 동림당에 정국 주도권을 빼앗긴 엄당은 원숭환 사건을 계기로 동림당에 반격을 꾀했다. 원숭환이 동림당의 거두 전용석의 문인이라는 것이 빌미가 됐다. 엄당 계열의 재상 온체인은 다섯 차례나 원숭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들에게 ‘국가안보’는 안중에도 없었다. 물론 동림당 계열 신료들은 원숭환의 구명을 호소했다. 의종은 엄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1630년 9월 원숭환은 책형(磔刑)에 처해졌다. 기둥에 묶어 놓고 칼로 온몸의 살점을 발라낸 후 두개골을 부숴 죽이는 끔찍한 형벌이었다. 1년 전 자기들이 후금군에게 포위되어 고난을 겪은 것이 원숭환이 적과 내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백성들은 원숭환에게 달려들어 그의 살점을 뜯어 먹었다.
거짓 정보에 현혹된 우민(愚民)들의 광기(狂氣)였다. 자기들을 지켜준 은인을 몰라보는 배은망덕이었다. 사드문제 등을 가지고 미국과 주한미군에게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거는 오늘날의 일부 한국인과 비슷하다고 할까?
원숭환의 처형은 만주족을 중원으로 불러들이는 초대장이었다. 원숭환의 죽음에 절망한 부하 장수 조대수는 휘하 장병들을 거느리고 청(淸)에 투항했다. 원숭환이 영원성에서 누르하치를 격퇴할 때 사용했던 신식 서양식 화포 홍이포도 이때 청에 넘어갔다.
동림당의 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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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경산공원에 있는 명나라 의종(숭정제)의 추모비. |
1644년 4월 23일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을 포위했다. 이틀 후 의종은 자금성 뒤 경산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죽어 조종(祖宗)을 뵐 면목이 없어 스스로 관면(冠冕)을 벗어 버리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다. 적으로 하여금 짐의 시신을 갈가리 찢게 할지언정, 한 사람의 백성도 상하게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학사 범경문, 호부상서 예원로 등 수십 명의 관료와 200명이 궁녀들이 자결했다.
하지만 순국한 자들보다는 이자성이 세운 순(順)나라에 빌붙어 출세하려는 자들이 훨씬 많았다. 그런 자들이 1200명이나 됐다. 그중에는 동림당원들도 많았다. 항욱은 제일 먼저 항복했다. 시민은 “나는 동림당의 시민”이라면서 이자성 정권에 중용되려 엽관운동을 했다. 주종은 명 의종을 ‘독부’(獨夫·포악한 정치를 하여 국민에게 외면을 당한 군주)라고 비난하면서 이자성을 요순(堯舜)에 비유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런 추태를 벌인 자들은 한때 ‘청의파’를 자처하면서 세상의 정의는 자기들이 독점한 것처럼 굴던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다. 박근혜 정권 시절에 임명됐으면서도 부리나케 새 대통령의 정책에 코드를 맞추는 기관장, 어느 정권 아래서건 용케 양지만 쫓아다니는 관료와 군 장교들…. 어쩌면 그들은 김정은이 내려와도 그 밑에서 한자리 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이자성은 비록 일개 역졸(驛卒) 출신이었지만 그런 자들을 역겹게 보았다. 그는 명나라에서 3품 이상의 고위 관직을 지낸 자들을 모두 투옥했고 800명 이상을 처형했다. 50여 일 뒤인 그해 6월 6일, 항장(降將) 오삼계를 앞세운 18만명의 청군이 북경에 입성했다. 이후 267년간 한족(漢族)은 만주족의 노예가 됐다.⊙
하지만 순국한 자들보다는 이자성이 세운 순(順)나라에 빌붙어 출세하려는 자들이 훨씬 많았다. 그런 자들이 1200명이나 됐다. 그중에는 동림당원들도 많았다. 항욱은 제일 먼저 항복했다. 시민은 “나는 동림당의 시민”이라면서 이자성 정권에 중용되려 엽관운동을 했다. 주종은 명 의종을 ‘독부’(獨夫·포악한 정치를 하여 국민에게 외면을 당한 군주)라고 비난하면서 이자성을 요순(堯舜)에 비유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런 추태를 벌인 자들은 한때 ‘청의파’를 자처하면서 세상의 정의는 자기들이 독점한 것처럼 굴던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다. 박근혜 정권 시절에 임명됐으면서도 부리나케 새 대통령의 정책에 코드를 맞추는 기관장, 어느 정권 아래서건 용케 양지만 쫓아다니는 관료와 군 장교들…. 어쩌면 그들은 김정은이 내려와도 그 밑에서 한자리 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이자성은 비록 일개 역졸(驛卒) 출신이었지만 그런 자들을 역겹게 보았다. 그는 명나라에서 3품 이상의 고위 관직을 지낸 자들을 모두 투옥했고 800명 이상을 처형했다. 50여 일 뒤인 그해 6월 6일, 항장(降將) 오삼계를 앞세운 18만명의 청군이 북경에 입성했다. 이후 267년간 한족(漢族)은 만주족의 노예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