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삼흥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순국하였다.
안중근의사의 업적
의병활동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三興學校;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다. 이후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동의단지회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그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거사하기로 뜻을 같이하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劉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 플랫폼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 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세례명은 토마스(도마; 多默)이다.
목차 [숨기기]
1 일생
2 생애 2.1 생애 초반 2.1.1 출생과 가계
2.1.2 초기 활동
2.2 소년기 2.2.1 동학 농민군 진압 활동
2.2.2 청인 난타 사건
2.3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 2.3.1 계몽 운동과 국채보상운동
2.3.2 의병 활동
2.4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순국 2.4.1 이토 히로부미 저격
2.4.2 마지막 행적
2.4.3 유언
3 사후
4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영향
5 평가 5.1 긍정적 평가
6 사상과 신념 6.1 동양평화론 6.1.1 동양평화론에 대한 평가
7 저서 및 유묵 7.1 저서
7.2 시
7.3 유묵
8 연보
9 가족 관계
10 기타 10.1 김구와의 인연
10.2 기념 사업
11 같이 보기
12 각주
13 관련 서적
14 바깥 고리 및 참조 자료
일생[편집]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조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26대손이다.[1][2] 우덕순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지야이지스고 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다.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남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피체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뤼순 감옥(뤼순형무소)에서 사형(교수형) 집행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군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1] 진해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중근의 할아버지 안인수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3]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태훈 일가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와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안인수는 4백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3]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거부가 되어 재산을 축적하였으므로 그는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뒤에 일본은 안인수가 "항상 미곡 매입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각종 간악한 수단을 부려 재물을 모다 거부를 이루었다"거나, 안인수는 "성품이 탐욕하고 배부름을 모르고 일상 간계를 써서 타인의 재산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으므로 당시인들이 안억핍(安億乏)이라고 다르게 불렀다"고 말한 반면, 안중근은 "조부가 자산가로서 도내에 이름이 높았다."고 회고했다.[4]
그러나 안중근의 가계는 그의 5대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소 불확실하다. 순흥 안씨 족보에 의하면 17대조 안려(安廬)는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으로서 건원릉 참봉을 지냈다. 14대조 안효신은 어린 나이에 문단에서 명성을 날릴 정도로 문장에 능했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황해남도 해주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했다. 이로써 안효신은 순흥 안씨 참판공파의 해주 입향시조가 되었다. 이후 안중근의 선조들은 안중근의 14대조 안숙관과 13대조 안류가 통정대부(정3품)의 품계를 받았을 뿐이며,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安起玉)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불확실한 내용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1845년에 순흥안씨 족보소가 간행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중근의 17대조 안려에게 진사, 후사없음(進士無后)이라고 되어 있으나, 1864년 안최량(安最良)이 편찬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려에 대해 후사가 나와 있지 않고, 진사라고만 되어 있다. 이에 반해 1910년대 이후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장조카로 강진현령을 지낸 안효충(安孝忠)의 둘째 동생인 안순복(安順福)이 안려의 양자로 들어가서 안효신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5] 따라서 안중근의 15대조이자 해주입향시조인 안효신의 존재는 1918년에 신문관에서 간행된 순흥안씨족보와 1936년 간행된 순흥안씨 족보 이후부터 나타나고 있다. 또한 1800년대 중, 후반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형인 안의(安毅)의 후손으로 안효충만 나와 있다. 그런데 1910년대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의의 후손으로 안효충 외에도 안현복, 안순복, 안경복, 안창복, 안성복, 안준복 등이 새로이 나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 해주에 정착한 순흥안씨 참판공파 인사들의 낙향 직전의 세계와 해주 입향 이후부터 한말까지의 신분 문제는 불명확한 사실이 많음을 알 수 있다.[5]
해방 전후에 안중근의 전기와 비문을 집필한 이들은 안중근 가문의 신분을 한결같이 향리로 보고 있다. 김택영과 이건승은 안중근 의거 이후[6] 에 지은 간략한 전기에서 각각 "그 선조는 본래 순흥 사람으로 해주에 살면서 대대로 주리를 지냈다. 안태훈 대에 이르러 글을 읽어 진사가 되었다"거나 "그의 선조는 순흥인데 중도에 해주로 이사하여 주리를 지냈다"고 하였다.[7] 또한 심산 김창숙은 1961년에 지은 '안중근의사 숭모비문'에서 "그 선조의 세가는 서한의 해주에서 주리가 되었는데, 부친 안태훈의 대에 이르러 독서하여 국자생이 되었다."고 하였다.[6]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의 대에 이르러 무과에 급제, 관직 진출을 꾀하였다. 이는 향리직을 장기간 세습하면서 사회경제적 능력을 갖추어 나간 이서층이 과거를 통해 양반층으로 편입되려는 신분상승운동을 벌였음을 의미한다. 안기옥은 안영풍(安永豊), 안지풍(安知豊, 안중근의 고조부), 안유풍(安有豊), 안순풍(安順豊)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도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처럼 향리 가문의 4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한 것은 가문의 위상을 높인 쾌거였다.
또한 안지풍의 장남 안정록(安定錄, 안중근의 증조부), 안유풍의 아들 안두형(安斗亨), 안유풍의 손자 안인환(安仁煥), 안순풍의 아들 안신형(安信亨) 등이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고 안유풍의 손자 안인권(安仁權)이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다. 안인필(安仁弼)은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의 정6품 군직인 사과가 되었고,[6] 안정록의 아들이자 안중근의 할아버지인 안인수는 통훈대부와 진해현감을 지냈다. 기록에는 안인수의 아들 안태건(安泰健)은 고종(高宗) 28년(1891) 신묘(辛卯)년에 24세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으로 등과됨을 알리고 있다.[8]
초기 활동[편집]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안중근 자신은 《안응칠역사》에서 "내 나이 예닐곱 때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서당에 들어가 8~9년 동안 한문을 익혔으며, 조부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사냥으로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9]
소년기[편집]
동학 농민군 진압 활동[편집]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정평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 각지에서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안태훈은 자발적으로 창의를 하여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여 승리를 거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중근 역시 동학군 토벌에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데 참여했다.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10],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도마, 다묵)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 뒤 잠시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청인 난타 사건[편집]
1904년 아버지 안태훈과 청나라 의사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휘말렸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아버지 안태훈은 1904년 4월 20일 안악읍에 사는 청나라 의사 서원훈(舒元勛)과 시비가 있었다.[11] 아버지 안태훈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친우 이용일(李龍一)을 데리고 서원훈을 찾아갔다. 양측이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안태훈측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서원훈이 갑자기 일어나 안태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이에 안태훈은 서원훈에게 화해를 청하고 물러나왔다.[11]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이 4월 29일 이용등 10여 명과 함께 무기를 들고 야밤에 서원훈을 잡아다가 길가에서 무수히 난타하여 거동이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1904년 5월 2일 청국인 7~8명이 이용일의 집에 난입하여 그를 마구 구타하고 잡아가려고 했다.[11]
한중 양국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삼화항의 청나라 영사가 한국 정부에 공식 문제제기를 했다. 이에 따라 삼화항 재판소 감리가 순검을 보내 안중근과 이용일을 체포하여 압송토록 했다.[11] 그런데 중도에 나타난 괴한들이 순검들을 난타하고 안중근과 이용일을 구하여 사라졌다. 이때 순검 한 명은 안면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11]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7월 10일 전후에 안중근과 이창순은 각기 외부에 청원서를 올려 자신들의 부친이 억울하게 청국인에게 당했다고 호소했다.[11] 그러나 대한제국 외무부는 다시 자체 조사를 거친 끝에 안중근과 이용일의 죄상이 중하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방 정부는 안중근 등의 체포를 명하였고, 7월 22일 황해도관찰사 이용필(李容弼)은 안중근과 이용일이 기미를 알고 미리 도주하여 체포하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외무부대신에게 올렸다.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편집]
계몽 운동과 국채보상운동[편집]
안중근, 만주에서
1905년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왔다. 이 무렵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되지 않았으며,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대구의 유생 서상일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 역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의병 활동[편집]
안중근
1907년(융희 1년) 황제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를 당한 뒤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가담하였다.[12]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던 그는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그 뒤 황해도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12])에 선출되었다.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1908년 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다,그 이유는 석방한 포로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어 회령군 인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었다. 안중근은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구사일생으로 귀환하였으나 이 패배로 인해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입지가 줄어들었다.[13] 1908년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하여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4]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융희 3)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순국[편집]
이토 히로부미 저격[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15]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13]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16]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田中淸次郞)한테서 총격하였다.[15]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
”
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만세라는 뜻이었다.[15]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용)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피체되었고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17]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접해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를 관선 변호사로 선임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동양 평화론의 저술을 하였으나 끝내 완성시키지 못했다.
마지막 행적[편집]
2008년 3월 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1910년 2월 14일 : 오전 10시 30분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함.
1910년 2월 17일 :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1910년 3월 9일 :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1910년 3월 10일 :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
1910년 3월 25일 :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황제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1910년 3월 26일 : 오전 10시 사형 집행. 향년 32세.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18]
유언[편집]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11월 중화민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운동가 세 명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을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구 역시 1949년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고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19]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20]
사후[편집]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죄수 묘역에 묻혔다. 일제는 뒤에 안중근의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주지 않아 그의 매장지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11년 출범한 안중근 유해 발굴 및 국내 봉환을 추진하는 비정부 민간단체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는 안중근이 순국한 뤼순 감옥에서 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뤼순감옥구지묘지를 안중근의 유해 매장지로 추정하며 해당 지역에 대한 발굴을 정부에 의뢰하고 있는 상황이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영향[편집]
한국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이승만과 김구는 광복 이후 매년 그를 기리고 그의 동상을 찾아가 헌화, 참배하였다. 윤치호를 포함하여 일부는 역시 그의 사상에 대체적으로 공감하나, 하얼빈에서의 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로 한일병합조약을 촉진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회의적인 생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중국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당시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27년부터 중화민국 장쉐량의 지시로 동북 각지의 36개 모범소학교에서 수업 전에 안중근의 노래를 합창하였으며,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엔 저우언라이와 궈모뤄 등이 무한, 장사 등지에서 화극 《안중근》을 연출해 반일 투쟁을 고무 격려했다.
일본
일본에서는 이토를 사살한 조선인을 적대하는 감정이 가속되었으며, 조선의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였다.[21] 이토를 사살한 것이 한일병합조약을 가속화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1909년 4월 이토와 고무라 외무대신은 이미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토는 도쿄에서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의도를 드러낸 연설을 한 바 있어, 일본 정부 내에서 한일병합조약을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평가[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혁명가 김산은 “춥고 긴긴 겨울밤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려온 이토히로부미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어떤 식으로 저격했는가 하는 이야기와 한국독립을 위해 대담무쌍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라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수록하고 있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부른다.[22] 즉, 안중근을 한국 교회에서는 모세의 애국심과 바오로의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안중근의 일본인 교도관 다카오 미조부치는 그를 동아시아의 의인이라고 평하였다.
고려대학교 세종 사회학과 노길명 교수는 안중근을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평하였다.[22]
미래사목연구소 황종률 박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정의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으로 하느님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평가하였다.[2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세기 초 우리나라 반일애국운동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열사”로 평가하며 북조선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에 저격장면, 계기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15차 남북 장관급 회담(2005년 6월 21~24일, 서울)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사업 공동 추진’에 합의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 안중근 의사 국제평화상을 제정하였다.
김삼웅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제안을 유럽공동체(EU)와 같은 것으로 평가한다. 당시 안중근의 제안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이 동양평화회의를 결성하며, 여순을 중립화하고, 관련 3국으로 운영되는 동양평화회의본부를 여순에 설치한다. 또한 평화지역 창설, 공동개발은행과 공동화폐 발행 등이 포함되어 있다.[23]
안중근은 또한 문명개화를 통해 실력을 닦는 것이 한국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 문명개화론자이면서, 일본의 보호정치가 한국의 문명개화가 아닌 국권침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바로 무장투쟁의 선두에 나선 행동가라고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평했다.[24]
안중근이 자신을 존경했던 일본인 간수 지바에게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이라는 글귀는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가 되었다.
청산리 대첩의 주역 김좌진은 안중근의 의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25]
김경천은 자신의 일기인 경천아일록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이는 안응칠씨라 한다 아 위대하다. 우리에게도 사람이 있구나!"라고 평가했다.
국제태권도연맹에서는 '중근'이라는 틀을 정하여 태권도의 기본 품세를 연습하도록 하고 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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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신념[편집]
동양평화론[편집]
《동양 평화론》의 서문에서 안중근은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若政略不改 逼迫日甚則 不得已寧亡於異族 不忍受辱於同種 議論湧出於韓淸兩國人之肺腑 上下一體 自爲白人之前驅 明若觀火之勢矣. 然則…)”라고 서술하였다.
서문의 설명처럼 안중근은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하고 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내용을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바라는‘동양평화(東洋平和)’는 이웃나라를 침략해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고 반대로 ‘일본식 동양평화’를 주창하는 이토에게는 안중근은 ‘동양평화의 교란자’였다.
이러한 이토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일으켰고 이후 5개월간의 수감생활과 공판과정에서 안중근은 이토의 사살이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음을 줄기차게 강조했다.
미완성의 옥중 저서가 된 《동양 평화론》은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의전(東洋平和義戰)’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형장에서의 최후 발언도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였다.[27]
동양평화론에 대한 평가[편집]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 시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중국인들은 “안중근 의사가 추구한 동양평화의 정신을 오늘 중국인도 배웠으면 한다”고 말하면서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선구적인 사상”이라며 “한국에서 안중근의 평화사상을 왜 국제화하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 이들은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최후진술하기 위하여 1910년 2월 12일 관동도독부 법정 제5차 공판에서 당당히 밝힌 것도 동양평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였다고 말한다. 이것이 20세기 넘어 서구 유럽 등에서 구상한 평화보다 70년이 앞서는 사상이었다는 것이다.[출처 필요]
안중근이 지향하는 평화는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길을 찾았고, 이를 통해 서양세력이 동양을 점령하고자 하는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때 동양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고 더 나아가 일본이 침략적 속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대동아공영권 논리의 함정과 모순을 이미 꿰뚫어보았기에 이에 대한 대안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7]
저서 및 유묵[편집]
안중근이 혈서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쓴 태극기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저서[편집]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
시[편집]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안중근은 〈장부가(丈夫歌)〉에서 대한제국을 침탈하고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일본인 출신 이등박문을 '쥐새끼' 라고 지칭하며 강력한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세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雄視天下兮,何日成業。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유묵[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안중근 의사 유묵입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28]
연보[편집]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 모 조마리아 사이에서 출생.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 김구와의 첫 만남.
1896년: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1897년: 19세에 천주교에 입교.
1898년~ 1904년: 천주교 전교 사업. 천주교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불발.
1905년: 부친 안태훈 사망
1906년: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
1907년: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같은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했다.
1908년: 1908년 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1909년 10월 26일: 거사
1910년 2월 14일: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 (당시 재판관할권은 일본에 없었음.[29])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순국.
가족 관계[편집]
조카 안춘생할아버지 : 안인수(安益壽), 진해 현감 역임 아버지 : 안태훈(安泰勳), 진사
어머니 : 조마리아(趙性女 마리아) (1862~1927) 독립운동가, 2008년 8월 조마리아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여동생 : 안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남동생 : 안정근(安定根),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조카 : 안진생, 미얀마 대사 역임
남동생 : 안공근(安恭根),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조카 : 안우생(安偶生), 묘는 북조선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부인 : 김아려(金亞麗) 장남 : 안문생(安文生, 일명 안분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가 7살 때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독살당함.
차남 : 안준생(安俊生, ~ 1952년 11월), 폐결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30]
자부 : 정옥녀 손자 : 안웅호(雄浩), 안중근의 유일한 손자다.[31] 증손자 : 토니안(안도영) [32]
손녀 : 안연호(1938년 ~ 2011년 2월6일)
손녀 : 안선호( ~ 2003년)
장녀: 안현생(1902 - 1959), 1953년 4월 ~ 1956년 3월 효성여자대학교 (현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학 교수로 재직함. 그녀의 남편은 한교민단(韓僑民團) 단장으로서 활동했었다고 한다. 안중근 순국 100주기가 되는 2010년 3월 26일, 그녀가 쓴 수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33]
사위 : 황일청 외손녀 : 황은주, 황은실
4촌 : 안명근(安明根1879년 ~ 1927년) 독립운동가
4촌 : 안홍근,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34]
4촌 : 안봉근(安奉根) [35] 종질 : 안춘생,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육군 중장, 초대 육사 교장, 국회의원 역임
기타[편집]
김구와의 인연[편집]
백범 김구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우덕순, 김구 등이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하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안정근은 김구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 안창호를 따랐지만, 안공근은 김구의 부하가 되어 한인애국단과 한국독립당특무대를 조직하는데 동참한다.
기념 사업[편집]
1958년 -“애국열사 안중근”은 북한에서 창작, 공연되었다.
1963년 -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으로 윤치영이 취임하였다.
1974년 - 안중근 기념 동상이 작가 김경승에 의해 제작되어 남산 구 조선신궁 자리에 설치되었다.
1979년 -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가 북조선에서 개봉되었다. 감독은 엄길선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총장이다.
1979년 - 명동성당에서 안중근 의사 탄신 100주년기념 대미사가 집전되었다.
1986년 -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뤼순 감옥을 방문하여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요청하였다.
1987년 - 소설가 복거일이 하얼빈 의거의 실패와 그로 인한 일제 강점기의 연장을 가정한 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1990년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안중근 (도마) 의사 추모 자료집-서거 80주년을 맞이하여》를 발간하였다.
1999년 - 서울시 도시공원위원회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공원 조성 제안을 부결하였다.
2000년 - 안중근 의사 유골 발굴위원회가 발족되었다.
2000년 - 하얼빈 역에서 남한과 북조선의 공동 기념식이 열렸다.
2001년 - 오페라 “아시아의 횃불 안중근”이 독일에서 초연되었다.
2002년 - 오페라 “안중근 손가락”이 한국에서 공연되었다. 2월 1일 -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개봉하였다.
2002년 - 안중근 의사 국제 평화상이 제정되었다.
2003년 -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진의 퇴진과 개혁을 촉구하는 100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2004년 - 안중근의 삶을 그린 《도마 안중근》이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연출가는 서세원이다.
2006년 - 가짜 안중근 휘호가 8천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36] 독립운동가로서는 최초로 2008년 건조된 한국 해군의 1800톤급인 손원일급 잠수함 대형 3번함의 이름이 안중근함으로 명명되었다.[37][38] 안중근 잠수함은 2008년 6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진수되었다. 안중근함 진수식에는 김태영 대한민국 합참의장과 정옥근 해군참모총장 등 군관계자와 현대중공업 임직원, 안중근 의사 숭모회 관계자 등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2009년 -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6월부터 국내 공연을 시작으로 11월까지 하얼빈, 일본 등지에서 최수종이 안중근 역을 맡은 연극 '대한국인 안중근'의 막이 올랐다. 9월 4일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 시에 세워졌다가 대한민국에 반입된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대한민국 국회에 임시 전시됐다.[39]
10월 9일~10월 10일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1909년 10월의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최초로 국제 장기 기전인 제1회 세계인 장기 대회가 개최 되었다.[40]
10월 26일 - 안중근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뮤지컬 '영웅'이 초연되었다. (제작사: 에이콤 / 연출: 윤호진 / 공연장 : LG아트센터)
2010년 -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안중근 의사 추모행사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41] 3월 26일 - 이명박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모셔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발표했다.[42]
3월 26일 - 서울 서울광장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념식이 정부 주관으로 열렸다.
7월 27일 배우 송일국이 1인 2역을 맡은 안중근의 삶과 처음으로 그의 아들 안준생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나는 너다' (2010년 7월 27일 ~ 2010년 8월 22일)가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43]
9월 30일 - 국방부와 조선일보가 안 의사 순국 100주년과 조선일보 창간 90주년을 맞아 공동으로 제정한 위국헌신상이 11명에게 처음 수여되었다.
9월 30일 - 러시아 정부가 안중근과 관련된 외교 문서를 대한민국 정부에 처음 전달하였다.[44]
11월 19일 -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기념, 대한독립 운동가 42인 초상화 특별전 《대한독립전》이 남산의 안중근의사 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서양화가 조영규) [45]
12월 1일 -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기념, 대한독립 운동가 42인 초상화 특별전 《대한독립전》이 안양시 소재의 평촌아트홀에서 개최되었다. (서양화가 조영규) [46]
12월 4일 안중근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뮤지컬 '영웅'이 1년 만에 다시 막이 오를 예정이다. (제작사: 에이콤 / 연출: 윤호진 / 공연장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안중근 사형 이후의 축하연 기록을 찾아냈다.[47]
2011년 -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및 국내 봉환을 추진하는 비정부 민간단체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가 공식 출범하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준비위원회(위원장 염수정 주교)가 안중근을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조사’ 대상으로 거론하면서 안중근에 대한 시복 조사를 실시하였다.-위키백과-
1. 개요[편집]
安重根은 以庚戌陽曆三月二十六日上午十時에 立刑場하여 欣然而曰 余爲大韓獨立而死하고 爲東洋平和而死하니 死何憾焉이리오? 遂換着韓服하고 從容就刑하니 年三十有二러라.
안중근은 경술년 양력 3월 26일 오전 10시에 형장에 서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하였다. 마침내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용이 형장으로 나아가니, 나이 32세였다.한국통사(韓國痛史)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웅이자 한민족의 대영웅.[2]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했다.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운동가이며 의병[3]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평화주의적 아시아주의자.[4]
본래는 교육 산업 등 민족의 계몽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의군을 조직하였다. 곧이어 무력단체의 참모중장으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마지막으로는 FN M1900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이고 아명인 동시에 이분의 자(字)이기도 하다.[5] 가톨릭 세례명은 토마스. 이것에서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이 나왔다. 과거에는 가톨릭에서 사도 토마스를 도마로 국역했기 때문.
2. 생애[편집]
2.1. 하얼빈 의거 이전[편집]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에서 진해현감 안인수의 아들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로 불렸다.
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격의 명수였다. 놀랍게도, 그는 화승총을 쏘아 20보[6]나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추었다고 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안씨 집안의 총 잘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청년그룹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일본 유학이 좌절되자 당시 7살의 안중근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으로 은둔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과 해주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때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3년 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다시 정부 문서에 등장하는데 내무 대신인 남정철이 쓴 보고서에 따르면 안태훈이 동학농민군 향장 유만현을 제거하고 빼앗은 세금을 마음대로 썼기 때문에 이를 원상복구하라는 내용이다.(1897년 5월 6일자 조회 제6호) 안중근은 동학군이 버리고 간 쌀 500석을 군량미로 썼다고 한다.
이때 안태훈은 천주교회를 찾아가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7] 신부의 도움을 받았으며,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 안중근 의사가 진압한 동학농민군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는 만큼 동학농민운동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
2.2. 대한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다[편집]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은 그의 전 생애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얼빈 의거 참조. 다만 안중근 본인은 이 일을 의거가 아닌, 김두성의 명령을 받고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안중근은 대한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 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헤드샷 마빡이 터져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유동하[8]와 조를 나누어 우덕순과 유동하는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에,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매복했다. 하지만 차이쟈거우 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 역에 정차했다.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9] FN M1900으로 3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4발 저격했다. 제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제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10]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 俊彦)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森 泰二郞)의 복부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 淸太郞)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나카무라 요시히코(中村 是公)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췄다.[11] 하지만 민간인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자폭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체포당했으며 안중근은 체포당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코레아 후라->종종 러시아어로 잘못 전달되는 경우가 있는데 안의사는 재판에서 세계공통어로 대한제국만세를 외쳤다고 진술하였다. 이시기 에스페란토어는 세계어 또는 세계공통어로 불렸고, 또한 안의사의 조카 역시 에스페란토 번역가였음을 보았을때 러시아어로 외쳤다는 말은 신빙성이 없다. 하얼빈에서 러시아어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중국어나 일본어 한국어도 아닌.
대한[12] 만세! 대한 만세!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저격을 받고 얼마 후 사망. 일본 야마구치 현 히카리 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으며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13]
이토히로부미의 죄악
하나. 일천팔백육십칠년, 대일본 명치천황 폐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불도의 짓[14]
둘. 천팔백구십사년,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대한 황후 폐하를 시살한 짓
셋. 일천구백영오년, 병사들을 개입시켜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위협해 강제로 다섯 조약을 맺게 한 짓
넷. 일천구백영칠년, 다시금 병사들을 이용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여 강제로 일곱조약을 맺게 한 후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일
다섯. 한국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 상, 공업등을 일일히 늑탈(勒奪)한 짓
여섯. 소위 제일은행권을 강제 하여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15]
일곱. 국채 일천삼백만원을 한국에 강제로 지게 한 짓[16]
여덟. 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것을 막은 짓
아홉.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의사들의 봉기를 폭도 취급해 쏴죽이거나 효수하고 심지어 의사들의 가족까지 십수만인을 살육한 짓
열.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짓
열하나.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오적(을사오적)칠적(정미칠적) 등 일진회 놈들을 통해 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운운한 짓
열둘. 일천구백구년 또다시 거짓으로 다섯가지 늑약을 맺게 한 짓[17]
열셋. 한국 삼천리 강토를 욕심내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짓
열넷. 한국自 일천구백오년 都無安日 이천만 생령의 살육의 곡소리가 하늘에 끊이질 않고 포성과 총알이 비오듯 쏟아져 숨쉴틈 없는 와중에도 한국이 무사태평한것처럼 명치천황을 속인 짓
열다섯.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짓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통감부문서 7권[18] / 싱가포르 영자신문 기록. 내용과 순서가 다르다.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제3국 입장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였으나, 아래 법률적 평가 문단에서 나오듯 일제의 알력에 의해 뤼순(현재는 다롄의 일부)에 있는 일본 법원으로 송치되어 버리고 만다.
의거 소식이 들리자 한국은 물론 러시아·영국·스페인,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수많은 국제 변호사들이 안중근의 변론을 맡겠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선임이 불허되었고, 일제 측의 관선 변호사가 변론을 맡게 된다. 안중근 평전 - 저:김삼웅(제 7대 독립기념관장)
2.2.1. 법률적 평가[편집]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두고 법률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중 재판상에서도 문제가 된 안중근과 이토의 신분 여부가 가장 큰 문제였다. 뤼순 소재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교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19]
이에 대해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순구 교수는 첫째, '대한의군 참모중장'(군인) 신분이었던 안중근은 1907년 발효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의 "비정규군도 교전자격이 있다"는 규정에 따라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과 둘째, 이토는 1909년 10월 사망 당시에 이미 조선 통감을 사임했지만, 대신 추밀원 의장을 맡고 있었고 그가 민간인이더라도 하얼빈 방문 자체가 한반도 지배를 포함한 대륙 진출을 목적으로 한 침략 행위였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따라서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교전에 해당될 수 있다고 말한다.[20] 다만 이 주장이 국제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장인지는 의문이 있다. 아무리 침략행위와 연관이 있다하더라도, 단순한 방문이 문언적으로 "교전"에 해당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교전의 의미를 지나치게 넓게 해석하면 당장 비슷한 시기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도 교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극단적으로는 이라크에서 있었던 각종 테러범들도 자신들이 교전자라고 주장할 여지가 있다. 설령 이토 히로부미의 방문이 교전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교전단체에 소속된 자가 교전에 참가한다고 그 자체로 교전자의 자격이 인정되지는 않는다. 당시 적용되었을 헤이그 육전규칙(1907) 교전자격 요건에 의하면 민병이나 의용병단이더라도 부하에 의해 책임지는 자에 의하여 지휘되고, "고착된 표지", 즉 제복(혹은 이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전투원임을 식별할 수 있는 복장)을 갖추고, 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하며, 전쟁법을 준수하여야 교전 자격이 인정된다. 다만 군민병이라면 공연한 무기휴대와 전쟁법 준수만으로도 교전자로서 자격이 인정되나, 안중근 의사를 군민병으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시 되며[21] 안중근 의사가 군민병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공연한 무기휴대 요건이 결격사유가 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로 권총을 들고 다녔다면 거사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 아닌가. 물론 이것말고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과정이 불법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요소는 많지만, 적어도 안중근 의사가 당시 국제법을 기준으로 교전자로서 포로 대우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재판 관할의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일본 검찰 측에서는 "하얼빈은 청국 영토이지만 동청철도의 부속지로서 모든 나라에 대해 자유지역이며, 일본국은 조약상 이 곳에 대해서 치외법권을 가진다."고 주장했으며, "메이지 38년(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일한보호협약(을사조약) 제 1조에 의해 국외에 있는 한국인에 대한 보호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주장에는 을사조약 체결의 조약상의 문제점(강압적 체결)과 한국인에게 적용될 대한제국의 법률에는 섭외법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상존하고 있었다.[22] 한편 일본 법원은 일본 형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2.3. 낯선 타국 이름 모를 야산에 잠들다[23][편집]
순국 5분전 사진. 어머니가 짜주신 새하얀 수의를 입고 찍은 사진이다. |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3월 26일[24] 오전 10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25] 이 때가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가 처형당한 뒤 두 동생이 유해를 인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일본 당국은 안중근 의사의 묘지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온갖 트집을 잡으며 유해를 넘겨주지 않았고, 뤼순 감옥인근 죄수 묘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중략)
1.
사진은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항일 의장이자 독립운동가인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어려서는 응칠(應七)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17세 되던 1895년엔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은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가 다시 돌아와 1906년에 석탄 회사를 잠시 경영하였다.
그 후 삼흥 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고, 돈의 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는 등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1907년에는 국채 보상 기성회 관서지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을 시작하였다.
한일 신협약 체결 후, 북간도로 망명한 안중근은 의병에 참가하여, 대한의군 참모중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는 주로 의병 전쟁에 참가하며 크고 작은 전투에서 활약하였고, 의병들의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909년 3월 2일, 김기룡⋅엄인섭⋅황병길⋅김태훈 등 12명의 동지와 함께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을,
김태훈(金泰勳)은 을사오적 이완용(李完用)을 각각 암살하기로 하고 손가락을 잘라 굳게 맹세하였다.
그해 9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V. N. Kokovsev)를 만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안중근은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코코프체프와 열차 회담을 마치고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저격하여 사살하였다. 바로 체포된 안중근은 이토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 의용군 사령관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당당하게 밝혔다. 또한 여러 차례의 재판을 받으며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 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일제에 체포되어서도 당당히 맞섰던 그의 항일 정신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2.
독립운동, 교육및국채보상운동, 민권 활동 등이 기재되어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사이트입니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총을 잘 쏘았는데 17세에 천주교에 입교해 활동했고, 20대에 학교를 세워 학생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1907년 한일신협약에 체결된 후 간도로 가 의병을 결집해 일본군대와 싸웠고 1909년에 하얼빈 역에서 기차에서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습니다안중근조선 오백년!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134안중근과 이또히로부미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지금으로 부터 딱 107년 전! '부슬비가 내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안중근의사는 전날 밤 고향에서 어머니가 보내 온 명주옷을 입고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간수 4명의 경호를 받으며 형장으로 불려나와 교수대에 섰다안caf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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