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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0.25 03:01
'정조평전' 쓴 한영우 교수
"탕평과 民國의 길 걸었던 정조, 어린시절 아버지의 죽음 목격… 유년기 트라우마가 聖君된 원천"
한국사학계의 원로인 한영우(79)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선 22대 정조(正祖)가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과대평가된 게 아닌가.
![한영우 교수는“정조가 스스로‘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했던 것은 모든 사람의 장점을 뽑고 약점을 보완하는 고도의 통치술을 구사했음을 드러낸다”고 했다.](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710/25/2017102500073_0.jpg)
"왕조의 근본적 체제를 바꾼 적이 없고, 편지에 상스러운 욕설을 썼다는 것 같은 얘기 말인가요?" 그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정조는 낡은 '경국대전' 체제를 극복하고 행정을 전문화해야 한다는 당대 지식인층의 요구에 부응했습니다. 편지에 쓴 욕설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지요.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지혜를 갖춰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적 군주상에 맞는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사 연구자로 60권 가까운 저서를 쓴 한 교수가 최근 800여쪽 분량의 '정조평전―성군의 길'(전 2권·지식산업사)을 냈다. 숱한 사극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면서도 주류 역사학계에서 좀처럼 인물사나 시대사 저술이 나오지 않았던 군주가 바로 정조였다. '정조평전'은 한 교수가 과거 수행했던 규장각, 화성(華城) 건설, 과거 급제자 같은 기초 연구를 토대로 쓴 책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정도전, 이이, 명성황후 등의 평전을 썼던 한 교수는 "모든 인물은 그 내면세계가 형성되는 유소년기를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정조는 열한 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참변을 당하는 엄청난 아픔을 겪었다. 이 '임오화변'은 알려진 것처럼 부자(父子)의 권력 갈등이 아니라 '삼대(三代)의 갈등'이었다고 한 교수는 분석한다.
"미천한 신분 콤플렉스에 시달린 영조는 자식을 지나치게 압박했고, 유아기 교육을 궁녀들에게서 잘못 받은 사도세자는 질병을 얻어 반역 수준의 저항을 했던 것이죠." 여기에 대단히 총명한 세손 정조가 등장하면서 왕위가 아들을 건너뛰어 손자에게 곧바로 계승될 수 있다는 '세자 패싱(passing)'의 위기감이 결정타가 됐다는 얘기다.
"훗날 임금이 된 정조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선친에 대한 효도에 매진한 것은 '아버지가 나 때문에 죽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정조가 겪은 유소년기의 트라우마는 조부인 영조로부터 받은 감화와 결합돼, 몸을 돌보지 않고 정치에 매진하는 승화(昇華)의 방식으로 극복됐다. 한 교수는 정조가 정치의 5대 목표로 삼은 것이 효치(孝治), 성군(聖君), 탕평(蕩平), 민국(民國), 정학(正學)의 길이었다고 분석한다. "정조는 규장각을 세워 동아시아 문화의 정수를 재정리했고 신하를 재교육시켰습니다. 그의 학문적 기반은 주자학이었지만 통치에선 북학파의 이용후생 사상도 받아들였지요."
학문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탕평책의 강화와 기민(飢民) 구제 같은 실질적 정책을 통해 정치와 경제의 안정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정조 때만큼 민란이 드물었던 시기가 없었습니다. 백성의 지위도 크게 향상되지요. 광해군 때 20% 미만이었던 비(非)양반 문과 급제율은 정조 때는 53%까지 올라갑니다." 나아가 1791년 유력 상인의 특권을 박탈한 '신해통공'은 크게 볼 때 시장경제를 향한 전환점 이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민국, 즉 '백성의 나라'를 만들려는 노력이었다"고 한 교수는 말했다. 정조가 19세기가 막 시작되려는 시점에 갑자기 죽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성군이 되려고 했던 그의 목표는 과연 성취된 것일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정도면 성군이라고 봐 줘야 되는 거 아닐까요."
조선사 연구자로 60권 가까운 저서를 쓴 한 교수가 최근 800여쪽 분량의 '정조평전―성군의 길'(전 2권·지식산업사)을 냈다. 숱한 사극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면서도 주류 역사학계에서 좀처럼 인물사나 시대사 저술이 나오지 않았던 군주가 바로 정조였다. '정조평전'은 한 교수가 과거 수행했던 규장각, 화성(華城) 건설, 과거 급제자 같은 기초 연구를 토대로 쓴 책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정도전, 이이, 명성황후 등의 평전을 썼던 한 교수는 "모든 인물은 그 내면세계가 형성되는 유소년기를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정조는 열한 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참변을 당하는 엄청난 아픔을 겪었다. 이 '임오화변'은 알려진 것처럼 부자(父子)의 권력 갈등이 아니라 '삼대(三代)의 갈등'이었다고 한 교수는 분석한다.
"미천한 신분 콤플렉스에 시달린 영조는 자식을 지나치게 압박했고, 유아기 교육을 궁녀들에게서 잘못 받은 사도세자는 질병을 얻어 반역 수준의 저항을 했던 것이죠." 여기에 대단히 총명한 세손 정조가 등장하면서 왕위가 아들을 건너뛰어 손자에게 곧바로 계승될 수 있다는 '세자 패싱(passing)'의 위기감이 결정타가 됐다는 얘기다.
"훗날 임금이 된 정조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선친에 대한 효도에 매진한 것은 '아버지가 나 때문에 죽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정조가 겪은 유소년기의 트라우마는 조부인 영조로부터 받은 감화와 결합돼, 몸을 돌보지 않고 정치에 매진하는 승화(昇華)의 방식으로 극복됐다. 한 교수는 정조가 정치의 5대 목표로 삼은 것이 효치(孝治), 성군(聖君), 탕평(蕩平), 민국(民國), 정학(正學)의 길이었다고 분석한다. "정조는 규장각을 세워 동아시아 문화의 정수를 재정리했고 신하를 재교육시켰습니다. 그의 학문적 기반은 주자학이었지만 통치에선 북학파의 이용후생 사상도 받아들였지요."
학문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탕평책의 강화와 기민(飢民) 구제 같은 실질적 정책을 통해 정치와 경제의 안정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정조 때만큼 민란이 드물었던 시기가 없었습니다. 백성의 지위도 크게 향상되지요. 광해군 때 20% 미만이었던 비(非)양반 문과 급제율은 정조 때는 53%까지 올라갑니다." 나아가 1791년 유력 상인의 특권을 박탈한 '신해통공'은 크게 볼 때 시장경제를 향한 전환점
"그 모든 것이 민국, 즉 '백성의 나라'를 만들려는 노력이었다"고 한 교수는 말했다. 정조가 19세기가 막 시작되려는 시점에 갑자기 죽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성군이 되려고 했던 그의 목표는 과연 성취된 것일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정도면 성군이라고 봐 줘야 되는 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