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학계의 거짓말 잔치(43) 고구려의 압록수와 평양은 현 압록강과 평양 아니다!『삼국사기』는 동천왕이 옮긴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지 않았으나, 훗날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 평양에 대해서는 지금의 평양으로 인식하여 “평양은 서경인 것 같고 패수는 대동강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고구려의 평양은 한 번도 지금의 평양에 있은 적이 없었고, 대륙에 있었다. 이를 수ㆍ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기록을 통해 밝히겠다.
▲ 고구려 시기의 압록수, 살수, 평양, 사비성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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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때의 ‘압록수’는 현 요하 중국의 수나라가 남북을 통합한 후 양제는 612년에 2백 만 대군으로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수나라의 9군은 요수를 건너 요동에 이른 뒤 ‘압록수의 서쪽’에 재집결했는데 을지문덕 장군이 압록수를 건너와 거짓 항복하겠다고 속이고 다시 압록수를 건너 돌아왔다. 수나라는 뒤늦게 속은 것을 알고 압록수를 건너 추격했는데, 이때의 상황을 『삼국사기』‘영양왕’ 조에 이렇게 기록했다.
“(수나라 군대는)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십 리 되는 곳에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펼쳤다.” 매국사학에서는 이 압록수를 당연히 지금의 압록강으로, 그리고 살수를 청천강으로 보고 있으며, 각 급 학교에서 모두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위 기록과 맞지 않는 반도사관에 불과하다. 수나라 군사가 ‘압록수의 서쪽’에 집결했다고 했는데, 만약 압록수가 지금의 압록강이었다면 동서로 흐르는 압록강의 서쪽이 아니라 북쪽에 집결했다고 해야 된다. 또 수나라 군대가 압록수를 건너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넜다고 했다. 살수가 만약 청천강이라면 압록강을 건넌 후 동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진격해야 이르게 됨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위의 압록수는 지금의 랴오허(遼河)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나라 군대가 남북으로 흐르는 이 랴오허의 서쪽에 집결한 것이며, 또 이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에 이른 것이다. 『삼국유사』 ‘순도조려’ 조에 보이는 “요수(지금의 랴오허)는 일명 압록인데, 지금은 안민강이라 부른다.”고 한 기록에서 랴오허를 이전에 압록수라 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평양은 현 북한의 평양 아니다!그리고 또 수나라 군대가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십 리 되는 곳에 머물렀다고 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인 이때의 평양은 살수의 동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코 청천강의 남쪽인 지금의 평양이 될 수 없음도 자명하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이 또 하나 있다. 수 양제는 거듭된 패전에도 불구하고 614년에 3차 원정에 나섰으며, 이때 수나라 수군 대장 내호아는 비사성으로 진격했는데 이에 관하여 ‘영양왕’ 조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맞아 싸우니 내호아는 이를 쳐 이기고 장차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 ”여기의 비사성은 지금의 랴오허 동쪽, 발해의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하이청(海城)을 말한다. 매국사학에서는 지금의 랴오허(요하)를 옛 요수로 간주하여 그 강이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경계였던 것으로 우기지만 두 나라의 국경인 옛 요수는 지금의 랴오허가 아니라 훨씬 더 서쪽인 지금의 베이징 부근을 흐르는 강이었다.
그러므로 양제가 처음 베이징 부근의 국경인 요수를 건너 압록수(지금의 랴오허)까지 진격하여 군사들을 그 서쪽에 재집결시켰고, 수군대장 래호아가 랴오허 하류의 비사성(지금의 하이청)에 상륙한 것은 평양성을 공략함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상륙했을 것이다.
따라서, 평양성은 랴오허와 살수의 멀지 않은 동쪽, 비사성으로부터도 멀지 않은 북쪽에 있어야 하는데, 최근 강원대 남의현 교수는 요양이 당시의 평양이었다고 밝혔다. 만에 하나라도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었다면 내호아는 당연히 대동강으로 상륙하지 거기서 멀리 떨어진 요하 입구로 상륙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고대사학계에서는 이렇게 명확한 것조차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