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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개띠 해 -남도마실이야기 58년 개띠 '베이비붐세대' 무술년, 대조영 발해 건설 몽골침입, 황룡사 소실 돼 입력시간 : 2018. 01.02. 00:00 투표

화이트보스 2018. 1. 3. 10:36


황금개띠 해 -남도마실이야기
58년 개띠 '베이비붐세대'
무술년, 대조영 발해 건설
몽골침입, 황룡사 소실 돼
입력시간 : 2018. 01.02. 00:00


투표장에 들어가고 있는 노인들.
2018년은 무술년이고, 무술년(戊戌年)은 육십간지의 35번째 해다.

개띠해인데 오행으로 봤을 때'무(戊)'는 황색에 해당하는 노랑 황금색이라서, 2018년은 '황금 개띠 해'로 불리고 있다. 역술적으로 2018년 무술년(戊戌年)은 황금개띠 해로 왕성하고 활발한 해다. 

'무(戊)'는 도끼를 본떠 만든 형상문자라고 한다. 뜻은 무기인 도끼는 나를 보호하고 자신의 생명을 주기도 한다는 의미도 있다. 개를 표현하기도 한다, 개는 야생동물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들에게 가축화 되었으며, 또한 주인과 집을 지키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무술년 역사적 사건 뭐가 있을까

60년에 한번 돌아오는 무술년이 매우 궁금하다, 역사적 사건이 뭐가 있었을까, 가장 가까운 1958년 역사적 의미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우리가 쉽게 표현되는 '58년 개띠'라고 불리는 이들의 이야기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그들을 베이비 붐(baby boom)세대라 칭한다. 

베이비 붐 세대란 한국전쟁 종전 후 1955~60년 출생한 세대를 이야기 한다. 한국전쟁으로 어수선했던 사회 분위기가 안정되면서, 1958년부터 출생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베이비붐 세대를 대표하게 됐다는 것이 유력한 분석이다. 

통계청 인구 추계자료에 따르면 1955년 80만2342명, 1956년 82만6454명, 1957년 85만9056명 등 80만 명대를 맴돌던 출생 인구는 1958년 92만17명을 기록, 사상 처음 90만 명대를 돌파했다. 이후 1959년 97만9267명, 1960년 100만6018명 등 출생 인구는 폭발적인 증가 추세를 보였다. 



●58년, 베이비붐 세대 시작

그럼 왜 유독 '58년 개띠'라는 말이 생겨 고유 명사처럼 회자됐을까. '58년 개띠'가 베이비붐 세대의 주력이 되는 이유는 출생률이 절정기였기도 하지만, 굴곡의 현대사를 겪고 많은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중학교 평준화, 고등학교 연합고사제, 유신헌법, 학도호국단, IMF 등 격동의 회오리를 겪었던 세대다.

그럼 오래 전 역사는 어떻게 기록 하였을까?

李弘稙 편저의 國史大事典의 年表에 의하면 역사 속의 무술년을 살펴보면 458년 왕호(王號)가 마립간(麻立干)인 신라 19대 눌지왕(訥祗王)이 사망했다. 

698년에는 대조영이 만주 및 연해주 지방에 걸쳐 발해를 건국했다. 당시 대조영은 길림성에서 진(震)을 건국하고 이후 국명을 발해로 바꾼다.

758년 신라 경덕왕 17년 2월 내외관의 휴가일이 60일 이상 되는 자는 관직을 내려놓게 한다는 기록이, 그 시대에도 슬쩍 땡땡이 가는 관리들이 있었나 보다. 결론은 휴가가 60일 이었다는 것. 

818년 발해의 9대간왕(簡王)이 사망했는데, 그는 즉위한 다음 해에 죽었기에 남아 있는 치적이나 일화도 없다.

998년 고려 목종 1년에는 역사상 가장 유능했던 외교관으로 고려문신 서희(徐熙)가 사망한다. 

그는 기세가 등등하던 거란 소손녕의 80만 대군을 담판으로 강동6주를 되찾아 국경을 압록강까지 넓혔던 것이다.



●몽골군, 황룡사 목탑 불태워

1238년 고려 고종25년에는 몽고의 3차 침입으로 신라시대 때 건축된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이 잿더미가 된다. 당시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서 저항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몽골군은 경주까지 진격해 황룡사에 불을 질러 목탑까지 태워버렸다. 

1418년 조선 태종18년 세종이 왕위에 오른다. 연표를 살펴보면 6월에 세자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에 봉한다, 바로 그가 세종대왕이다.

1478년 조선 성종 9년 2월에는 좌의정 김질이 죽는다, 그는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배신, 수양대군에게 고변함으로써 사육신 사건을 일으켜, 충신과 많은 인재들을 희생시킨 장본인이다. 1538년 조선 중종 38년에는 경북 성주군에 있던 성주사고가 화재로 전소되고 만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사망

1598년 조선 선조 31년에는 특별한 해이다. 먼저 8월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또 끝나게 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먼저 사망으로, 왜군이 퇴각하자 이를 섬멸하다 11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 앞바다에서 장렬히 전사한다.

1658년 조선 효종 9년은 청나라 순치제 재위 15년으로 조선 효종이 북벌운동에 매진하던 때로 청의 요청으로 신류(申瀏)장군이 이끄는 260명이 러시아를 정벌하는 제2차 나선정벌이 있던 해다. 

1718년 조선 숙종 44년에는 전국에 흉년으로 세입이 계속 줄어들어 재정을 담당하는 戶曹(호조)의 경영이 부족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호조의 경영이 부족했다는 말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IMF 외환위기나 국가 디폴트(default) 사태에 빠진 격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2월에는 전염병이 창궐, 사망자가 속출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1778년 조선 정조 2년 7월에는 공충도(公忠道)를 홍충도(洪忠道)로 바꿨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충청감영의 소재지인 공주(公州)가 대역죄인인 심금혁(沈金奕)의 출생지이기 때문에 '공'자를 '홍'자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이로써 충청도의 옛 이름이 한때 공충도, 홍충도였음을 알 수 있다. 홍충도는 홍주(지금의 홍성)와 충주의 약자이다. 그해 12월에는 실학자 박제가가 청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와 쓴, 당시로서는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사상을 담은 북학의 (北學議)를 펴낸다. 

1838년 조선 헌종 4년 3월에 지진이 일어난 걸 보면 한반도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님을 그때부터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8월에는 호조의 경영이 또 부족해 경상ㆍ전라도로부터 쌀 2만 섬과, 평안도에서 좁쌀 1만 섬을 바치게 했다는 기사도 나온다. 쌀과 좁쌀을 추가로 바쳐야 했을 백성들의 고통이 눈에 선하다. 



●흥선대원군 사망ㆍ최시형 순교

1898년 조선 고종 35년에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79세로 생을 마감하고, 7월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이 처형당해 순교한다. 8ㆍ9월에는 제국신문과 황성신문이 잇달아 창간돼 그나마 언론창달에 한몫을 하게 된다. 10월에는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고 자유ㆍ민권 신장을 위해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가 서울 종로에서 열린다.

1958년 60년 전 자유당 정부 시절인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자유당 126명, 민주당 79명, 무소속 27명, 기타 1명이 당선되었다. 

이로써 군소정당들은 몰락하고 양당제도의 기틀이 마련됐다. 그리고 2월에는 승객ㆍ승무원 34명이 북한으로 납치된 KNA기 공중납치사건이 일어난다. 8월에는 전국적으로 뇌염환자 3200여명이 발생, 635명이 사망하는 대재앙이 발생한 해이기도 하다. 

박재완 (문화시민기자ㆍ남도마실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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