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中 다롄서 안 의사 추모식
이날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한 안 의사가 일제 통치 지역인 뤼순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한 지 108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전 장관은 “해마다 안 의사 영정에 같은 말씀을 고하는 게 너무나 죄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보훈처의 유해발굴추진단 자문위원장이기도 하다.
![뤼순 감옥에 수감중일 때의 안중근 의사 [중앙포토]](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4/02/d768c28f-452c-4202-9fab-6644580a4d8a.jpg)
뤼순 감옥에 수감중일 때의 안중근 의사 [중앙포토]
순국 108년 지나도록 유해 행방 못 찾아
그의 묘가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족에게 유해 인도를 하지 않고 감옥 담장 바깥의 묘지에 묻었기 때문이다. 사형집행 보고서에는 “감옥 묘지에 묻었다”고만 적혀 있을 뿐 구체적인 매장 위치에 대해선 기록이 없다.
이날 추도식이 끝난 뒤 임성현 국가보훈처 보훈예우국장과 함께 그동안 매장 장소로 거론돼 온 후보지 세 곳을 답사했다. 그 중 뤼순 감옥 바로 뒤편의 위안바오산(元寶山)은 정부와 전문가들이 큰 기대를 걸었던 곳이다.
순국 당시 뤼순감옥 전옥(형무소장)의 딸인 이마이 후사꼬(今井房子)가 제공한 사진과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 구리하라 사다기치(栗原貞吉)는 안 의사 사형집행 뒤 “아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고 이마이는 집 안에 사당을 만들어 놓고 평생 안 의사를 숭모했다.
그가 제공한 사진은 1911년 감옥묘지에서 위령제를 지낸 직원들이 단체 촬영한 것으로 배경에는 안 의사의 묘지 위치가 화살표로 표시돼 있었다.
![이마이 후사꼬가 제공한 1911년 뤼순감옥 뒤산에서 촬영한 사진. 안중근 의사의 유해 매장지에 화살표를 표시해 두었다. [국제한국연구원]](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4/02/482daf3b-627e-4fd2-98e9-29a7abe8d925.jpg)
이마이 후사꼬가 제공한 1911년 뤼순감옥 뒤산에서 촬영한 사진. 안중근 의사의 유해 매장지에 화살표를 표시해 두었다. [국제한국연구원]
사형 보고서에도 매장 위치 기록 없어
![2008년 발굴 모습 [중앙포토]](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4/02/a75a42b2-9d3e-43e1-88f0-0d9bb5e114fd.jpg)
2008년 발굴 모습 [중앙포토]
![안중근 의사 매장지로 추정돼 2008년 발굴을 했던 위안바오산 능선은 현재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뤼순=예영준 특파원]](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4/02/00492677-8c3a-4b49-88fe-c5d3479234df.jpg)
안중근 의사 매장지로 추정돼 2008년 발굴을 했던 위안바오산 능선은 현재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뤼순=예영준 특파원]
또 아파트 부지 조성 공사로 땅이 파헤쳐져 당초 목표로 삼았던 지역의 40%가량은 발굴을 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완성돼 추가 발굴도 불가능한 상태다.
그 이후 인근 야산에 고려인 묘지가 있었다는 현지인의 증언에 따라 중국 측이 단독으로 발굴에 나섰으나 역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처음부터 근거가 부정확했던 셈이다.
![고려인묘지가 있었다는 증언에 따라 2008년 10월 중국이 단독 발굴했던 지역. 현재 흙무덤으로 변해 있다.[뤼순=예영준 특파원]](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4/02/ff33d02b-dae5-469b-96b5-a7fed268f62d.jpg)
고려인묘지가 있었다는 증언에 따라 2008년 10월 중국이 단독 발굴했던 지역. 현재 흙무덤으로 변해 있다.[뤼순=예영준 특파원]
당시 발굴단장은 안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이었다. 북한 발굴단은 이 묘지가 당시 고구마밭으로 개간된 상태인 데다, 사형수들을 매장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뼈를 다른 곳에 버렸다는 감옥 관계자의 증언을 듣고는 발굴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현재 안 의사 유해찾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민간단체와 전문가들은 “사형집행 보고서에 나오는 감옥 묘지로 동산포 이외의 장소를 생각하기 어렵다”며 발굴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곳에서 안 의사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뤼순감옥 동쪽의 동산포 감옥묘지 터. 시민단체는 이 곳의 발굴에 기대를 걸고 있다. [뤼순=예영준 특파원]](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4/02/34d175de-296f-4934-8b77-6d83a8ea4798.jpg)
뤼순감옥 동쪽의 동산포 감옥묘지 터. 시민단체는 이 곳의 발굴에 기대를 걸고 있다. [뤼순=예영준 특파원]
중국은 ^남북 합의에 의한 발굴지 특정 ^구체적 근거 자료 제시 등의 조건이 충족되면 발굴에 협력하겠다는 입장이다. 2008년 위안바오산 발굴 허가는 이 두 조건을 충족한 결과였다. 남북 합의는 안 의사가 황해도 해주 출신인 데다 중국이 외교적 고려에 따라 남북 어느 한쪽의 연고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 “순국 110년까지 유해 찾기 최선”
최근에는 땅을 파헤치지 않고 지표면 아래를 조사할 수 있는 기술인 지표투과레이더(GPR) 탐사를 제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중국 당국의 허가를 받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땅속에 매설된 군 통신 선로 등의 정보가 이 과정에서 노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 2년여 동안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체제 배치에 따른 갈등으로 발굴 협력 요청에 대한 중국의 반응이 냉랭한 상태였다.
현지를 둘러본 임 국장은 “3·1 운동 100주년이자 안 의사 의거 110주년이 되는 내년, 그리고 순국 110주년이 되는 내후년까지 반드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정부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함께 답사한 김월배 하얼빈이공대 교수는 “안 의사의 유해 발굴을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며 “매장지를 특정할 수 있는 증거 자료의 발견에 정부뿐 아니라 한·중·일 학자들의 공동 연구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서울 효창공원에 있는 안 의사의 가묘(헛무덤)의 비석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송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 조성된 것입니다.”
언젠가 돌아올 님을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70년이 넘도록 그 자리에 서 있다.
뤼순=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서울 효창공원의 안중근 의사 가묘. 안 의사의 유해가 송환되면 모실 곳이라고 씌어져 있다.[중앙포토]](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4/02/bcdbd64a-ec3d-4706-bb68-294fae1641e7.jpg)
서울 효창공원의 안중근 의사 가묘. 안 의사의 유해가 송환되면 모실 곳이라고 씌어져 있다.[중앙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