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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4.04 03:00 | 수정 : 2018.04.04 09:49
[117] 강직한 내시 김처선과 청도 내시 고택의 비밀
고려 국정 농단한 내시
조선시대, 권한 대폭 축소… 난세에는 역사 전면에
연산군 '비서실장'급 김자원… 온갖 악행 일삼아
내시 김처선(金處善)은 목숨 걸고 간언하다 비참한 죽음, 가문 멸족… '處'자 금지령
경북 청도 내시 가옥 24시간 여자 감시 구조… 거세당한 남자의 서글픈 심리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804/04/2018040400009_0.jpg)
환관(宦官), 거세와 바꾼 권력
1310년대 고려 26대 충선왕 무렵 탄광에서 일하던 사내 고용보는 원나라에 파견됐다. 거세(去勢)를 당하고 환관으로 끌려갔다. 대접 못 받고 굶주리는 광부로 사느니 남자 구실 못 해도 떵떵거리며 살 궁리를 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잘한 선택이었다. 투만티르(禿滿迭兒)로 개명한 고용보는 1333년 원 혜종에게 궁녀를 추천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차 수발을 들던 그녀는 성이 기(奇)씨요, 고려에서 보낸 여자다. 훗날 황후가 되니 바로 기황후다. 기황후가 권세를 잡으니 고용보 또한 막강한 권력가가 되었다.
권력은 이 정도였다. 1343년 겨울 혜종이 고용보를 보내 충혜왕에게 옷과 술을 내렸다. 왕이 마중을 거부했다. 고용보가 '황제께서 언젠가 왕을 불경하다고 하였다'라고 하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마중 나왔다. 황제 일행이 왕을 걷어차고 포박하니 왕이 고용보를 불렀다. 고용보가 왕을 꾸짖고 말에 실어 원으로 데려갔다. 이에 원 혜종이 '네가 백성을 박해함이 너무 심하여 너의 피로써 천하의 개를 먹인다 하여도 죄를 덮을 수 없다. 그러나 짐은 살생을 즐기지 않으므로 너를 유배하는 것이니 원망하지 말라.'(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 고려 1343년) 왕과 정승들은 고용보를 멀리서 보기만 해도 절을 했고, 뇌물을 받아 금과 비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려사 환자전·宦者傳)
1310년대 고려 26대 충선왕 무렵 탄광에서 일하던 사내 고용보는 원나라에 파견됐다. 거세(去勢)를 당하고 환관으로 끌려갔다. 대접 못 받고 굶주리는 광부로 사느니 남자 구실 못 해도 떵떵거리며 살 궁리를 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잘한 선택이었다. 투만티르(禿滿迭兒)로 개명한 고용보는 1333년 원 혜종에게 궁녀를 추천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차 수발을 들던 그녀는 성이 기(奇)씨요, 고려에서 보낸 여자다. 훗날 황후가 되니 바로 기황후다. 기황후가 권세를 잡으니 고용보 또한 막강한 권력가가 되었다.
권력은 이 정도였다. 1343년 겨울 혜종이 고용보를 보내 충혜왕에게 옷과 술을 내렸다. 왕이 마중을 거부했다. 고용보가 '황제께서 언젠가 왕을 불경하다고 하였다'라고 하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마중 나왔다. 황제 일행이 왕을 걷어차고 포박하니 왕이 고용보를 불렀다. 고용보가 왕을 꾸짖고 말에 실어 원으로 데려갔다. 이에 원 혜종이 '네가 백성을 박해함이 너무 심하여 너의 피로써 천하의 개를 먹인다 하여도 죄를 덮을 수 없다. 그러나 짐은 살생을 즐기지 않으므로 너를 유배하는 것이니 원망하지 말라.'(신원사·新元史 외국열전 고려 1343년) 왕과 정승들은 고용보를 멀리서 보기만 해도 절을 했고, 뇌물을 받아 금과 비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려사 환자전·宦者傳)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804/04/2018040400009_1.jpg)
일개 환관이 한 나라 왕을 꾸짖고 유배까지 보냈다. 나라가 굴러갈 리 만무했다. 훗날 '고려사(高麗史)'는 환자전이라는 고려시대 환관들 열전을 따로 뽑아 이들 작태를 기록했다. 환관의 발호와 당대 지배 이념인 불교의 폐해로 고려는 멸망했다. 조선은, 당연히 불교를 억압했고 환관 권한을 대폭 축소했다.
조선의 환관, 내시들
내시와 환관은 다르다. 거세한 남자를 '환관(宦官)'이라 하고 왕실 최측근 관료를 '내시(內侍)'라 했다. 고려 중기까지 내시(內侍)는 왕의 비서관을 뜻했다. 내시부는 젊은 엘리트 관료 집단이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또한 내시였다. 환관은 태생이 사내들이니 힘은 힘대로 쓰고, 고환을 도려냈으니 궐내 여자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실 허드렛일은 이 환관이 맡았다. 그런데 환관 가운데 의종(1146~1170) 눈에 든 정함이라는 자가 내시부에 발령 나면서 환관이 내시 임무를 맡게 되었다(의종은 무신들 수염을 촛불로 태우며 업신여기다 쿠데타로 죽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시 정함은 용하게 살아남았다). 조선 왕조는 내시로부터 이런 막강한 정책 기획 권한을 빼앗았다. 감선(監膳·음식)·전명(傳命·왕명 출납)·수문(守門·문지기)·소제(掃除·청소) 같은 허드렛일이 임무였다. 그 내시직 충원 인력은 모두 거세당한 남자, 환관이었다. 내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환관은 사람과 가까이할 수 없다고 하였나이다(古人云閽不得齊人).'(1453년 단종실록 1년 11월 18일)
폭군 연산과 간신배 김자원
조선의 환관, 내시들
내시와 환관은 다르다. 거세한 남자를 '환관(宦官)'이라 하고 왕실 최측근 관료를 '내시(內侍)'라 했다. 고려 중기까지 내시(內侍)는 왕의 비서관을 뜻했다. 내시부는 젊은 엘리트 관료 집단이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또한 내시였다. 환관은 태생이 사내들이니 힘은 힘대로 쓰고, 고환을 도려냈으니 궐내 여자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실 허드렛일은 이 환관이 맡았다. 그런데 환관 가운데 의종(1146~1170) 눈에 든 정함이라는 자가 내시부에 발령 나면서 환관이 내시 임무를 맡게 되었다(의종은 무신들 수염을 촛불로 태우며 업신여기다 쿠데타로 죽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시 정함은 용하게 살아남았다). 조선 왕조는 내시로부터 이런 막강한 정책 기획 권한을 빼앗았다. 감선(監膳·음식)·전명(傳命·왕명 출납)·수문(守門·문지기)·소제(掃除·청소) 같은 허드렛일이 임무였다. 그 내시직 충원 인력은 모두 거세당한 남자, 환관이었다. 내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환관은 사람과 가까이할 수 없다고 하였나이다(古人云閽不得齊人).'(1453년 단종실록 1년 11월 18일)
폭군 연산과 간신배 김자원
![서울 도봉구 내시산에 있는 내시 승극철 부부 묘.](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804/04/2018040400009_2.jpg)
국가 시스템이 비정상이면 난세(亂世)가 닥친다. 봉건시대 국가 시스템은 곧 지도자, 왕이다. 왕이 비정상일 때 난세다. 제10대 왕 연산군(재위 1494∼1506) 때가 그러하였다. 여색과 재화를 밝히고 사람 목숨을 곤충처럼 여긴 왕이었다. 1504년 연산군 10년 7월 16일 하루 일과를 본다.
'조지서(造紙署·종이 만드는 관청)를 바삐 철거하라. 군사 100명을 데리고 창의문 밖에 거주하는 사람과 중을 쫓아내라. 처녀와 양인의 딸들을 모조리 궁궐로 부르라. 궁성에서 100척 떨어진 곳에 출입금지 표를 세우라. 친히 가서 점검하리라. 도성에 하루쯤 통행금지를 해도 상관없다. 모두 금하라. 경복궁 성 모퉁이로 남산 기슭, 낙산 산등성이까지 인가를 모두 헐고 건너편 산 밖을 (내 재산) 경계로 삼을 것이다. 철거한 뒤 내가 다시 보리라.'(1504년 연산군일기 10년 7월 16일)
별장 건축을 위해 세검정 조지서를 철거하라는 명부터 민가 강제 철거까지 국가와 관련된 명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매사가 이 모양이었다. 그리고 닷새 뒤 우찬성(부총리급)과 판서(장관급) 무리를 파견해 처리 과정을 점검했다.
이들과 동행한 사람이 내시 김자원(金子猿)이었다. 김자원은 내시 가운데 왕명 출납을 맡은 승전색(承傳色)이었다. 개인 비서실장이다. 폭군의 최측근이다. 제사 날짜를 관료들에게 물어오라 하니 심부름 대신 자기가 직접 날짜를 점지해 대답한(回啓) 사람이 김자원이었다.(8년 2월 29일) 민가에 벼락이 치면 점검한 사람도 김자원이었다.(10년 7월 22일) 김자원이 귀였고 눈이었고 입이었다. 승정원이라는 공식 비서실이 있었지만 연산군은 곧은 소리 해대는 관리들을 언제나 우회했다. '승전 내관 김자원이 명령을 전할 적에 가고 온 말이 많았으나, 승지와 사관(史官)이 참석하여 듣지 못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3월 19일)
연산군은 김자원을 가선대부(종2품·차관보급)로 승진시키기도 하고 수시로 곤장을 때리며 건방짐을 경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산군이 사치와 방탕만을 일삼는 동안 국가 정사는 오로지 내시 김자원에게 맡겨져 있었다.'(국사편찬위, 한국사, '중종반정과 기묘사화')
연산군은 그가 농락한 세상에 의해 폐위돼 강화도에서 죽었다. 중종반정이다. 김자원의 최후는 아무도 모른다. 처형됐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목숨 부지하고 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짓거리가 간신 짓이다. 간신배는 목숨을 걸지 않는다.
충직한 내시 김처선
충신은 목숨을 건다. 김자원이 승전색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 같은 내시부에 늙은 김처선(金處善·?~1505)이 있었다. 김처선은 연산군이 죽였다.
김처선은 세종 때 환관으로 궁에 들어간 이래 유배와 복직을 거듭했다.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포항에 유배 중이던 김처선은 김종서 반대파 집단 복직 때 함께 복직했다. 이후 행태가 기이했다. 2년 뒤 김처선은 금성대군과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돼 파직돼 노비로 전락했다. 그리고 2년 뒤 세조는 그를 복직시킨다. 공신으로 책록까지 해준다. 그런데 세조가 거둥하는데 시중을 들지 않고(1464년 세조10년 6월 27일), 시녀와 함께 만취해 길에서 뻗어버리는(1465년 세조 11년 9월 3일) 기행을 보였다. 그런 김처선이 성종 9년 정 2품 자헌대부로
'조지서(造紙署·종이 만드는 관청)를 바삐 철거하라. 군사 100명을 데리고 창의문 밖에 거주하는 사람과 중을 쫓아내라. 처녀와 양인의 딸들을 모조리 궁궐로 부르라. 궁성에서 100척 떨어진 곳에 출입금지 표를 세우라. 친히 가서 점검하리라. 도성에 하루쯤 통행금지를 해도 상관없다. 모두 금하라. 경복궁 성 모퉁이로 남산 기슭, 낙산 산등성이까지 인가를 모두 헐고 건너편 산 밖을 (내 재산) 경계로 삼을 것이다. 철거한 뒤 내가 다시 보리라.'(1504년 연산군일기 10년 7월 16일)
별장 건축을 위해 세검정 조지서를 철거하라는 명부터 민가 강제 철거까지 국가와 관련된 명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매사가 이 모양이었다. 그리고 닷새 뒤 우찬성(부총리급)과 판서(장관급) 무리를 파견해 처리 과정을 점검했다.
이들과 동행한 사람이 내시 김자원(金子猿)이었다. 김자원은 내시 가운데 왕명 출납을 맡은 승전색(承傳色)이었다. 개인 비서실장이다. 폭군의 최측근이다. 제사 날짜를 관료들에게 물어오라 하니 심부름 대신 자기가 직접 날짜를 점지해 대답한(回啓) 사람이 김자원이었다.(8년 2월 29일) 민가에 벼락이 치면 점검한 사람도 김자원이었다.(10년 7월 22일) 김자원이 귀였고 눈이었고 입이었다. 승정원이라는 공식 비서실이 있었지만 연산군은 곧은 소리 해대는 관리들을 언제나 우회했다. '승전 내관 김자원이 명령을 전할 적에 가고 온 말이 많았으나, 승지와 사관(史官)이 참석하여 듣지 못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3월 19일)
연산군은 김자원을 가선대부(종2품·차관보급)로 승진시키기도 하고 수시로 곤장을 때리며 건방짐을 경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산군이 사치와 방탕만을 일삼는 동안 국가 정사는 오로지 내시 김자원에게 맡겨져 있었다.'(국사편찬위, 한국사, '중종반정과 기묘사화')
연산군은 그가 농락한 세상에 의해 폐위돼 강화도에서 죽었다. 중종반정이다. 김자원의 최후는 아무도 모른다. 처형됐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목숨 부지하고 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짓거리가 간신 짓이다. 간신배는 목숨을 걸지 않는다.
충직한 내시 김처선
충신은 목숨을 건다. 김자원이 승전색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 같은 내시부에 늙은 김처선(金處善·?~1505)이 있었다. 김처선은 연산군이 죽였다.
김처선은 세종 때 환관으로 궁에 들어간 이래 유배와 복직을 거듭했다.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포항에 유배 중이던 김처선은 김종서 반대파 집단 복직 때 함께 복직했다. 이후 행태가 기이했다. 2년 뒤 김처선은 금성대군과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돼 파직돼 노비로 전락했다. 그리고 2년 뒤 세조는 그를 복직시킨다. 공신으로 책록까지 해준다. 그런데 세조가 거둥하는데 시중을 들지 않고(1464년 세조10년 6월 27일), 시녀와 함께 만취해 길에서 뻗어버리는(1465년 세조 11년 9월 3일) 기행을 보였다. 그런 김처선이 성종 9년 정 2품 자헌대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