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구간 : 중산리-천왕봉-지리산 주릉-노고단-성삼재
제1호 국립공원 지리산은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 경남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에 걸쳐 있다. 남한에서 두 번째 높은 산으로 최고봉인 천왕봉(1,916m)과 서쪽 끝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15m)을 정점으로 동서 50km, 남북 32km의 거대한 산악군이며 그 둘레가 320km에 달한다. 3대 고봉에다가 1,500m급 봉우리 10여 개, 1,000m급 봉우리 20여 개, 그밖에 들고나는 봉우리들이 80여 개에 이른다. 복잡한 지각변동과 화성활동, 변성작용으로 산간분지와 고원이 형성되고 깊은 협곡이 생겼으며, 다양한 기후변화와 맞물려 곳곳에 비경을 만들었다. 지리10경에서 보듯이 지리산은 산 모양이 다기다양多岐多樣하고 고준광대高峻廣大하면서도 중후인자重厚仁慈한 산으로 유장悠長한 산악미를 갖고 있다. 민족의 명산으로 불리며 인기명산 1위를 자랑하는 명산 중의 명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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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남쪽 끝은 지리산 천왕봉이다. 북진종주는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서 시작한다. 구간이 길기 때문에 대체로 천왕봉 일출 시간에 맞춰 새벽에 오른다. 몸을 풀고 배낭을 꾸려 어둠 속에 산행을 시작했다. 날씨는 흐리지만 하늘에 은은한 빛이 감돈다.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살짝살짝 달이 비치다가 이내 사라진다.
어둠의 시간은 길다. 어둠의 공간은 넓다.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오래 걸리고 분간하기 쉽지 않아서 멀다. 밝은 공간은 눈으로 확인함으로써 분간할 수 있고 환한 시간은 몸으로 체험함으로써 가늠할 수 있으나, 어둠의 시공간은 헤아리고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아늑하고 멀게 느껴진다. 뭐든지 가늠하는 순간 알 것 같으면 그건 너무 단순한 것일 테고, 모른다고 여긴다면 뭔가 궁리를 하게 될 터이다. 인생을 ‘무엇’이라고 확정한다면 뻔한 삶이 될 수 있으나 오리무중의 미래를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진지하게 궁리하다 보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을 엮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인생에서 확연한 밝음이 얼마나 지속될까? 어둠 속에서 지형지물을 가늠하면서 발걸음을 내딛는 행위를 삶에 대비시켜 본다. 저 멀리 헤드랜턴의 불빛이 점점이 이어져 등로가 낮보다 더 분명하게 가늠된다.
바람이 조금씩 더 차가워진다. 천천히 걸어도 오를수록 힘들고 땀은 무지하게 흐른다. 목을 풀고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훔쳐낸다. 오르막에선 어쩔 수 없다. 차츰 여명이 밝아온다. 아이젠을 착용했다. 길은 눈으로 덮였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분다. 옷을 덧입느라 잠시 쉬었다. 천왕봉이 얼마 멀지 않다. 마지막 계단이 가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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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일출은 3대가 공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단다. 정상에 서니 잔뜩 흐린 하늘에 해는커녕 안개가 잔뜩 서려 조망도 안 된다. 위협적인 칼바람이 코를 찌른다. 볼이 따갑다. 대충 사진만 찍고 발길을 재촉했다.
아스라한 공간에 새하얀 설화를 피운 침엽수 교목들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잔가지가 복잡하게 얽힌 관목들이 조화를 이룬다. 가파른 바윗길에 철제 계단, 음산한 무채색의 풍경에 원색의 점들이 움직인다. 고개를 드니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덮고 있다.
북쪽 사면의 휘몰아치는 바람이 지리산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지리산의 찬 기운이 오히려 상쾌하다.
통째로 넘어진 나무가 비스듬히 길을 막고 있다. 무리하지 않으려고 페이스를 유지하며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면서 계속 걷는다. 주위 풍경을 보니 고도가 점점 낮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름이 걷히고 밝은 태양이 눈부시게 비춘다. 시야를 넓히면 지리산 특유의 산그리메가 아득히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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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산智異山으로 쓰고 지리산으로 읽는다.(이병주 소설 <지리산>) 각종 문헌의 표기는 智異, 地理, 地利, 地而, 智利, 知異 등 다양하다. 智異가 처음 등장한 것은 신라 887년 쌍계사에 세운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다. 국토지리원은 ‘지리학설에 지식인이 배출된다’거나, ‘지혜스럽고 이상한 산이란 뜻으로 지이산이라고 한다’고 했고, 인터넷 정보의 대부분은 ‘어리석은 사람愚者이 머물러도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고 했는데, 다 ‘異’의 해석이 애매하다. 문헌에서 ‘異’를 ‘리’로 발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진응震應(1873~1941) 스님은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舍利菩薩이 이 산에 상주하면서 설법했다는 전설에 따라 두 글자를 추출해 智利라고 명명하며, 智異와 地利는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이정희李政喜(경상대 한적실장)님은 지리산의 명칭을 굳이 한자로 풀이하려는 것은 오류라고 주장했다. 지리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지루한 산’으로 생각했고, ‘지루하다’의 사투리 ‘지리하다’의 ‘지리’를 음차音借해 여러 가지 한자표기를 한 것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의 여러 산수유기山水遊記에는 거의 두류산頭流山으로 표기했다. 두류산은 백두산[頭]의 맥이 흘러내려[流] 이루어진 산, 혹은 백두산[頭]의 맥이 내려와 머문[留] 산이라는 뜻으로 신라 말 도선道詵이 정착시킨 개념이다. 따라서 지리산은 민족의 진원지며 겨레의 영산으로 추앙받는 백두산의 남부를 연장하는 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전설적인 삼신산三神山 : 蓬萊山, 方丈山, 瀛州山의 하나인 방장산에 지리산을 대비시키기도 한다. 또 방호산方壺山, 남악산南岳山, 불복산不伏山, 봉익산鳳翼山, 부산富山, 신산神山, 황우협黃牛脅, 적구산赤狗山 등의 이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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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에 드러난 바위, 오래된 고목古木과 말라죽은 고목枯木이 서로 기대어 삶과 죽음을 대비시킨다. 남쪽 사면으로 들어서니 햇볕이 따스하다. 떨구지 못한 황갈색 잎을 지닌 갈참나무 아래 선명한 초록색 산죽이 봄빛인 양 환하다. 햇살을 받은 나무의 맨살이 근육질의 여체마냥 요염하다. 골마다 안개가 서려 원근이 드러나는데 가파른 능선이 겹겹이 쌓여 산세가 육중하게 보인다.
복잡하게 얽힌 바위 사이로 비집고 넘으며 얼어붙은 북사면과 따뜻한 남사면을 넘나들면서 계속 걸었다. 대간길이라면 능선을 타는 것이 마땅하나 지형상 기존의 등산로를 따라 이리저리 산비탈을 비집고 다니는 셈이다. 완만한 길은 걷기에는 편하나 변화가 없으니 오히려 지루하다. 터덜터덜!
벽소령에서 산허리를 휘휘 감도는 임도를 따라 음정마을로 하산을 서둘렀다. 음정, 양정, 하정을 통칭한 삼정리는 고려시대부터 사찰의 전답을 소작하는 사람들이 이루었다는 촌락이다. 소나무가 울창한 둔덕이 음정과 양정을 가르며 우람하게 서 있고, 지리산 자락이 어미닭마냥 두 마을을 깊숙이 품고 있으며, 좌로 도랑이 흐르고 우로 송림 사이로 계곡이 굽이치는데, 두 마을을 아우르며 크게 휘두른 S자 도로가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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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의 벽소碧霄란 단어가 있긴 하지만 벽소령의 벽소碧宵는 ‘푸른 밤’이란 뜻이다. 밝은 달이 뜬 어스름한 하늘이 곧 푸른 밤이겠지만, 어쨌든 벽소령의 밝은 달[碧宵明月]은 지리산 10경의 하나다. 육중한 산이 나지막이 앉아 시야가 훤히 트였고 대기는 이내[嵐]로 푸르스름한 기운을 머금고 있으며, 밝은 달이 사방을 비추어 산의 요철과 굴곡이 보일 듯 말 듯 겹겹의 원근이 어슴푸레한 분위기는 사람의 감성을 일깨우기에 충분할 것이다.
다시 오른 대간길에는 어둠이 깔려 오르내리는 길이 생각보다 험하다. 하늘도 어둡고 별마저 보이지 않는다. 벽소명월의 운치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헤드랜턴이 있어도 지형을 넓게 가늠할 수 없어 답답하고 풍경을 볼 수 없어 아쉽다. 굴곡이 심한 오르막을 오르다보니 형제봉의 엄청 높은 바위벽이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여명이 밝아오는데 멀리 산허리에 붉은 띠가 걸려 있다. 구름이 지나가니 남쪽 하늘에 샛별이 밝게 빛난다. 나무엔 상고대가 듬뿍 피었다. 산죽에 쌓인 눈이 앙증맞다. 앞뒤에 사람이 없으니 사위가 조용하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만이다. 싸한 대기가 상쾌하다.
날이 밝으니 산 아래와는 전혀 다른 신천지다. 새하얀 상고대가 환상적으로 펼쳐져 있다. 사방은 눈으로 덮여 있고 나무의 등걸만 어두운 색일 뿐 가지와 침엽들이 온통 흰색이다. 흑백명암의 조화요, 무채색의 극치다. 상고대는 태백산이 더 유명하나 거기는 좀 험악하고 엄청난 데 비해 지리산은 적당히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훨씬 예쁘다. 투명한 흰색이 순백의 드레스를 연상하게 한다. 어찌 이토록 상큼할 수 있을까.
상고대霧凇, hard rime는 ‘나무나 풀에 내린 된서리’다. 서리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액체 상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얼음으로 결정結晶된 것을 말한다. 마치 나무에서 싹이 돋듯 자잘한 가지에 만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눈 덮인 나무를 보고 눈꽃이 피었다고 하는데 상고대를 보면 그 이름이 오히려 어설프다. 상고대는 사실 서리꽃이지만 눈꽃으로 부르고 싶다. 하얀 꽃이 만발한 환상적인 나무, 그야말로 눈꽃 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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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비치니 수증기가 생기고 안개가 서려 다시 해를 가린다. 북쪽 사면은 해가 들지 않아 습기 머금은 대기가 음산하고 어둡다. 매운 칼바람이 얼굴을 찌른다. 모자의 솜털, 눈썹에도 설화가 핀다. 안개가 서려 있다가 바람에 몰려가고 해가 보이다가 또 숨는다. 능선으로 오르니 시야가 트인다. 돌아보니 지나온 주능선이 보이고 그 줄기들이 아스라이 겹쳐 있다. 저 멀리 천왕봉이 구름을 이고 있다.
풍경이 밝아 보이니 기분이 한결 낫다. 하늘은 밝은 코발트블루, 붉은색이 감도는 양지의 나목들, 군데군데 짙은 암녹색의 침엽수들, 그 뒤의 산등성이는 상고대로 온통 하얗고, 그 너머 산줄기의 암녹색이 멀수록 남색을 띠고 옅어지면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넓은 구름이 산마루에 앉을 듯 말 듯 산 위에 수평으로 죽 깔려 있다.
반야봉은 천왕봉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다. 오르니 정상에 걸려 있던 구름이 싹 물러갔다. 가끔 바람이 불고 눈을 뿌리기도 한다. 햇볕을 받은 반야봉의 설화는 더욱 눈부셨다. 몽글몽글한 것이 마치 솜뭉치를 잔뜩 뭉쳐놓은 것 같다. 멀리까지 조망되는 산줄기들이 즐비하다. 저 멀리 바람이 이니 구름이 산마루를 휘감으며 시시각각 기막힌 풍경을 연출한다. 동서남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도시나 인간의 흔적은 볼 수 없고 온통 산뿐이다. 지리산이 넓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내리막길은 타박타박 걷지 않고 물 흐르듯이 갈 수 있어 힘들지 않고 부담이 적다. 중력과 관성에 따라 다리를 유동적으로 움직여 지형지물에 착지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면 사뿐사뿐 뛰듯이 내려갈 수 있다.
노고단老姑壇(1,507m)은 ‘할미를 모시는 제단’이다. 할미는 도교의 국모신인 서술성모西述聖母 또는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말한다. 산 아래에 4,000여 평에 이르는 구릉이 있고 구례와 남원을 잇는 도로가 나 있어 접근이 쉽다. 노고단이 바로 저긴데, 많이 지쳐서 바로 성삼재로 향했다.
성삼姓三재는 2,000여 년 전 삼한시대부터 유래한다. 마한의 효왕이 진한과 변한의 군사에 쫓겨 남원시 산내면의 깊은 계곡으로 숨어들어 도성을 쌓았는데, 높고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인 달궁을 지킬 수 있도록 남쪽으로 20리 밖 고갯마루에 성씨가 다른 세 사람의 장군을 주둔케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왕봉에서 계속 서쪽으로 오던 대간길은 성삼재에서 방향을 북쪽으로 튼다.
두 다리를 피스톤처럼 상하로 움직이며 제 몸을 수평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걸음이다.
걷는다는 것은 걸음을 지속하는 것이다. 시간을 지속하면 공간이 이동된다. 근육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심폐기능이 활발해지며 신진대사가 원활해진다. 제 기능을 다하여 쓸모없게 된 찌꺼기를 배출하고 몸에는 새로운 에너지가 충전된다. 쌓인 스트레스와 잡된 생각들을 쓸어버리고 대자연의 기운을 얻는다. 후생厚生, 삶을 넉넉하고 윤택하게 하는 일이다. 제 스스로 건강을 증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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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영 교수(용인대 회화과)
홍익대 및 대학원에서 동양화 전공.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 박사과정 수료.
개인전 10회, 단체전 170여 회. 국내도보여행 4차례에 1,600km를 걸었고, 백두대간을 두 번째 종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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