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09.03 10:00
제주어민 "태풍이 한두 번씩 와서 바닷속을 좀 뒤집어줘야 하는데…"
한바탕 난리를 치른 땅에선 새로운 일이 벌어진다
색달의 멀구슬나무 열매와 태풍이 몰고 온 조개껍데기
한바탕 난리를 치른 땅에선 새로운 일이 벌어진다
색달의 멀구슬나무 열매와 태풍이 몰고 온 조개껍데기
솔릭이 국토를 지나기 불과 얼마 전 나는 제주시청 앞 한 식당 주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태풍이 한두 번씩 와서 바닷속을 좀 뒤집어줘야 하는데, 작년도 올해도 태풍이 안 오니까 잡히는 어종도 좀 달라져요." 그리고 태풍이 지나갔다. 식당 주인의 말을 떠올리건대 지금 제주 앞바다는 한바탕 난리를 치른 끝에 새로운 일들이 벌어지는 참이겠다. 어디 바다에만 해당할까. 사려니숲에는 부러진 삼나무 잔해들이 즐비했다. 뜻밖의 것들을 뒤집어쓴 땅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놀라 나자빠진 개미의 사정은 또한 어떨까.
◇ 설익은 열매와 조기껍데기....태풍이 남긴 짧은 멜로디
색달에서 무늬를 그린듯한 화산암 위로 멀구슬나무 열매가 떨어진 것을 보았다. 멀구슬나무는 제주의 겨울이면 길가로 쉽게 눈에 띄는데, 단출한 가지와 샹들리에처럼 매달린 열매가 그리는 선이 거의 독창적일 만큼이라 ‘저 나무의 이름은 뭘까’ 누구든 한 번쯤 궁금해하는 나무다. 겨울엔 노랗게 마른 열매인데, 팔월 태풍에 떨어진 그것은 미끄러질 듯한 연둣빛이었다. 익은 열매의 씨앗은 염주를 만드는 데 쓴다지만, 지금 이것의 효용이 있다면 글쎄, 이렇게 지나는 이의 시선을 잠시 붙드는 것뿐일까. 주위 풀숲으로 떨어진 열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찾아보니 멀구슬나무의 꽃말은 ‘경계’라고 한다. 슬쩍 미소가 생기는 대목이다.
◇ 설익은 열매와 조기껍데기....태풍이 남긴 짧은 멜로디
색달에서 무늬를 그린듯한 화산암 위로 멀구슬나무 열매가 떨어진 것을 보았다. 멀구슬나무는 제주의 겨울이면 길가로 쉽게 눈에 띄는데, 단출한 가지와 샹들리에처럼 매달린 열매가 그리는 선이 거의 독창적일 만큼이라 ‘저 나무의 이름은 뭘까’ 누구든 한 번쯤 궁금해하는 나무다. 겨울엔 노랗게 마른 열매인데, 팔월 태풍에 떨어진 그것은 미끄러질 듯한 연둣빛이었다. 익은 열매의 씨앗은 염주를 만드는 데 쓴다지만, 지금 이것의 효용이 있다면 글쎄, 이렇게 지나는 이의 시선을 잠시 붙드는 것뿐일까. 주위 풀숲으로 떨어진 열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찾아보니 멀구슬나무의 꽃말은 ‘경계’라고 한다. 슬쩍 미소가 생기는 대목이다.
곽지에서는 손톱보다 작은 조가비들을 보았다. 그 해변으로 조가비가 부서져 밀려오는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태풍이 한꺼번에 가져온 것들은 얼마나 멀리서 얼마나 엉겁결에 왔을까, 그런 걸 생각하게 한다. 어떤 것은 색이며 형태며 선명도 한데, 어떤 것은 닳고 연해져서는 거의 무의미한 것들도 있다. 해변에서 마음에 드는 조가비를 골라 손바닥에 하나하나 올려놓는 일은 인간이 그것을 화폐 용도로 사용하던 때부터였을 테니 얼마나 오래된 낭만일 텐가. 태풍이 남긴 아주 짧은 멜로디, ‘태풍의 소곡(小曲)’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다.
차귀도 인근 동뱅리에서는 길가로 솔방울이 데굴데굴 떼를 이루고 있었다. 여물지 않은 잣송이도 지천. 그것을 주우며 마침 노래 하나가 떠올랐는데 가사가 이렇다. "그리웠던 친구는 넬리에게 달려가 / 손에 손을 맞잡고 기뻐 눈물 흘려 / 노래해 노래해 이 즐거운 오늘 / 개암나무 골짜기 어여쁜 벗이여." ‘빨강머리 앤’에서 다이애나가 앤에게 가르쳐주는 노래 ‘개암나무 골짜기의 넬리’다. 원작에도 나오고 국내에 방영된 만화에서는 성우들이 직접 노래했다. 심상을 자극하는 풍경 앞에서 기억처럼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만큼 인생을 풍요롭게 가꿔왔다는 소박한 증거쯤 되지 않을까.
차귀도 인근 동뱅리에서는 길가로 솔방울이 데굴데굴 떼를 이루고 있었다. 여물지 않은 잣송이도 지천. 그것을 주우며 마침 노래 하나가 떠올랐는데 가사가 이렇다. "그리웠던 친구는 넬리에게 달려가 / 손에 손을 맞잡고 기뻐 눈물 흘려 / 노래해 노래해 이 즐거운 오늘 / 개암나무 골짜기 어여쁜 벗이여." ‘빨강머리 앤’에서 다이애나가 앤에게 가르쳐주는 노래 ‘개암나무 골짜기의 넬리’다. 원작에도 나오고 국내에 방영된 만화에서는 성우들이 직접 노래했다. 심상을 자극하는 풍경 앞에서 기억처럼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만큼 인생을 풍요롭게 가꿔왔다는 소박한 증거쯤 되지 않을까.
동뱅리에서 석양을 등지고 모종을 하는 농부를 만났다. 모종의 모양이 생전 처음 보는 것이라, 저만치 있는 농부에게 소리쳐 물었다. 그이의 대답은 이러했다. "칼리요, 칼리." 나는 1.5초 후 알아챘다. "아아, 컬리플라워군요!" 농부가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태풍이 지난 늦여름, 제주의 남쪽에서는 컬리플라워를 모종한다. 그것은 언제쯤 식탁에서 설컹 씹히며 ‘이것 참 맛있지’ 소리를 듣게 될까.
◇ 태풍이 지난 늦여름 시작되는 컬리플라워 농사
한림은 온화하다. 한림항 주변은 온통 온화한 공기에 속해있다. 선구를 파는 가게, 여관들, 식당과 술집들, 잘 마른 그물망들,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한림매일시장, 군데군데 솟은 종려나무… 거기서 감자를 샀다. 검은 흙이 묻어있는 제주감자. "이게 제주감자 맞지요?" 철없는 육지 것의 쓸데없는 질문에 주인 여자는 슬쩍 쳐다볼 뿐 별반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 불친절이 새삼 미소를 만든다. 감자 하나를 뭣에 쓸꼬 하니 채썰어 볶는 것, 갈아서 부치는 것, 뚬벙뚬벙 생선조림 밑에 까는 것, 가지가지 생각난다.
◇ 태풍이 지난 늦여름 시작되는 컬리플라워 농사
한림은 온화하다. 한림항 주변은 온통 온화한 공기에 속해있다. 선구를 파는 가게, 여관들, 식당과 술집들, 잘 마른 그물망들,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한림매일시장, 군데군데 솟은 종려나무… 거기서 감자를 샀다. 검은 흙이 묻어있는 제주감자. "이게 제주감자 맞지요?" 철없는 육지 것의 쓸데없는 질문에 주인 여자는 슬쩍 쳐다볼 뿐 별반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 불친절이 새삼 미소를 만든다. 감자 하나를 뭣에 쓸꼬 하니 채썰어 볶는 것, 갈아서 부치는 것, 뚬벙뚬벙 생선조림 밑에 까는 것, 가지가지 생각난다.
어쨌거나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지금의 허기를 달래고자 이익새 양과자 점에 가서 파운드 케이크를 골랐다. 이집 예쁘고 맛있는 건 아는 이는 알고 모르는 이는 모르는 일쯤 될까. 나란히 어여쁜 대여섯 종류 중에 레몬과 말차를 골랐다. 레몬은 바로 먹고, 말차는 하루 지나 호텔에서 차를 끓여 함께 오늘 아침으로 먹었다. 그리고 태풍이 지나간 제주를 하루 더 보러 다닐 예정이다. 올해는 그렇게 9월을 맞는다.
◆장우철은 한 잡지의 에디터로 15년을 보내다 한여름에 그만두고는 이런저런 일을 한다. 요새는 ‘DAZED KORE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HOUSE V ISION SEOUL’의 에디터, ‘샌프란시스코마켓’의 라이터(이상 수입 순), 사진가 등으로 불리며 글쓰고, 사진 찍고, 인터뷰하고, 기획하고, 진행하고 그런다. 또한 해마다 초겨울이면 엄마가 짠 참기름과 들기름을 파는 기름장수가 되기도 한다. ‘여기와 거기’, ‘좋아서 웃었다’ 두 권의 책을 냈다. 몇 번인가 전시를 열었고, 서울과 논산을 오가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