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 큰 폭발력에
역대 정부 유혹 못 벗어나
방북한 문 대통령과 참모들
북 현실 외면한 발언 유감
인권 중시하는 문재인 정부
대북 저자세에서 벗어나야
지난달 정상회담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본(本) 게임이었다. 앞서 4월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5월엔 북측 통일각에서 만났지만 삼세번 만에 제대로 된 회담 테이블이 마련된 셈이다. 김 위원장은 5월 북측 지역 회담 때 식사 한끼 문 대통령에게 대접하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평양에서 만난 문 대통령에게 자세를 한껏 낮추며 2박 3일간 융숭한 접대를 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천연 세트장도 십분 활용했다. 북한 정권이 정통성을 주장하려 차용해온 백두산 정상에 문재인 대통령을 초대한 것이다. 두 정상이 해발 2750m 높이 장군봉에서 손을 맞잡은 장면은 공동선언 서명에 맞먹는 강렬한 이미지다. 평양에서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판문점 정상회담의 공간적 확장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했다. 총감독은 자신이 맡은 듯했고, 세심한 연출은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동분서주했다.
북한이 치밀하게 설정해 놓은 공간과 시간표 속에 들어가 회담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돌발 상황에다 일방적인 장소·시간 변경이 수시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전면에 등장해야 하는 정상회담의 경우는 더욱 조심스럽다. 무엇보다 경호와 의전이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북측 최고 지도자나 고위 인사가 던지는 말에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원정 경기를 치러야 하는 이런 어려움을 감안한다 해도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적지 않다. 정상회담 합의의 감흥과 화려한 카퍼레이드 행렬 등에 묻혀버린 ‘지켜야 할 가치’와 관련한 문제다. 평양 정상회담 첫 회의 테이블에 앉자마자 나온 문 대통령의 모두 발언은 귀를 의심케 했다. “어려운 조건에서 인민의 삶을 향상시킨 김정은 위원장의 리더십에 경의를 표하며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언급에선 상대방에 대한 인사치레를 넘어선 과잉이 감지된다. 회담 이틀째 저녁 평양 5.1경기장에서 펼쳐진 매스게임 ‘빛나는 조국’ 관람석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은 “말로 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다”는 소회와 함께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다”고 밝혔다.
정상회담에서 무작정 얼굴 붉히라는 말이 아니다. 폭압적인 70년 노동당 통치와 3대세습의 폐해로 초래된 현실에 눈감지 말라는 주문이다. 정치범 수용소와 대량 아사, 수십만 탈북행렬의 원인 제공자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는 요구다. 유엔이 ‘아동 노동’으로 금지한 집단체조에 강제동원된 어린아이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헤아렸다면 ‘경의’나 ‘감격’ 같은 단어는 소거됐어야 한다. 공동선언 서명 직후 문 대통령이 “그동안 전쟁의 위협과 이념의 대결이 만들어온 특권과 부패, 반인권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사회를 온전히 국민의 나라로 복원할 수 있게 됐다”고 언급한 대목도 적절해 보이진 않는다. 굳이 김정은과 그의 참모들 앞에서 우리 체제 내부의 논쟁적 이슈를 거론할 필요는 없었다는 얘기다.
대통령의 말과 표현을 정제하고 다듬는 보좌역할을 했어야 할 참모진은 한술 더 떴다. 문 대통령과 김정은의 백두산행에 동행한 국방 장관은 김 위원장의 한라산 답방이 화제에 오르자 “우리 해병대 1개 연대를 동원해 헬기 패드(착륙장)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후임 장관이 내정돼 임기를 며칠 남겨두지 않은 국방장관은 요즘 유행하는 ‘아무 말하기 대잔치’에 나선 듯했다. “백두산이 화창한 건 김정은 위원장 동지가 오셨기 때문”이라고 면전에서 아부성 발언을 한 김영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견줄 만 하다.
안타까운 건 북한 체제의 현실과 동떨어진 부적절한 발언이나 대북 저자세가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문재인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권 변호사로서의 경륜과 민주화 운동의 열정 등이 융합된 권력이란 자부심이 무색해진다. 2013년 말 방북한 알벡도르지 몽골 대통령은 김일성대 강연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은 영원할 수 없다”고 갈파했다. 그 발언으로 북한과 몽골 관계가 파국을 맞았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뒷맛이 개운치 않은 평양 정상회담 기간 중의 말과 화법이 남북관계와 비핵화를 위해 불가피했다는 식의 변명은 꿈도 꾸지 말란 얘기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