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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5.04 09:36 | 수정 : 2010.05.04 09:36
‘시속 6킬로미터로 걸어가며 바라본 세상은 그야말로 신선했다. 날마다 지나쳤던 길이 새롭게 느껴졌고, 우연히 잘못 접어든 길에서 만난 뜻밖의 풍경이 미소 짓게 할 만큼 정겨웠다. 세상을 사는 속도를 달리하자 전혀 다른 세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2007년 출간된 <거침없이 걸어라>라는 책의 일부다. 저자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다. 그는 자타공인 ‘걷기 예찬론자’다. 걷기에 대한 그의 성찰은 문화부의 녹색관광 정책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길과 문화, 생태 그리고 관광 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 그는 그야말로 ‘거침없이’ 쏟아냈다.
프로필
1951년생.
1980년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졸업.
1986년 동대학원 연극학 석사.
1999년 유시어터 대표(현).
2000년 중앙대 예술대 교수.
2002년 (재)환경재단 이사(현).
2004년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강은 흘러오고 흘러 내려갑니다. 이 지역 저 지역을 거치며 세월을 안고 흐릅니다. 강이 흐르는 곳곳엔 수많은 이야기와 문화가 숨어 있습니다. 강은 이 이야기와 문화를 안고 또 흐릅니다. 강과 함께 문화가 흐르는 것입니다. 문화가 흐르면 지역과 지역에 소통의 문도 열릴 것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문화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문화가 흐르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의미를 묻자 유인촌 장관은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관광 산업 육성을 통한 경제적 가치에 대한 정책적 비전을 제시할 것이라는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유 장관은 경제적 가치 이전의 의미, 다시 말해 수많은 세월 동안 품고 있는 강의 문화적 의미를 강조했다. 특히 숨은 이야기의 복원에 방점을 찍었다.
“공주에 가면 고마나루라는 곳이 있습니다. 곰에 대한 설화가 있는 곳인데 지금 가보면 조그만 비석 하나만 있습니다. 저는 이런 숨어 있는 이야기를 다 살려내고 싶습니다. 그러면 지역의 전통도 새롭게 살아나고 이를 통해 관광 산업도 일어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옛 것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탄생시킬 의무도 있다고 봅니다.”
얼핏 ‘현대적으로 재탄생시킨다’는 것은 휘황찬란한 인공의 구조물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유 장관의 구상은 이와 반대편에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러움’과 ‘옛 것’의 복원을 강조한다. 이는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 세계적인 관광 산업의 트렌드라고 유 장관은 설명한다. 걷기 열풍을 일으킨 ‘올레길’이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유 장관은 관광 산업의 이해 관계자들이 이 현상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비밀이 있다는 얘기다.
녹색관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핵심방침은 무엇입니까.
관광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하지만 자연을 즐기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있는 그대로 둬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올레길도 그렇지 않습니까. 끊어진 길을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을 복원하는 과정에 있지 않습니까. 관광 산업 육성이라고 해서 큰 길을 내고 다리를 놓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적은 비용으로도 얼마든지 많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녹색관광이 성공할 수 있는 원동력은 돈이 아니라 아이디어입니다.
옛 것을 되찾아주는 방법에 대해 유 장관은 스스로 ‘전 좀 과격한 편’이라며 오대산 월정사에 들렀을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가는 9㎞의 길을 걷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도저히 걸을 수 없었다. 워낙 많은 차들이 왕복하다보니 먼지가 앞을 가릴 정도로 날렸다. 사정이 이러자 군에서는 살수차를 동원해 먼지를 가라 앉혔다. 돈은 돈대로 쓰고 걷기 좋은 오대산의 산길은 관광자원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유 장관의 해법은 ‘자동차를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동차 통행을 막지 않고서는 녹색관광이 되겠습니까. 대신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나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코끼리차나 마차 등 별도의 교통수단을 마련해줘야 할 것입니다. 이건 이것대로 관광자원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디 가면 저는 ‘차를 끊으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이렇게 해야 할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개발을 통해 발전해야 할 곳이 있고 그러지 말아야 할 곳이 있는 것 아닙니까.”
자동차 통행을 줄여야 한다는 소신은 현재 추진되고 있는 태안레저도시에도 관철되고 있었다. 문화부는 태안레저도시에 이르는 4곳의 진입로 공사를 맡고 있다. 지금까지 정부의 관행대로라면 당연히 넓고 곧은길을 놓을 테지만 유 장관의 생각은 다르다. 넓지 않게, 구불구불, 대신 재미있는 길을 만들라는 게 유 장관의 주문이다. 현실적으로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해놓기만 하면 명물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명물이 된다는 것은 곧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것, 경제적인 가치가 풍부한 관광자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편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릴 것이라는 이 역설은 과연 얼마나 많은 경제적 효과를 일으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