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은 한반도 진산, 한라산은 앞산, 지리산은 민족 애환 담긴 주산으로 불려
백두산이 한반도의 진산이고, 한라산은 앞산, 지리산은 주산이라고 풍수지리학자들은 말한다. 히말라야에서 뻗은 맥은 백두산에서 큰 용틀임으로 방향을 틀어 한반도로 향하게 하고, 그 맥은 다시 백두대간으로 용의 기운을 이어 한라산까지 전한다. 따라서 백두산은 히말라야의 앞산이자 동시에 한민족의 종산이면서 진산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백두산은 한민족에게 의미가 크고, 한반도의 상징성을 나타낸다. 다르게 표현하면 백두산은 세계의 출발점이자 종착지로 통한다는 점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한반도의 정기는 백두대간을 거쳐 내려오다 지리산에서 일단 호흡을 가다듬는다. 한라산까지는 바다를 건너야 하지만 그 맥은 그대로 이어진다고 한다. 조선 중기 풍류시인 임제는 <유한라산기>에서 ‘한라산과 무등산은 형제’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한반도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일찌감치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두대간이 바다를 건너기 전 호흡을 가다듬은 산이 바로 한반도의 주산, 지리산인 것이다. 지리산은 실질적으로 한민족의 삶과 애환을 같이 해왔다. 한때는 유불선儒佛仙 3교의 진원지였고, 신선이 산다는 청학동이기도 했고, 조선 선비의 유람 대상지이기도 했다. 그 흔적은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통해 남아 있다.
천왕일출은 지리산 10경 중의 제 1경이다. 가장 의미가 있는 승경이기에 1경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지리 2경 직전단풍, 즉 피아골 단풍, 3경 노고운해, 4경 반야낙조, 5경 벽소명월, 6경 불일폭포, 7경 새석철쭉, 8경 연하선경, 9경 칠선계곡, 10경 섬진청류이다. 일출은 신년호에 하기로 하고, 피아골 단풍은 이미 10월호에 다뤘다. 연말이면 떠오르는 낙조, 즉 4경 반야낙조를 한 번 살펴보자.
반야낙조般若落照는 반야봉에서 바라본 일몰을 말한다. 사실상 정상적으로는 볼 수 없다. 국립공원사무소에서 출입과 하산시간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공단에 협조를 구하고 갈 수밖에 없다.
노을은 해도 달도 아닌 그 중간 시간
반야봉은 지리산의 서쪽에 있다. 노고단과 마주하고 있다. 봉우리가 영락없이 엉덩이같이 완만한 곡선이다. 가까이 가서 한 번 만져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한다. 서쪽은 동쪽과는 반대다. 한자로 ‘동東’을 파자하면 날 日과 나무 木의 합성어다. 나무에 태양이 걸려 있는 모습이라고도 하고, 나무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라고도 묘사한다. 어쨌든 해가 뜨는 모습을 형상화한 게 동녘이다. 그래서 동악은 만물이 생성되는 산을 말하고, 주산이고, 종산이 된다. 중국 태산에 가면 태산 대신 ‘岱山’이란 글자를 자주 볼 수 있는 이유다. 동쪽은 하루 중 아침을 가리키고, 계절로는 봄, 일생에서는 성장기를 나타낸다. 주역과 음양오행에서도 ‘東’은 만물의 시초이며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노을을 뜻하는 ‘夕’은 해日가 뜬 낮도 아니고 달月이 뜬 밤도 아니다. 글자 모양을 봐도 그렇다. 그냥 해질 무렵이다. 해질 무렵은 유酉시에 해당한다. 닭을 가리키지만 술 마실 시간이라는 의미다. 속된 표현으로 술시다. 동시에 닭이, 나아가 새가 둥지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다시 말해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은 새가 둥지로 돌아가는 모습이라고 말한다.
지리산에서는 동쪽 천왕봉에서 해가 떠서 서쪽 반야봉으로 진다. 동서 양쪽 가장 높은 봉우리들이다. 반야봉은 전형적인 불교용어다. 사실 지리산은 유불선 3교가 그대로 녹아 있다. 명산을 유교에서는 성산聖山, 도교에서는 선산仙山, 불교에서는 영산靈山이라 부른다. 지리산은 성산이자 선산이고, 영산이라고 한다. 불교가 1,000여 년 이상 지배했기 때문에 영산 지리산이 가장 귀에 익다.
출발보다 마무리가 때로는 더 중요
영산 지리산의 반야낙조. 그리고 지리 4경. 연말이 가기 전에 반야낙조를 한 번 즐겨보자. 물론 공단의 허가를 받고서. 아마 한 해 동안의 모든 속세의 티끌이 정리되지 않을까 싶다. 온 산을 아니, 온 세상을 황혼 빛으로 물들이며 넘어가는 태양을 보고 기도해 보자. 올해의 나쁜 기억은 모두 잊게 해주고, 악연을 선연으로 바꾸고, 악행을 저지른 인간들을 용서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3대가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일출을 보기 위해 매년 연말이면 수천 명의 인파가 지리산 정상 천왕봉 주변을 가득 메운다. 인파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공단은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근무한다. 기복祈福을 바라는 자와 그 기복을 돕는 자라고 해야 하나. 반면 뱐야낙조는 그만큼 안 되지만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는 그에 못지않을 것 같다.
올해 황혼 빛 노을을 보며 어떤 용서를 할까, 어떤 정리를 할까, 어떤 마무리를 해야 할까. 다들 영산 지리산 반야낙조를 보면서 사색의 시간을 한 번 가져보자. 그것만으로도 천왕일출을 보는 감격 못지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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