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2.23 03:00
[김두규의 國運風水]
![[김두규의 國運風水]](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2/22/2019022201653_0.jpg)
신격호 롯데 회장은 5대 재벌 창업자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 있는 전설이다. 공식적으로 1922년생이라는데, 일설에는 1921년생이라고 한다.
5대 재벌 창업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출발이 다르다. 삼성 이병철 회장과 LG 구인회 회장은 자수성가라기보다는 윗대 조상이 가졌던 농업자본을 상업자본으로 그리고 산업자본으로 탈바꿈시키면서 규모를 극대화한 경우이다. 자수성가한 이는 현대 정주영 회장과 롯데 신격호 회장이다. 같은 자수성가라도 정 회장과 신 회장의 성공 과정은 다르다. 전자는 국내시장을 바탕으로 성공하였다. 반면, 후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성공하여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으로 국내에 자본을 들여왔다.
5대 재벌 창업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출발이 다르다. 삼성 이병철 회장과 LG 구인회 회장은 자수성가라기보다는 윗대 조상이 가졌던 농업자본을 상업자본으로 그리고 산업자본으로 탈바꿈시키면서 규모를 극대화한 경우이다. 자수성가한 이는 현대 정주영 회장과 롯데 신격호 회장이다. 같은 자수성가라도 정 회장과 신 회장의 성공 과정은 다르다. 전자는 국내시장을 바탕으로 성공하였다. 반면, 후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성공하여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으로 국내에 자본을 들여왔다.
![[김두규의 國運風水]](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902/22/2019022201653_1.jpg)
오랫동안 그를 보좌하였던 어느 퇴직 임원의 설명이다. "일본에서 신 회장이 이룬 부는 정말 대단하였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1988년 신 회장을 세계 4대 부동산 재벌로 선정할 정도였다. 그가 짧은 기간에 세계적인 부를 이룬 배경은 품질 제일주의, 현장 경영, 서비스 정신, '장사꾼은 장사만 해야 한다'는 프로 의식 덕분이었다. 요즈음 흔히 볼 수 있는 '배꼽인사'도 바로 신 회장이 들여온 것이다. 신 회장은 늘 겸손하고 부드러웠다."
'인걸은 지령'이라고 하였다. 이런 인물을 배출한 고향은 어떤 곳일까? 그의 고향은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이다. '둔기마을회관' 근처에 생가 옛 모습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1969년 대암호 건설로 생가가 수몰되어 그 바로 뒤쪽 언덕에 생가를 복원하였다. 신 회장은 1971년부터 매년 5월 고향마을에서 잔치를 열어 수몰로 뿔뿔이 흩어진 출향인들을 불러 고향의 정을 나눈다고 한다.
풍수 해설에는 한 장의 지도가 장광설보다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지도 참고〉. 울산의 명산 문수산 지맥이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한 마리 거북으로 그 모습을 변화시킨 뒤 마을 앞 냇물을 향해 머리를 내밀었다. 이른바 신령스러운 거북이 물을 마시는 형국[靈龜飮水形]이다. 본래의 생가터와 복원된 생가는 거북의 머리 부분에 자리한다. 1969년 대암호가 생기기 전까지 마을 앞 둔기천은 작은 냇물에 지나지 않았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을 주관한다[水主財]고 해석한다. 댐이 생기면서 마을 앞은 거대한 호수로 바뀌었다. 불어난 물로 더 큰 재물이 모이는 고향 땅이 되었다. 평소 신 회장의 고향 사랑은 각별하였다. 해마다 출향인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연 것도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고향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산촌에서 태어난 필자에게 고향 하면 늘 꽉 막힌 산들과 비탈진 논밭들이 떠오른다. 아직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동네 동갑내기는 생각이 다르다. "그런 구질구질한 깡촌이 뭐가 좋다고! 돈을 주어도 다시는 안 돌아가…." 사람마다 다름을 알 수 있겠다.
신 회장의 고향 사랑은 산하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국 땅에서 한때 문학을 꿈꾸던 고학생 신격호의 향수 때문이었을까?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산하 때문에 고향을 잊지 못한다. 아니면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수도 있다. 아마도 그때 그는 천재 요절 시인 야기쥬키치(八木重吉·1898~1927)가 지은 이런 시를 읊으며 고향의 심상(心象)을 각인시켰는지도 모른다.
'고향의 산(ふるさとの山)'이라는 시는 "고향의 산을 마음에 그리면서/ 해질녘 향수를 달랜다"고 노래했다. 또 '고향의 냇물(ふるさとの川)'이라는 시는 "고향의 냇물이여/ 고향의 냇물이여/ 졸졸 흐르면서 지금도 잘 있겠지"로 흘러간다.
'인걸은 지령'이라고 하였다. 이런 인물을 배출한 고향은 어떤 곳일까? 그의 고향은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이다. '둔기마을회관' 근처에 생가 옛 모습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1969년 대암호 건설로 생가가 수몰되어 그 바로 뒤쪽 언덕에 생가를 복원하였다. 신 회장은 1971년부터 매년 5월 고향마을에서 잔치를 열어 수몰로 뿔뿔이 흩어진 출향인들을 불러 고향의 정을 나눈다고 한다.
풍수 해설에는 한 장의 지도가 장광설보다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지도 참고〉. 울산의 명산 문수산 지맥이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한 마리 거북으로 그 모습을 변화시킨 뒤 마을 앞 냇물을 향해 머리를 내밀었다. 이른바 신령스러운 거북이 물을 마시는 형국[靈龜飮水形]이다. 본래의 생가터와 복원된 생가는 거북의 머리 부분에 자리한다. 1969년 대암호가 생기기 전까지 마을 앞 둔기천은 작은 냇물에 지나지 않았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을 주관한다[水主財]고 해석한다. 댐이 생기면서 마을 앞은 거대한 호수로 바뀌었다. 불어난 물로 더 큰 재물이 모이는 고향 땅이 되었다. 평소 신 회장의 고향 사랑은 각별하였다. 해마다 출향인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연 것도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고향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산촌에서 태어난 필자에게 고향 하면 늘 꽉 막힌 산들과 비탈진 논밭들이 떠오른다. 아직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동네 동갑내기는 생각이 다르다. "그런 구질구질한 깡촌이 뭐가 좋다고! 돈을 주어도 다시는 안 돌아가…." 사람마다 다름을 알 수 있겠다.
신 회장의 고향 사랑은 산하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국 땅에서 한때 문학을 꿈꾸던 고학생 신격호의 향수 때문이었을까?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산하 때문에 고향을 잊지 못한다. 아니면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수도 있다. 아마도 그때 그는
'고향의 산(ふるさとの山)'이라는 시는 "고향의 산을 마음에 그리면서/ 해질녘 향수를 달랜다"고 노래했다. 또 '고향의 냇물(ふるさとの川)'이라는 시는 "고향의 냇물이여/ 고향의 냇물이여/ 졸졸 흐르면서 지금도 잘 있겠지"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