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1.19 07:26
[주간조선]
지난 1월 11일 치러진 대만 총통과 입법위원(국회의원) 선거에서 중국국민당이 참패했다. 여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이날 열린 선거에서 817만표(57.13%)를 득표해 552만표(38.61%)에 그친 국민당 한궈위(韓國瑜)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주한(駐韓) 타이베이대표부 측은 “대만 총통 선거 사상 최고의 득표율”이라고 밝혔다. 총통 선거와 같이 치러진 입법위원 선거에서도 민진당은 113석 가운데 61석을 획득해 38석에 그친 국민당을 누르고 제1당 지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선거 패배 직후인 1월 15일 우둔이(吳敦義) 국민당 주석(전 부총통)은 사퇴했고, 재선된 차이잉원 총통은 집권 2기 시작과 함께 민진당 주석으로 재복귀할 예정이다.
대만에서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국민당과 진보세력을 대변하는 민진당 간의 정쟁은 ‘남록(藍綠)대결’이라고 불린다. 국민당의 대표 색상인 남색과 민진당의 대표 색깔인 녹색의 대결을 뜻하는 말이다. 대만의 ‘남록대결’은 한국에서 각각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의 대결 못지않게 치열하다. 남록 진영은 각각 대만 북부와 남부, 국공(國共)내전 전후로 대륙에서 이주해온 외성인(外省人)과 대만 본토 출신인 본성인(本省人·내성인)으로 나뉘는 확고한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출신지 등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이 한국 못지않다. 이에 ‘한국 정치의 판박이’라고도 불린다.
민진당 재집권에 한국당 경고등
자연히 대만에서 민진당의 재집권으로 경고등이 들어온 것은 한국당이다. 1987년, 1996년 각각 대통령, 총통 직선제를 실시한 한국과 대만은 놀랍게도 흡사한 정권교체 주기를 보여왔다. 민진당이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을 앞세워 첫 집권한 2000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은 민주당계(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이어졌다. 국민당이 마잉주(馬英九) 총통을 간판으로 재집권한 2008년부터 2016년까지는 한국당계(한나라당·새누리당)인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이어졌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박근혜), 총통(차이잉원)도 앞뒤로 배출했다. 2016년 민진당이 차이잉원 총통을 앞세워 재집권한 이듬해인 2017년부터 한국에서는 역시 민주당 문재인 정권이 출범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교체주기를 반영하면, 지난 1월 11일 선거에서 민진당이 국민당을 꺾고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한국에서도 오는 4월 총선과 2022년 차기 대선에서 민주당이 재집권하며 여당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커졌다는 분석이 가능해진다.
국민당의 패배로 한국당은 야당 지위를 이어갈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말이 나온다. 양국의 보수정당을 대표하는 국민당과 한국당은 비슷한 궤적을 거치면서 성장해 왔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모두 ‘국부(國父)’로 추앙하는 쑨원(孫文)이 1894년 결성한 비밀결사 ‘흥중회(興中會)’를 모태로 하는 국민당은 올해로 창당 126년 역사를 자랑하는 아시아 최장수 정당이다. 비록 자유주의 정당이지만 조직 원리는 소련공산당을 모델로 했다. 한때는 중국 대륙 전체를 석권한 정당이었지만 1949년 국공내전 패배 직후 대만섬으로 들어와 집권했다.
이후 국민당은 한국과 유사한 개발독재 모델로 공산주의의 세력확장을 막으면서 대만을 한국, 홍콩, 싱가포르 등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龍)’으로 성장시켰다. 1996년 총통 직선제 도입을 통해 대만에서 민주주의를 안착시킨 공도 있다.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에 국민당 당기(黨旗)가 들어갈 정도로 대만과 국민당은 불가분의 관계다. 이승만·박정희·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을 당사에 걸어두었던 한국당과 유사한 성장사다. 다만 국민당의 경우 수시로 당명과 상징색을 바꾼 한국당과 달리 100여년 넘게 같은 당명을 유지하고 있다.
대만에서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국민당과 진보세력을 대변하는 민진당 간의 정쟁은 ‘남록(藍綠)대결’이라고 불린다. 국민당의 대표 색상인 남색과 민진당의 대표 색깔인 녹색의 대결을 뜻하는 말이다. 대만의 ‘남록대결’은 한국에서 각각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의 대결 못지않게 치열하다. 남록 진영은 각각 대만 북부와 남부, 국공(國共)내전 전후로 대륙에서 이주해온 외성인(外省人)과 대만 본토 출신인 본성인(本省人·내성인)으로 나뉘는 확고한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출신지 등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이 한국 못지않다. 이에 ‘한국 정치의 판박이’라고도 불린다.
민진당 재집권에 한국당 경고등
자연히 대만에서 민진당의 재집권으로 경고등이 들어온 것은 한국당이다. 1987년, 1996년 각각 대통령, 총통 직선제를 실시한 한국과 대만은 놀랍게도 흡사한 정권교체 주기를 보여왔다. 민진당이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을 앞세워 첫 집권한 2000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은 민주당계(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이어졌다. 국민당이 마잉주(馬英九) 총통을 간판으로 재집권한 2008년부터 2016년까지는 한국당계(한나라당·새누리당)인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이어졌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박근혜), 총통(차이잉원)도 앞뒤로 배출했다. 2016년 민진당이 차이잉원 총통을 앞세워 재집권한 이듬해인 2017년부터 한국에서는 역시 민주당 문재인 정권이 출범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교체주기를 반영하면, 지난 1월 11일 선거에서 민진당이 국민당을 꺾고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한국에서도 오는 4월 총선과 2022년 차기 대선에서 민주당이 재집권하며 여당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커졌다는 분석이 가능해진다.
국민당의 패배로 한국당은 야당 지위를 이어갈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말이 나온다. 양국의 보수정당을 대표하는 국민당과 한국당은 비슷한 궤적을 거치면서 성장해 왔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모두 ‘국부(國父)’로 추앙하는 쑨원(孫文)이 1894년 결성한 비밀결사 ‘흥중회(興中會)’를 모태로 하는 국민당은 올해로 창당 126년 역사를 자랑하는 아시아 최장수 정당이다. 비록 자유주의 정당이지만 조직 원리는 소련공산당을 모델로 했다. 한때는 중국 대륙 전체를 석권한 정당이었지만 1949년 국공내전 패배 직후 대만섬으로 들어와 집권했다.
이후 국민당은 한국과 유사한 개발독재 모델로 공산주의의 세력확장을 막으면서 대만을 한국, 홍콩, 싱가포르 등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龍)’으로 성장시켰다. 1996년 총통 직선제 도입을 통해 대만에서 민주주의를 안착시킨 공도 있다.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에 국민당 당기(黨旗)가 들어갈 정도로 대만과 국민당은 불가분의 관계다. 이승만·박정희·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을 당사에 걸어두었던 한국당과 유사한 성장사다. 다만 국민당의 경우 수시로 당명과 상징색을 바꾼 한국당과 달리 100여년 넘게 같은 당명을 유지하고 있다.
‘한류 열풍’ 믿고 후보 내세운 국민당
국민당과 한국당은 최근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점 역시 놀랄 정도로 흡사하다. 사실 지난해 홍콩 송환법 시위 사태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만에서 민진당의 재집권은 사실상 물 건너 갔다고 여겨져 왔다. 실제로 2018년 11월 치른 지방선거에서 국민당은 이번 대선에 자당 대선후보로 나선 한궈위를 앞세워 민진당의 ‘아성(牙城)’인 가오슝(高雄)을 탈환하는 데도 성공했다. 한국으로 치면 한국당 후보가 민주당의 핵심 지지기반인 광주광역시장으로 당선된 것과 같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과 총선 같은 큰 판에서 국민당은 압도적인 표차로 민진당에 무릎을 꿇었다. 국민당의 패인은 여러 가지가 꼽힌다. 우선 마잉주 총통 이후 상품성을 갖춘 스타 정치인의 부재다. 4년 전인 2016년 대선 때는 당초 여성 후보인 홍슈주(洪秀柱)를 내세웠다가 인기가 없자 주리룬(朱立倫) 후보로 중도 교체했다가 패배했다. 이번 대선 때는 당내 경선을 거쳐 현직 가오슝시장인 한궈위를 간판으로 내세웠으나 지방선거 때의 소위 ‘한류(韓流) 열풍’을 재현하기에는 내공이 부족했다.
사실 한궈위는 국민당 주류세력과는 거리가 먼 비주류다. 1957년생으로 신베이(新北·옛 타이베이현)에서 3선 입법위원을 지낸 뒤 한동안 정계를 떠나 있었다. 국민당 마잉주 정권 때 공기업 사장(타이베이농산물도매시장 사장)을 역임한 뒤 지방선거에서 가오슝시장으로 복귀한 이력의 소유자다. 2018년 가오슝시장에 당선됐을 때도 대머리란 외모 콤플렉스를 역이용한 철저한 개인플레이로 당선된 괴짜 정치인에 가깝다. 대만 최고 명문대인 대만대 법대 출신의 역대 총통(천수이볜·마잉주·차이잉원)들과 달리 동오(東吳)대 출신이란 학벌도 눈에 띈다.
게다가 한궈위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가오슝시장에 당선될 때 중국으로부터 2000만위안(약 34억원)의 정치자금을 지원받았다”는 보도에 시달렸다. 이 이슈가 대선판을 달구면서 공개적으로 친중(親中) 입장을 표방해온 국민당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가짜 한국 여권으로 대만을 드나들다가 호주에 망명을 신청한 자칭 ‘중국 스파이’ 왕리창(王立强)의 이 같은 폭로는 사실 여부를 떠나 홍콩 송환법 시위와 함께 대만 대선판을 통째로 뒤흔들기에 폭발력이 충분했다.
치열한 당내 경선 따른 후유증
당내 경선에 따른 후유증도 심각했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당 총통 후보 자리를 놓고 한궈위와 당내 경선을 벌인 사람은 궈타이밍(郭台銘) 홍하이(鴻海)정밀 회장이었다. 각종 기행으로 ‘대만의 트럼프’라고 불린 약 8조원 재산의 대만 최고 갑부 궈타이밍 회장은 한궈위 후보와 경선에서 패한 뒤에 국민당에 앙심을 품고 탈당, 친민당 쑹추위(宋楚瑜) 후보 지지를 표명했다.
장기적인 보수진영 분열에 따른 표 분산도 국민당의 고질적인 패인 중 하나다. 이번 총통 선거는 민진당과 국민당, 친민당이라는 사실상 3자 대결 구도로 치러졌다. 국민당 출신으로 민선 대만성 성장(省長)을 지낸 쑹추위 친민당 주석은 이번 선거에서도 친민당 후보로 총통 선거에 입후보해 4.26%의 표를 획득하며 국민당과 표를 나눠 가졌다. 친민당은 국민당에서 분화한 당으로 ‘범람(汎藍)진영(범보수)’으로 꼽히는데, 중국과 더욱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중국 후난성(湖南省)에서 태어난 외성인 출신 쑹추위는 과거 국민당의 촉망받는 차기주자 중 한 명이었다. 장징궈(蔣經國) 전 총통 시절 정부대변인인 신문국장 출신으로, 1994년 민선 지방선거 실시 직후 ‘대만성 성장’으로 선출되며 한때 ‘소(小)총통’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2000년 총통 선거 때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이 롄잔(連戰) 전 부총통을 국민당 후보로 내세우자, 쑹추위는 국민당을 탈당해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 그 결과 당시 선거에서 롄잔을 앞세웠던 국민당은 무소속 쑹추위와 표가 갈리면서 민진당 천수이볜에게 최초로 정권을 내주고야 말았다.
마치 한국의 1997년 15대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과 이인제(국민신당) 후보가 분열되면서 민주당계(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룬 상황과 흡사했다. 2004년 총통 선거에서는 국민당 롄잔과 친민당 쑹추위가 정·부총통 후보로 러닝메이트를 구성해 출전했으나, 천수이볜 ‘암살미수사건’의 여파로 재집권을 막지 못했다. 이후 쑹추위는 정계 은퇴와
국민당과 한국당은 최근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점 역시 놀랄 정도로 흡사하다. 사실 지난해 홍콩 송환법 시위 사태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만에서 민진당의 재집권은 사실상 물 건너 갔다고 여겨져 왔다. 실제로 2018년 11월 치른 지방선거에서 국민당은 이번 대선에 자당 대선후보로 나선 한궈위를 앞세워 민진당의 ‘아성(牙城)’인 가오슝(高雄)을 탈환하는 데도 성공했다. 한국으로 치면 한국당 후보가 민주당의 핵심 지지기반인 광주광역시장으로 당선된 것과 같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과 총선 같은 큰 판에서 국민당은 압도적인 표차로 민진당에 무릎을 꿇었다. 국민당의 패인은 여러 가지가 꼽힌다. 우선 마잉주 총통 이후 상품성을 갖춘 스타 정치인의 부재다. 4년 전인 2016년 대선 때는 당초 여성 후보인 홍슈주(洪秀柱)를 내세웠다가 인기가 없자 주리룬(朱立倫) 후보로 중도 교체했다가 패배했다. 이번 대선 때는 당내 경선을 거쳐 현직 가오슝시장인 한궈위를 간판으로 내세웠으나 지방선거 때의 소위 ‘한류(韓流) 열풍’을 재현하기에는 내공이 부족했다.
사실 한궈위는 국민당 주류세력과는 거리가 먼 비주류다. 1957년생으로 신베이(新北·옛 타이베이현)에서 3선 입법위원을 지낸 뒤 한동안 정계를 떠나 있었다. 국민당 마잉주 정권 때 공기업 사장(타이베이농산물도매시장 사장)을 역임한 뒤 지방선거에서 가오슝시장으로 복귀한 이력의 소유자다. 2018년 가오슝시장에 당선됐을 때도 대머리란 외모 콤플렉스를 역이용한 철저한 개인플레이로 당선된 괴짜 정치인에 가깝다. 대만 최고 명문대인 대만대 법대 출신의 역대 총통(천수이볜·마잉주·차이잉원)들과 달리 동오(東吳)대 출신이란 학벌도 눈에 띈다.
게다가 한궈위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가오슝시장에 당선될 때 중국으로부터 2000만위안(약 34억원)의 정치자금을 지원받았다”는 보도에 시달렸다. 이 이슈가 대선판을 달구면서 공개적으로 친중(親中) 입장을 표방해온 국민당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가짜 한국 여권으로 대만을 드나들다가 호주에 망명을 신청한 자칭 ‘중국 스파이’ 왕리창(王立强)의 이 같은 폭로는 사실 여부를 떠나 홍콩 송환법 시위와 함께 대만 대선판을 통째로 뒤흔들기에 폭발력이 충분했다.
치열한 당내 경선 따른 후유증
당내 경선에 따른 후유증도 심각했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당 총통 후보 자리를 놓고 한궈위와 당내 경선을 벌인 사람은 궈타이밍(郭台銘) 홍하이(鴻海)정밀 회장이었다. 각종 기행으로 ‘대만의 트럼프’라고 불린 약 8조원 재산의 대만 최고 갑부 궈타이밍 회장은 한궈위 후보와 경선에서 패한 뒤에 국민당에 앙심을 품고 탈당, 친민당 쑹추위(宋楚瑜) 후보 지지를 표명했다.
장기적인 보수진영 분열에 따른 표 분산도 국민당의 고질적인 패인 중 하나다. 이번 총통 선거는 민진당과 국민당, 친민당이라는 사실상 3자 대결 구도로 치러졌다. 국민당 출신으로 민선 대만성 성장(省長)을 지낸 쑹추위 친민당 주석은 이번 선거에서도 친민당 후보로 총통 선거에 입후보해 4.26%의 표를 획득하며 국민당과 표를 나눠 가졌다. 친민당은 국민당에서 분화한 당으로 ‘범람(汎藍)진영(범보수)’으로 꼽히는데, 중국과 더욱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중국 후난성(湖南省)에서 태어난 외성인 출신 쑹추위는 과거 국민당의 촉망받는 차기주자 중 한 명이었다. 장징궈(蔣經國) 전 총통 시절 정부대변인인 신문국장 출신으로, 1994년 민선 지방선거 실시 직후 ‘대만성 성장’으로 선출되며 한때 ‘소(小)총통’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2000년 총통 선거 때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이 롄잔(連戰) 전 부총통을 국민당 후보로 내세우자, 쑹추위는 국민당을 탈당해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 그 결과 당시 선거에서 롄잔을 앞세웠던 국민당은 무소속 쑹추위와 표가 갈리면서 민진당 천수이볜에게 최초로 정권을 내주고야 말았다.
마치 한국의 1997년 15대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과 이인제(국민신당) 후보가 분열되면서 민주당계(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룬 상황과 흡사했다. 2004년 총통 선거에서는 국민당 롄잔과 친민당 쑹추위가 정·부총통 후보로 러닝메이트를 구성해 출전했으나, 천수이볜 ‘암살미수사건’의 여파로 재집권을 막지 못했다. 이후 쑹추위는 정계 은퇴와